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령받음

김창영 | 생명의말씀사 | 168쪽 

참신한 주제

고대 그리스도교로부터 오늘날까지 많은 신학적 발전을 통해 하나님을 바르게 알고, 바르게 믿는 것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고 있다. 역설적이게도, 이러한 신학적 발전은 사실 이단들의 출현이 큰 도움이 된 것이 사실이다. 신학사상사적으로 볼 때 이단들 또한 하나님을 잘 믿고자 한 의도에서 오류를 범했음을, 우리는 함께 봐야 할 필요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그러한 이유는 오늘날 건전한 신학의 뒷받침이 되었던 훌륭한 신학적 선배들 또한 완벽하지는 않았다는 것을 통해서도, 진위는 가리되 그들의 진심까지 매도하는 것은 그렇게 바람직하지 않다고 본다. 물론 신학(교리)의 역사 또한 개인적 기호와 교회 정치적 승자의 기록물이기에(단정지어선 안 되지만, 충분히 감안해야 한다), 상대에 대해 강한 반감과 경계를 하였다는 것 역시 감안할 필요가 있다.

성령

사실 성부와 성자에 관한 교리는 거의 그 중심이 마무리됐고, 그 적용의 확장성 문제만 남아있다. 그러나 성령의 문제는 성경에 기록된 내용 안에서 여전히 완전히 해결(정리)되지 못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 오늘날 교회는 성령에 대해 가장 많이 언급하고 있지만, 성령은 오늘날 교리적 갈등의 중심에서 여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이유는 현재도 계속되는(성부와 성자는 보좌에 계신다. 그러나 성령은 지금 우리 가운데 계신다) 초월과 내재의 문제와 인격(존재)과 기능의 성향에서, 하나님의 주권과 인간의 자유의지에 직·간접적으로 관계되고 있기 때문이다.

오순절에서 신사도주의

일반 정통 교회와 신학에서는 성령을 '인격적 관점'에서 신앙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은혜를 강조하고, 체험적 신앙을 추구하는 성도들이나 목회자들은 성령의 '기능(능력, 은사)적 관점'에 더 중심을 두고 신앙한다.

그 대표적 예가 오순절 교단이었다. 그러나 오순절 교단도 성령의 능력과 체험이 온전한 성화를 이루는 것이 아니라는 한계들을 인식하면서, 어느 순간부터 성령의 인격성을 강조하기 시작했다. 그러자 여전히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사모하는 자들은 더 이상 오순절 교단에서 만족할 수 없게 되면서, 신사도주의적 성향으로 흡수되고 있는 것이 오늘날 한국교회 현실이지 않나 생각한다.

개인적으로, 과거 오순절 교단과 현재 신사도주의의 특징은 성령의 능력과 체험을 강조하는 것 외에도, 그들의 성경해석 방식에서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다. 그들은 문자주의적 성경해석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러한 공통점들은 결과론적으로 볼 때 과거 오순절에서 신사도주의로 리더만 바뀌었지 성경해석과 믿음의 방식과 성향, 그리고 그 목적하는 바는 오순절과 신사도주의가 동일하다고 여겨지고 실제 나타나는 현상이 거의 흡사하다.

과거 오순절 교단과 현재 신사도주의가 가지고 있는 핵심적 특징인 문자주의적 성경해석 방식으로 인해, 이들이 성령을 기능적 중심(그들은 성령을 인격적으로 믿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정확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성령의 인격을 인정하면서 인격적인 성령을 기능적 '능력과 체험'으로 믿고 있는 것이다)으로 믿게 된다고 보인다.

성령에 관한 성경 본문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함으로써, 하나님을 신앙하는 것이 주관적 체험과 직접적으로 연결되고, 하나님의 임재와 성령의 역사를 결국 주관적 체험과 능력, 은사들로 귀결시키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신학적 지식이다(그들은 인정하지 않을지 모른다). 왜 사도 요한이 성령을 인격적으로 묘사하고 가르쳤는지, 왜 사도 바울이 로마서와 고린도전후서 등에서 성령을 기능적으로 표현했으며, 특히 고린도교회에 '예수를 시인하는 것'과 '성령의 역사'를 동일시하고 있는지 등에 대한 배경적 지식 등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렇지 않고 그냥 문자 그대로만 해석하고 있기 때문에 편향적 현상이 나타나고, 그로 인해 불필요한 많은 문제들이 양산되고 있는 것이다.

결론

필자가 보기에 본서의 주제는 매우 참신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내용은 기대에 미치지 못했다. 각각의 주제와 상관없는 전개와 결론들이 여러 곳에서 발견됐고, 그 접근 방식에서도 종종 앞서 언급한 문자주의적 해석으로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본서를 읽으면서 반복적으로 저자의 이력을 확인하고 또 확인할 수밖에 없었는데, 그 이유는 저자의 신학적 배경과 학위를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본서의 저자와 출판사에게 가혹하게 여겨지겠지만, 필자가 생각하기에 본서는 상당 부분 신사도주의적 느낌을 주고 있다고 본다.

그래서 본서를 읽는 동안 여러가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만한 학위를 가진 분이 이런 글을 쓴다는 것은, 본인의 중요한 체험으로 인해 신학적 관점을 배제한 실제적 관점에서 쓰고자 의도한 글쓰기라고 보는 것 외에 달리 납득할 추론이 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본서는 신앙의 현장에서 자신의 영적 체험에 대한 궁금증이나 성령의 역사에 대해 갈급한 분들에게 어느 정도 해갈은 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본서의 내용을 성령이나 성령의 역사를 이해하는 기준으로 보는 것은 좀 무리가 있다고 여겨진다.

부족한 자가 숙고와 땀을 들여 책을 낸 저자와 출판사에 대하여 평가하거나 판단하는 것이 매우 조심스럽고 두려우며, 엄청난 부담감을 느낀다. 그럼에도 서평자의 입장에서 비록 주관적이기는 하지만, 정직한 서평을 쓰는 것이 저자와 출판사, 그리고 앞으로 나올 책들에 대한 바른 예의라고 여겨진다.

개인적으로 독자들이 본서를 읽을 때 '성령에 관한 에세이(에세이 형식을 취하고 있지는 않다)' 정도의 개념으로 읽는다면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된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