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할까? 마침 이 주제로 지하철에서 스마트폰을 이용해 글을 쓰는데, 한 젊은이가 자기 친구와 통화를 하면서 말한다. "야, 웃기지 마. 친구 같은 소리 하네.... 남녀 사이에 친구는 절대 없다는 거, 그게 진리다, 너."

대개는 이 젊은이처럼 생각을 한다. 그러나 이런 말을 부정하고 싶은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문제가 궁금한 사람 중에는 자기 연인의 이성 친구가 신경쓰여서 불가능의 증거들을 찾으려는 사람도 있을지 모른다.

보통 자기 이성 친구는 절대 친구 이상은 아니라고 하면서도, 연인의 이성 친구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믿고 싶을 것이다. 특히 욕구가 일차원적인 남성들은 남자는 아무도 못 믿을 존재로 여기기 때문에 더 그럴 것이다.

사실 남녀가 친구가 될 수 있는지 없는지는 논할 필요조차 없다. 세상에 아무도 없고 남자와 여자만 있다면 둘은 친구일 수 없으니까. 정말로 동성 같은 이성 친구라도, 오랜 시간 무인도에 둘이만 있는다면 결국 그들은 부부가 될 테니까.

그런 극단의 원초적 상황이 아닌 일상에서,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한가의 문제는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답을 내릴 문제가 아닌 것 같다. '가능하다'는 답을 내릴 수 없다는 것은 곧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O, X의 답을 하라면 X라고 하겠다. 남녀 사이에 친구란 없다.

어떤 이들은 자기 이성 친구를 말하면서 아기 때부터 같이 목욕을 하면서 자란 사이라거나, 단 둘이 무인도에 10년을 있어도 결코 연애 감정이 생기지 않을 '녀석들'에 대해 말하곤 한다. 하지만 지금 같이 목욕을 할 수는 없지 않나? '무인도에서의 10년' 같은 상황은 일어날 수도 없는 상황이고, 단지 강조 용법이다. 그런 현실성 없는 가정으로 가능성을 부정하는 것은 설득력이 없다.

2. 왜 이성 친구는 궁극적으로는 불가능한가?

분명히 동성 친구보다 허물이 없고, 더 의리가 있는 이성 친구, 결코 애정으로 변질(?)시키고 싶지 않은 우정을 나누는 이성 친구도 많다. 그런 친구를 요즘은 성별을 빼고 남자사람친구, 여자사람친구, 줄여서 남사친, 여사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하지만 각종 돌발 사태와 예기치 못한 사고로 선을 넘을 위험성은 늘 존재한다. 실제로 술기운에 그런 실수를 저지른 사례도 종종 있고, 영화에도 나온다.

지나치게 자제력이 떨어지고 힘이 들 때, 동성 친구나 가족이 해결해 주지 못할 문제를 공유하면서 평소와 다른 감정으로 기댈 수 있는 것이 이성 친구일 수 있다.

하지만 감정이란 마음먹은 대로만 흘러가는 것도 아니고, 한쪽에서만 잘 조절한다고 되는 일도 아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아무 거리낌 없이 지낸다 해도, 주변의 따가운 시선과 남들의 오해로 더는 친구 관계를 유지하기 어려운, 뜻하지 않은 상황이 올 수도 있다. 그토록 잘 통하고 친밀하다는 사실 자체가 잠재적 위험성(?)을 말해준다. 절친과 연인은 종이 한 장 차이이다.

프랑스 영화 <러브 미 이프 유 데어(2003)>는 징글징글하게 싸워대면서도 서로에게 끝까지 집착하는 두 남녀의 다소 기괴한 성장기이다. 이 영화의 상위 베댓은 거의 모두 10점 아니면 1점이다.

이 희한한 반응은 뭘까? 이것은 단지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린다는 표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현상이라고 보는데, 영화를 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실성한 듯한 악동들의 불편한 이야기에서 남녀 사이와 친구 사이라는 알쏭달쏭하고도 아슬아슬한 코드를 읽는 즐거움에 공감하는가 아닌가의 차이가, 사람들의 반응을 극명하게 가르고 있다.

8살 때부터 서로를 알아본 소피와 줄리앙은 같은 침대에서 자면서도 아무렇지 않을 정도로 남매처럼 자라는데, 서로 지독하게 싸우고 엽기적인 악동 짓을 하며 내기를 하고, 이긴 사람이 철제 원통형 사탕 박스를 차지한다는 규칙을 만든다.

서로 사랑했지만 질투와 대립 속에 관계가 틀어져 따로 결혼도 하고, 나이가 들어가면서 10년 동안 만나지 않았지만, 삶은 어느 누구와도 늘 시들하고 재미가 없었다. 그들의 눈이 반짝일 때는 오직 둘만의 내기로 사탕 박스를 차지할 때뿐.

