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회 기독교학술원 창조론
▲조덕영 박사.
(Photo : ) 60회 기독교학술원 창조론 ▲조덕영 박사.

 

 

4차 산업혁명의 충격, 다가오는 미래가 아닌 현실 

경제학자이자 저명한 미래학자라는 국내 한 전문가의 미래 예측 저술을 살펴보았다. 출간 4개월 만에 20판을 넘긴 대단한 베스트셀러였다.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은 미래를 예측한 그 책 안에 4차 산업혁명이나 인공 지능과 같은 언급은 전혀 없었다는 사실이다. 겨우 12여 년 전에 나왔던 이 베스트셀러의 현실이 바로 미래에 대한 우리 조국의 둔감한 현실을 말해준다.

4차 산업혁명은 지난 2016년 1월 세계경제포럼(WEF)이 '일자리의 미래'(The future of jobs)라는 보고서를 통해 "인공지능 기술 등이 발전하면서 향후 5년 동안 선진 15개국에서만 일자리 500만개가 사라질 거라고 경고"하고, 같은 해 3월 인공 지능 "알파고"와 세계 최정상급 프로바둑기사 이세돌 간의 세기적 바둑 대결 이후 급격하게 한국 사회의 대표적인 화두로 자리 잡았다. 국내외적으로 이 같은 경고와 위기와 충격은 현재 진행형이다. 2000년 초반 600여명에 달했던 미국 대표적 금융기업 골드만삭스의 뉴욕 본사 트레이더는 현재 2명까지 줄었다. 일부 국내 유명 대학병원은 발 빠르게 암 진료에 값비싼 인공 지능(AI) 닥터 "왓슨"을 도입하여 성과를 거두고 있다. MRI가 모든 대형병원에 필수이듯 이제 인공 지능 닥터 도입도 시간문제로 보인다. 만일 알파고가 아니었다면 아마도 우리의 현실은 여전히 4차 산업혁명에 대해 대중들은 그저 무덤덤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제 4차 산업혁명은 다가 올 미래가 아니다. 이미 시작된 현실이 되었다. 전문가를 자처하는 사람들이나 국내 언론들이 인공 지능 알파고와 이세돌의 세기적 대결에서 거의 모두 이세돌의 일방적 승리를 점쳤던 만큼 4차 산업혁명이라는 단어는 우리 사회에 이렇게 더욱 큰 충격으로 다가왔다.

4차 산업혁명, 인류에 왜 충격인가?

최초의 산업 혁명은 유럽과 미국에서 18-19세기에 걸쳐 일어났다. 이 혁신의 주체는 사실 그리스도인들이었다. 1685년 10월 18일 프랑스 루이 14세가 낭트 칙령의 철회를 선언하면서 프랑스의 칼뱅주의 개신교인인 위그노들은 박해를 피해 여러 해에 걸쳐 25만 명 이상 영국·프로이센·네덜란드·스위스 그리고 신대륙 아메리카로 피난길에 올랐다. 이들 대부분 당시 신앙 안에서 유럽의 혁신을 주도하던 기술자들이었다. 영국에서 철도와 증기 기관이 발명되면서 산업혁명이 시작된 것도 바로 이들의 영향이 컸다. 제2차 산업 혁명은 제1차 세계 대전 직전인 1870년에서 1914년 사이에 1차 산업혁명의 연장선상에서 전력 공급을 통한 철강, 석유와 같은 신규 산업의 확장과 생산 조립 라인의 출현으로 대량 생산의 길이 열리며 급격한 기술 진보를 이룬 시대를 말한다. 제 3차 산업혁명은 바로 컴퓨터, 인터넷 및 정보 통신 기술 (ICT)을 중심으로 1980년대 이후 시작된 디지털 혁명 시대를 말한다.

