요21:15-17
15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어린 양을 먹이라 하시고
16 또 두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가로되 주여 그러하외다 내가 주를 사랑하는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가라사대 내 양을 치라 하시고
17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내 양을 먹이라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디베랴 바다에서 밤새 고기잡이를 했으나 아무것도 잡지 못한 제자들의 허탈한 삶 한복판으로 부활하신 주님께서 직접 찾아오신다. 밤새 허탕만 친 제자들에게 엄청난 포획의 기적을 선물해 주시고 이로 인해 그들의 공허함과 허무함이 극복되게끔 하신다. 153마리의 큰 물고기가 단숨에 잡힌 것도 기적이거니와 목화 재질의 변변치 않은 그물이 그런 수많은 물고기의 무게를 견뎌내고 성하게 보존된 것이 어찌 보면 더 놀라운 기적이다. 주님께서는 밤샘노동으로 지친 제자들을 위해 아침 식사를 친히 차려 놓으셨다. 이 식사는 오병이어 사건을 회상시키는 아주 특별한 밥상이다 (요6:1-14 참조). 그러나 요한복음은 여기서 바로 끝나지 않는다. 21장 15절은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로 시작하는데, 이 특별한 식사 이후에 아직 무언가 중요한 일이 남아있음을 암시한다.

오병이어 사건을 연상시키는 극적인 아침 식사 후, 주님께서 베드로에게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고 물으신다. 여기서 “이들”은 헬라어 문법상 베드로의 동료 제자들을 가리킬 수도 있고, 또 베드로가 포획한 물고기들과 그물, 배를 포함한 그의 어업활동을 전반을 지칭할 수도 있다. 요한복음 21장에서 고기잡이로 돌아간 베드로를 부활 예수께서 제자로 회복시키시는 장면을 보고 있노라면 (21:2-3) 그리고 저자 요한이 이 장면을 일전에 어부 일을 하다가 “사람 낚는 어부”로 부르심을 받았던 장면(눅5:1-11 참조)과 중첩시키고 있음을 생각하노라면, 아마 어업 활동 전반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 더 설득력 있는 듯 하다. 그러나 “이들”이란 지시대명사가 어느 쪽을 가리키든 간에 예수님께서는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는 질문을 통해 주님 자신이 베드로의 궁극적 사랑의 대상인지 여부를 묻고 계심이 분명하다.

주님은 같은 질문을 세 번씩이나 반복하신다.

네가 이들보다 나를 더 사랑하느냐 (21:15)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6) ……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21:17)

그런데 세 번째로 질문하셨을 때, 베드로가 “근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 가로되(21:17)

여기서 ‘근심하다’라는 동사는 헬라어로는 루페오인데, 이 단어는 ‘고통을 느끼다’ 혹은 ‘심각한 내통 진통을 갖다’ 등의 강도 있는 뜻을 담고 있다. 실제로 요한복음 16:20에서는 같은 동사가 제자들이 예수님의 죽음을 슬퍼하는 모습을 묘사하는 데 사용된다. 그런데 베드로는 왜 세 번째 질문을 받고 나서 심한 내적 진통을 느꼈을까? 왜 세 번째 질문에 이르러서 갑작스런 내면적 아픔이 돌출한 것일까?

그것은 세 번 연속된 질문이 베드로의 3회 연속 부인 사건을 직접 연상시켰기 때문이다. 세 번의 부인(요18:17, 25, 27)과 세 번의 사랑 고백(요21:15, 16, 17)은 서로 대조적 평행을 이룬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는 예수님의 질문이 세 번째로 반복될 때, 베드로는 주님의 의도를 정확히 이해했다. 주님께서는 실패한 제자 베드로가 스스로의 실패를 직면하고 시인함으로써 진정한 회복의 길로 나아가도록 돕고 계신 것이다. 주님께서는 베드로가 스스로의 실패를 간과하게 하지 않으시고 이를 직면케 하신다. 지난 일이니 그냥 덮어두고 넘어가자고 하지 않으신다. 도리어 강력한 내적 통증까지 수반하는 적나라한 직면의 과정을 통해 처참히 실패한 제자를 회복시켜 주님의 양을 돌보는 목자로 그리고 충성된 제자로 세우신다.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고, 실패를 있는 그대로 직면하는 것이 회복의 지름길이다. 그러한 적나라한 직면 없이는 참된 회복도 없기에 주님께서 베드로가 스스로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직면케 하신다.

주님의 십자가 은혜와 죄의 용서를 강조하는 과정에서 과거의 잘못과 실패를 회피하거나 적당히 덮어두는 경우가 종종 있다. 하지만 죄에 대한 참된 인정 없이 구주의 십자가를 겸손히 의지하는 일이 가능한지 잘 모르겠다. 실패에 대한 진정한 시인 없이 참된 회복이란 존재하지 않는 듯하다. 디베랴 바닷가에서 베드로를 만나주신 주님은 베드로 스스로가 변절자요 배신자였음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게 하신다. 그러나 주님께서 베드로로 하여금 스스로의 실패를 처절하리만큼 있는 그대로 직면케 하심은 결코 이 제자를 넘어뜨리기 위함이 아니다. 그를 유기하시려고 그렇게 하시는 게 아니다. 도리어 그를 다시 세우려 하심이다. 그를 다시 살리시기 위함이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우리로 하여금 스스로의 실패를 있는 그대로 직면케 하심은 우리를 심판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리를 회복시키기 위하심이다.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은 주님께서 이미 십자가에서 받으셨다 [요1:29 참조]!) 이를 이해한다면, 주님의 제자들은 (비록 심한 내적 통증을 피할 수 없는 경우라도) 스스로의 실패를 그대로 직면해야 한다. 자신의 죄를, 실수를, 과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 그런 직면의 과정에서 느껴지는 내적 진통이 있다면 그것은 사실 회복의 전조일는지 모른다. 적어도 이날 아침 베드로에겐 그랬다.

세번째 가라사대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니 주께서 세번째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하시므로 베드로가 근심하여(심한 내적 진통을 느끼며) 가로되 주여 모든 것을 아시오매 내가 주를 사랑하는 줄을 주께서 아시나이다 (21: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