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한복음 21장 7-8절
7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가 베드로에게 이르되 주시라 하니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8 다른 제자들은 육지에서 상거가 불과 한 오십 간쯤 되므로 작은 배를 타고 고기든 그물을 끌고 와서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이장렬 교수(미드웨스턴침례신학대학원 신약학)

부활하신 주님을 이미 두 차례 대면한 제자들은 베드로의 주도로 고기잡이에 나선다. 밤새 수고했지만 다 허사다. 작은놈 하나 걸려들지 않는다. 부활하신 주님이 그들을 세 번째로 만나주시려 이미 그들 곁에 와 계셨지만, 제자들은 그분을 인식하지 못한다. 호숫가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보았지만 그게 예수님이신 줄은 깨닫지 못한다. 고기잡이에 나선 제자들이 밤새 허탕만 쳤음을 아시는 주님은 대화를 통해 제자들이 철야노동에도 불구하고 작은 물고기 한 마리 잡지 못했음을 있는 그대로 인정케 하시고 이윽고 배 오른편으로 그물을 던지라 명하시며 포획을 약속하신다. 제자들이 주님 말씀 따라 그물을 던졌더니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밤새 제자들과 숨바꼭질을 했던 디베랴 호수의 물고기들이 단숨에 그물에 걸려든다. 철야 작업 내내 단 한 마리도 건지지 못하지 않았던가? 그러나 이제는 한꺼번에 물고기가 너무 많이 걸려들어 그물을 들어 올릴 수조차 없다.

그제야 “예수의 사랑하시는 그 제자” 요한이 부활하신 주님을 알아보고 이를 베드로에게 일러준다 (21:7). 요한이 어떻게 바닷가에 서 있던 그분이 주님이심을 알아차렸을까? 아마도 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기 때문일 게다. 누가복음 5:1-11에 따르면, 예수님께서 처음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실 때도 밤새 허탕을 친 뒤 주님의 도움으로 기적적 포획을 경험한 일이 있었다. 누가복음 5:1-11의 기사는 다른 제자들보다 베드로에게 더 집중하고 있지만, 그의 동업자 야고보와 저자 요한도 그 자리에 같이 있었고 함께 예수님을 따르기로 결단했다 (눅5:10-11). 사 복음서를 통틀어 예수님의 개입으로 기적적 대량 포획을 이룬 사건은 단 두 번 등장한다. 첫 번째가 누가복음 5:1-11이고 두 번째는 바로 요한복음 21장이다! 처음 갈릴리에서 주님의 부르심을 받았던 때와 거의 동일한 포획의 기적이 요한으로 하여금 해변에 서 있던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이심을 인식하게 했을 것이다.

바닷가에 서서 기적적 포획을 가능케 하신 그분이 바로 부활하신 주님이시라는 요한의 이야기를 듣자마자 베드로는 작업 하느라 벗어 두었던 겉옷을 얼른 두르고 허리띠를 졸라맨다. 고기잡이 작업을 위해 겉옷을 벗은 채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겉옷을 둘러 주님에 대한 예의를 갖춘 후, 베드로는 주저 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겉옷을 갖춰 입고 헤엄치는 것이 불편하겠지만, 베드로에겐 예수님에 대한 예의가 편하고 불편하고의 문제보다 더욱 중요하다. 불과 육지로부터 100야드(91.44m) 가량 떨어진 가까운 지점에서 고기를 잡고 있었던 터라 다른 제자들처럼 배를 타고 와도 오래 걸리진 않으련만 베드로는 단 일초라도 주님을 빨리 뵙고자 하는 열망에 하던 일을 모두 중단하고 포획한 물고기도 다 뒤로 한 채 단 한 치의 주저함도 없이 물속으로 몸을 던진다. 주님을 먼저 알아본 것은 요한이었는데, 정작 물에 몸을 던진 것은 베드로다. 어찌 보면 좀 과장된 듯한 베드로의 행동은 바다 위를 걷게 해 달라고 요청하는 한편 칼을 마구 휘둘러 대제사장 종의 귀까지 잘랐던 그의 과단성과 특심을 여실히 드러내 준다.

진리를 좇지 않는 열심은 위험하다. 하지만 진리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삶과 사역에 대한 열정이라고는 잘 보이지 않는 경우를 자주 주변에서 경험한다. 사실 나 자신이 그런 모습은 아닌지도 자문해 본다. 그 가운데 베드로의 과단성과 특심이—비록 위험성을 적잖이 내포하고 있을지언정—귀하게 느껴진다. 주님 계신 곳이라면 만사 제쳐 놓고 나아갈 수 있는 베드로의 열정이 과연 우리 가운데 살아 있는가? 혹시 주변에서 일초라도 주님을 먼저 뵙고자 물속으로 주저함 없이 몸을 던지는 베드로 같은 행동을 볼 때, 그것을 과장되고 형식적인 것으로 비판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비판을 통해 우리 안에 주님 향한 열정이 사라진 것을 정당화하고 있지는 않은가?

오늘따라 베드로의 “거룩한 낭비”가 그립다.

시몬 베드로가 벗고 있다가 주라 하는 말을 듣고 겉옷을 두른 후에 바다로 뛰어 내리더라 (요2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