그리고 우리의 현실이 된 ​제4차 산업 혁명(fourth industrial revolution, 4IR)은 더욱 빠르게 다가왔다. 바로 정보통신기술(ICT)의 융합으로 이루어내는 지금의 혁명 시대를 말한다. 이 혁명은 인공지능, 빅 데이터, 로봇, 사물 인터넷, 3D 프린팅, 무인 운송, 나노, 바이오 기술 등 거의 모든 지식 정보 분야에 걸쳐 눈부신 속도의 발전을 통해 제 4차 산업혁명 시대를 이끌고 있다. 제1차 산업혁명을 대표하는 기계 부품인 '축(spindle)'이 유럽 이외 지역에 보급되는데 120년 가까이 걸린데 비해, 인터넷이 전 세계에 확산되는 데는 10년도 채 걸리지 않았다. 4차 산업혁명 시대는 선점하는 기업이 시장을 독점하고 후발주자는 추격이 거의 불가능한 승자독식의 시대가 될 가능성이 크다. 열매는 소수가 독점하고 나머지 부스러기를 여러 사람이 겨우 나누는 시대가 될 수 있다. 4차 혁명은 이렇게 말 그대로 모두에게 '개혁(Reformation)'이 아니라 '혁명(Revolution)'을 요구하고 있다.

4차 산업혁명 속, 인간의 자리

인간은 정말 특별한 존재다. 성경은 우리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을 닮은 존재(Imago Dei)로 창조되었음을 계시한다(창 1:26). 이 인간은 땅을 정복하고 땅에 충만하며 세상을 다스릴 청지기의 소명을 받았다(창 1: 28). 이렇게 인간은 다른 생명체와 구별되는 특성을 소유한다. 그 특성은 종교적 영성, 창의성, 논리성, 참 지혜와 지식, 공의와 의로움과 거룩성, 사랑 등을 포함한다. 인간이 다른 생명체와 달리 창의적 언어와 논리성으로 무장하고 창의적 기술 혁명을 이룬 것도 바로 그 같은 독특성을 반영한다. 다른 생명체와 뚜렷하게 구별되는 인간의 이 같은 특성은 인간이 우연이나 진화적 산물이 결코 아님을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그런데 인간이 지닌 이 선한 형상과 청지기적 소명은 아담과 하와가 에덴에서 추방당한 이후 일그러질 대로 일그러지고 말았다. 인간의 독특성은 죄악이 관영하면서 자유와 방종과 폭력과 군림과 지배와 탐욕의 방식으로 변질되어버렸다. 과학기술로 대변되는 이 산업혁명은 탐욕에 일그러진 우리 인간의 죄성 속에서 신앙과 어떤 관계를 가져왔는가?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이 같이 급격하게 변해가는 세상 속에서 어떤 청지기가 되어야 하는 것일까?

혁명의 시대, 새로운 불평등

산업혁명의 새로운 시대는 분명 우리 시대 사람의 질과 복지를 바꿀 것이다. 혁신과 파괴는 긍정과 부정의 영향을 동시에 주면서 새로운 불평등을 만들어낼 것이다. 국가 간 불평들도 심화될 것이요 개인적 불평등도 심화될 것이다. 제4차 산업혁명의 신기술과 혁신은 폭넓게 확산 중이지만 지구촌 곳곳은 여전히 과거의 산업혁명이 지속되는 환경 속에서 살고 있다. 세계 인구의 17%는 여전히 제2차 산업혁명조차 경험해보지 못한 상태다. 아직도 13억 명은 전기를 사용하기 어려운 사람들이다. 인터넷을 사용하지 못하는 인구도 세계 인구의 절반이 넘는 40억 명에 달한다. 3차 산업혁명을 주도하던 글로벌 기업 노키아나 소니가 무너지고 구글이나 페이스 북, 알리바바와 같은 새로운 대기업이 부상한 것처럼 제4차 산업혁명의 창조적 혁신 시대는 노동력의 순환이 빨라지면서 노동력의 불안과 위기를 야기하고 국가적 위기 사이클의 변동이 급진적 위력을 발휘할 가능성을 높인다. 지구촌 인류는 앞으로 정보와 경제와 문화적 혜택 등에 있어 지금보다 더욱 불평등한 기울어진 운동장에서 살 가능성이 크다. 세계적 경영학자 피터 드러커가 1997년 한 인터뷰에서 "30년 후 대학 캠퍼스는 역사적 유물이 될 것"이라고 전망한 것은 시사하는 바가 크다. 유다시티 창업자 스런 교수는 2012년 4월 한 잡지와의 인터뷰에서 "50년 이내에 세계에서 단 10개 대학만 대학 교육을 담당하게 될 것"이라 예측했으며, 미 위스콘신대 비즈니스스쿨의 한 교수는 교수 4명이 세계 모든 학생에게 미적분을 가르칠 수 있는 날이 올 수 있다고 내다보기도 했다. 지구촌 전체의 사회적 불안정과 불평등 지수가 요동 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예견이 아닐 수 없다. 우리 교회는 이 같은 격동의 세상 속에서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가?