그들의 사탕 박스는 헤어지지 않기 위한 장치이자 무언의 약속이었다. 끝까지 싸우는 둘은 연인이 될 수도 헤어질 수도 없는 상황, 그리고 서로가 없는 각자의 다른 삶도 전혀 무의미한 상황. 또 다시 극한의 격돌 중 우연한 장소에서 그로테스크한 방법으로 동반자살한다. 말 없는 낡은 철제 상자만이 유일한 목격자였다.

나는 이 영화를 추천하는 게 아니다. 세련된 표현과 영화 예술로서의 언어는 놀랍지만, 크리스천이 동의할 수 없는 세계관이다. 다만 소피와 줄리앙은 쌍둥이 같은 영혼을 지닌 이성이었기에, 이런 비극적 해피엔딩을 택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말하는 것이다. 동성이었다면 겪지 않아도 될 번민이었다. (동성애로 흐르지 않는다는 전제로 말이다.)

이처럼 남녀는 간단히 편안한 친구라고만 하기에는 많은 숙제가 따른다. 그게 아니라면 애초에 남녀 사이에 친구가 가능하냐는 질문 자체가 없었을 것이다.

사람은 아무리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허물없는 친구들이라도 동성을 만날 때보다 이성을 만날 때 거울이라도 한 번 더 보기 마련이다. 그러니 남녀 간에도 친구가 가능하다는 말은 궁극적으로 틀린 말이 아닐까. 친구를 사랑하는 일에 자제력이 필요하다면 그 역시 자연스러운 모습은 아닐 것이다.

주변적인 이야기를 많이 했지만, 성경에는 남녀 사이이면서 친구 관계인 예는 나오지 않는다. 이는 성경이 보수적인 옛날 책이라서 현 시대에 적용할 수 없다고 해석될 부분이 아니라, 하나님이 우리에게 관계를 규정하는 방법을 보여주신 것이라 할 수 있다. 무엇보다 남자와 여자의 창조 목적을 보면 모든 것은 명료해진다.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조력자를 만들리라, 하시니라. (창 2:18, 이하 흠정역)".

여자는 남자의 조력자, 즉 협력자이다. 친구라기보다는 서로 다른 존재로서 상대방의 필요를 채워준다는 느낌이다.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서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로 데려오시니 (22절)".

여자는 남자에게서 나왔으므로, 다시 합쳐질 성질의 존재이지 양립하는 존재가 아니다.

"아담이 이르되, 이는 이제 내 뼈 중의 뼈요, 내 살 중의 살이라. 그녀를 남자에게서 취하였으니 여자라 부르리라, 하니라. (23절)"

남자는 하나님이 특별히 베푸신 여자를 자기 몸처럼 사랑하게 돼 있다. 이 사랑의 종류는 우정이나 형제애가 아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 (24절)"

이처럼 이어지는 구절에서 바로 아내, 즉 배우자라고 여성의 역할을 규정하신다.

물론 이는 기본적 질서에 관한 것이며, 결혼할 때 외에는 여성과 교류도 하지 말라는 뜻으로 생각할 수는 없지만, 흐트러진 세태 속의 문화가 아닌 하나님의 기준으로 보면, 우리가 남녀 사이를 너무 간단하게만 바라보고 있지는 않은지 생각해 보게 된다.

남녀 사이에 친구가 있는지 없는지 판단하는 것은 자유이지만, 이성 친구를 너무 느슨하게 생각하거나 절대 그럴 리 없다고만 생각하는 것은 좋지 않다. 또한 자기 자신은 아무렇지 않아도 주변의 통념이 다르고, 특히 자기 연인의 기준은 다를 수 있으니 배려하면서 명확한 태도를 보이고, 이성 친구와 의심받을 만한 일은 하지 않는 등 조심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결혼한 사람의 경우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남녀가 유별하다'는 식의 생각이 양성평등을 저해하는 구실로 쓰이지 않는다면, 반드시 타파해야 할 고루한 유교적 사고로만 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성경도 분명히 남녀 간에 분별이 있음을 말씀하고 있기 때문이다.

물론 남녀 간에도 진실한 우정을 나눌 수 있는 소중한 관계가 많이 있다. 다만 우정이 정도를 넘어설 경우, 잘 되면 배우자를 얻지만 잘못 되면 귀한 친구도 잃고 자기 연인이나 배우자도 잃을 수 있다. 동성 친구와는 이런 베팅이 필요 없다.

사랑이 과해지면 도박과 제로섬 게임이 되는 이성 친구.... 어쩌면 '이성 친구'라는 말은 '동성 커플'이라는 말처럼 애초부터 모순을 포함하는 말인지도 모르겠다.

김재욱 작가

연애는 다큐다(국제제자훈련원)
내가 왜 믿어야 하죠?, 나는 아빠입니다(생명의말씀사) 외 다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