이세돌 알파고 대국
▲이세돌 9단과 알파고의 대국 생중계 장면. ⓒ구글 제공

과학은 가치중립적인가?

 

로런스(William. W. Lowrance)는 현대 과학과 가치에 대한 논의에서 (1) 사회적 가치는 과학에서만 유도될 수 없으며 (2) 지식은 선과 악에 다 쓰일 수 있으나 가치중립(value free)적이지 못하며 (3) 새로운 지식이 나타나면 그것의 쓰임새에 주목해야 하고 (4) 기술 활동이 기술자들의 활동에 영향을 미치고 대중의 삶에 영향을 준다는 점에서 가치 의존적이며 (5) 기술 전문가들은 대중의 입장에서 대중을 위해 결정을 내려야 하고 (6) 과학이 문화적 전망을 바꾸거나 인간의 마음과 육체와, 우주, 인간 사회의 관념을 바꾸어버리거나 서로 다른 대안 중 하나를 선택하게 한다는 점에서 우리 인류의 세계관적 판단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보았다. 로런스의 언급은 과학이 필연적으로 가치의 문제와 부딪히게 마련임을 간파한 것이다.

여기서 윤리적 논쟁이 반드시 싹트게 된다. 특별히 종교와의 긴장은 당연히 대두 된다. 종교든 윤리든 그 기조에는 정의가 있기 때문이다. 핵연구가 핵무기 개발과 대형 핵발전 참사로 이어진 점, 독성 연구가 테러용 맹독 기술로 이용된 점, 좋은 육질의 고기를 제공하기 위한 육류가 포함된 사료 개발이 광우병 사태로 이어진 점, 장기 이식 수술의 등장이 멀쩡한 장기를 사고파는 장기 밀매매로 이어진 점, 많은 과학기술의 성과가 범죄에 악용된 점, 과학기술이 세상에 편리함은 가져다주었으나 부의 편중과 새로운 인간 소외, 빈부 격차, 환경생태오염과 파괴, 자동 기술로 인한 대량 실직 사태, 과거에 없던 크고 작은 다양한 안전사고로 인한 다수의 사망자와 중도 장애자를 발생 시킨 점 등등 과학발전의 부산물들은 결코 가치중립적이 않음을 알 수 있다. 4차 산업혁명은 이 같은 다양한 문제점들을 더욱 더 사회 속에 쏟아낼 것이 분명하다. 어쩌면 혁신과 파괴와 급진적 특성을 가진 4차 산업혁명시대에는 지금까지 결코 경험한 적이 없던 윤리적 문제나 인간 존재 본질에 대한 근본적 질문을 던지는 이슈에 정면으로 대면하는 경우도 발생할지 모른다.

4차 산업혁명 속의 그리스도인, 방치인가 공존인가 갈등과 긴장인가?

과학 기술은 지금까지 어떤 사회적 역할을 해왔을까? 그리스도인들은 이 문제에 대해 어떻게 반응해야 할까? 방치인가 조화와 공존인가 갈등과 긴장인가? 오늘날 과학 기술의 발달이 질병을 극복하고 소통의 거리를 단축 시켰으며 새로운 기회 창출을 가져왔다고 긍정적 측면을 크게 보는 학자들이 있는 반면, 과학 기술이 부의 편중, 인간관계의 비인간화, 귀중한 자원의 고갈, 환경오염, 대량 학살 무기의 등장으로 인해 인간 존재에 대한 위협을 초래하였다고 비난하는 학자도 있다. 기독학자들도 양편으로 나뉜다. 현대과학기술이 기독교적 이해와 긴장 관계에 있다고 보는 자크 엘룰(Jacques Ellul)같은 학자와 기독교와 조화와 공존이 가능하다고 보는 하비 콕스(Harvey Cox)와 프리드리히 드사우어(Friedrich Dessauer)같은 학자들도 있다.

기독교는 현실로 다가온 4차 산업혁명의 과학기술 앞에 어떤 입장을 취해야 할까? 그저 한숨만 쉬며 방치하거나 과학기술을 철저히 외면해야 할까? 과학기술 문명을 대단히 경계하고 부정적으로 바라보며 거부하거나 의심을 거두지 않는 재세례파 계열의 아미쉬나 메노나이트 같은 교파들처럼 자연 속으로 숨어버리거나 그저 탄식하며 냉소적으로 살아야 할까?

과학기술이 인간의 죄성으로 인해 많은 경우 선용보다는 악용되어 왔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무조건 방치하고 외면하는 것은 옳지 않다.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속한 자는 아니나 그리스도인들도 세상 안에서 세상 가운데 살아가야 하는 존재다. 오늘날 세상의 학문과 문화는 철저히 세속화 되어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외면해버렸다. 성경은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며 하나님보다 높아진 것들을 파하고 그리스도의 발(주권) 앞에 복종 시키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사명임을 분명히 한다(골 3:17; 고후 11:5). 과학기술문제에도 그리스도인들은 당연히 이 명령에 따라야 한다. 즉 과학 활동도 인간 문화 활동의 한 형태로서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 수행되어야 한다. 우리 그리스도인들도 과학발전에 따른 윤리적 의사결정 문제를 고민해야 하는 것이다.

4차 산업혁명시대, 하나님의 사랑과 샬롬이 필요하다

급진적 시대는 항상 불안과 불평등과 인간 소외와 위기를 야기한다. 하나님의 창조는 본래 사랑과 평화의 질서였다. 이 사랑과 평화는 인간이 에덴동산에서 추방당하면서 와해(瓦解)되었다. 기독교는 기독론적 사랑과 샬롬을 창조와 구속 모두에 적용해야 한다. 창조자로서의 하나님 말씀과 구속자로서의 하나님 말씀 사이에는 아무런 모순이 없다. 평화는 모든 과정에서의 인간다움의 부분으로 공동체의 완전함, 건강함, 흠이 없음을 추구한다. 과학기술이 주도하는 이 시대 안에서 하나님의 선하신 창조의 질서와 성경에 그 뿌리를 둔 하나님 샬롬의 과학, 하나님의 과학으로서의 샬롬, 즉 하나님의 선하신 질서 안에서의 사랑과 샬롬이 필요하다.

기독교는 과학발전이 가져다준 인간 소외와 상실감을 어떻게 사랑과 샬롬 안에서 따뜻하게 회복시킬 것인지 늘 고민해야 한다. 과학발전이라는 미래의 세속적 상황 안에서 어떻게 기독교는 초월적 사랑과 내재적 사랑을 동시에 만족하는 기독교적 사랑과 샬롬의 가치를 실현할 수 있을까? 쉽지 않다. 하지만 테크놀로지가 장애인들이나 약자들을 위한 배려(점자 책 개발, 무료 개안 수술, 저개발국 지원, 장애인용 전동차 개발, 약자를 위한 인공 지능 활용 등등)로 나타나는 것 등은 초월적 사랑을 휴먼 테크놀로지로 승화하는 작은 실마리를 제공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인도의 신학자요 생태학자인 켄 그나나칸(Ken Gnanakan)은 하나님이 인간에서 맡기신 '다스림' 안에는 사랑, 상호 연결, 지속 가능한 창조성, 다른 이들을 위한 배려, 종으로서의 섬김, 청지기, 하나님의 창조물에 대한 존경심, 정의라는 8 가지 요소가 들어있다고 했다. 마치 예수께서 죄 짐 맡은 우리 구주요 좋은 친구였던 것처럼 인간은 세상 청지기로서의 짐을 지되 사랑 안에서 더불어 함께해야 하는 것이다. 창조는 종말론적 구원을 지향한다. 태초에 하늘과 땅을 지으신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든 피조물을 위한 새 하늘과 새 땅을 이루실 것이며(사 65:17, 계 21:1), 아담의 죄로 인해 파괴된 인간과 동물 간에도 평화가 다시 회복될 것이다(사 65:25). 그 때까지 인간은 다스림의 위치에서 소명을 감당해야 한다.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한 삶을 살며 과학발전도 그리스도의 사랑과 샬롬을 충만케 하는 도구가 되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다가온 4차 혁명시대 앞에 그리스도인이 너무 심각하게 위축될 필요는 전혀 없다. 기억하라! 주님은 놀랍게도 영광의 예루살렘이 아닌 늘 소외된 갈릴리 약자의 편이었음을. 그리고 하나님은 (그 무엇보다도) 항상 크심을(Deus semper Maior)!

조덕영 박사(창조신학연구소 소장,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