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10월 기독일보가 주최하고 UBM교회가 주관해 열린 ‘구약에서 길을 찾다’ 에세이 공모전에서 대상을 수상한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의 글 <이스라엘신학 정립의 필요성과 유용성에 관하여>를 네 번에 걸쳐 연재합니다. - 편집자 주

이스라엘신학의 필요성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 과정)
최재환 학생(게이트웨이신학교, M.Div. 과정)

“이스라엘신학”이란 과연 무엇인가?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구약신학도 아니고 이스라엘 종교의 역사 신학도 아닌 구약에 관련된 새로운 신학의 출현으로 봐야 하는 것인가? 구조적 관점에서 본다면 용어 자체로서는 새로운 출현이 옳다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신학”이란 용어가 새로운 개념으로 들린다는 것은 결코 놀랄 일은 아니다. 다만, 내용적인 측면에서 접근했을 때, 우리가 전혀 알지 못했던 미지의 새로운 신학은 아니라고 단언할 수 있다. 필자가 연구하며 이해한 “이스라엘신학”이란 온 세계를 향한 하나님 계획의 원 목적 안에서, 배제되었고 잊고 있었던 이스라엘의 원 기능과 역할을 회복하고 수행하게 만드는 하나님의 비전이라고 정의하고자 한다.

구약신학의 일차적 관심은 명백하게 야웨 하나님이시다. 구약의 하나님은 기독교 교리 신학이 기대하는 바들에 쉽게 들어맞지 않으며, 또한 어떠한 헬라 전통의 철학적인 카테고리들에도 쉽게 들어맞지 않는다. 이 말인즉슨, 우리가 현재 갖고 있는 대부분의 개념들로 구약의 하나님을 규명하고자 한다면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의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의 야웨 하나님에게 보다 근접하게 다가가고자 한다면, 현 시대의 주류 사상 격인 헬레니즘의 이원론적 사고의 틀에서 잠시 벗어나 일원론적인 히브리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하다고 본다.

우리가 성경을 어떠한 편향성도 갖지 않고, 조심스럽게 읽게 되었을 때, 드러나는 사실 중 하나는 구약의 신학적 규명이 기성 교회의 공식적 선언에서든, 아니면 보다 인기 있는 성향에서든, 현대의 대중 교회가 표방하고 있는 신앙과 잘 부합되지 않는다는 점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왜냐하면 구약의 신학적 증언 속에서는, 현대교회신학이 접해보지 못한 거칠고도 길들여지지 않은 많은 것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널리 알려지고 수용된 현대교회신학은 이런 문제에서 벗어나 있는 것처럼 보이며, 그래서인지, 성경에 관해서 안정과 확신을 제공하는 데만 주력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 원인을 제공한 것 중 하나는 바로 교회 역사 대부분의 기간에 걸쳐 성행한 “대체신학”이다. 이 신학 체계에 따르면,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 대한 언약을 폐지시키고, 대신 교회에 언약을 주셨다. 하나님의 선택된 도구로서, 이스라엘의 역할은 끝이 났고 교회가 그 역할을 대신하게 되었다는 해석인 것이다. 그리고 20세기 마지막 25년 이후로는 “실현된 종말론”이 기승을 부리기도 했다. 이 신학 체계에 따르면 이스라엘에게 약속된 천국은 교회에서 실현되고, 천국의 완성은 아직 미래의 일로써, 천 년 왕국이나 종말에 있게 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나아가서,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이 미래의 시간이 오기 전에 이스라엘 민족 전체가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지만 이 대체신학은 현재 검토가 필요한 지경에 이르렀다. 왜냐하면 이스라엘 민족들이 흩어져 있었을 때는 대체신학의 주장이 설득력있게 받아들였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스라엘이 1948년 독립을 함으로써 하나님의 백성들이 다시 한 땅에 모이게 되었다. 이 말인즉슨 하나님의 계시란 측면에서 더 이상 역사의 흐름 속에서 이스라엘을 배제시킬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선택하시고 언약을 맺은 이스라엘이 그들이 잃어버렸던 땅을 다시 되찾고 언약 국가로서 아직 끝나지 않은 하나님의 역사 속에 재등장 하는 위대한 사건이기 때문이다.

또한, 1980년 교황 바오로 2세는, 공식적인 유대 대표자들이 모인 자리에서, 유대인의 신앙을 “하나님에 의해 결코 한번도 철회된 바가 없는 언약”이라고 말한 바 있다. 제2회 바티칸 공의회의 선언들은 유대인들과 크리스천들이 동등한 신앙인임들을 인식하는 쪽으로 서서히 움직여 나아갈 수 있게 도와주었다고 본다. 이런 점 등에서 실제적인 반 유대 사상을 만들어내는 신학적 구약 교체설, 즉 대체주의신학은 반드시 재고되어야 할 문제가 된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셨던 옛 언약의 본질 자체가 새 언약으로 대체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옛 세대 이스라엘 민족은 하나님과 영원한 언약을 체결한 선택된 민족으로서, 육체에 할례를 받고 동시에 마음에 할례를 받은 하나님의 백성들로 구성되었다. 그들에게 하나님이 주신 복과 구원 계획은 그들의 역사 속에서 신기루처럼 사라지는 성질의 것이 아니다. 만약에 사라지게 된다면, 먼 훗날 언제일지 모를 하나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그 때가 하나님의 도구로서의 그들이 받은 언약은 마지막을 맞이하게 될 것이다.

그렇다면 과연 하나님이 선택한 이스라엘은 어떤 민족인가? 우리는 먼저 그들에 대해 올바로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이스라엘의 존재 이유는 그들이 지닌 자생력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바로 야웨 하나님의 주도적인 계획에 따른 행위로 나타난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이스라엘은 하나님에게 선택된 민족이자 나라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자신의 언약 파트너로 선택하셨으며, 그 결과로 인해, 이스라엘은 야웨 하나님의 기대에 반응하고 부응할 수 밖에 없는 특별한 파트너로서 존재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특별한 파트너인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야웨 하나님께 적응하여 사는 일로 구성되었다. 즉 하나님이 계획하신 타협할 수 없는 목적들과 명령들에 적응하여 살 뿐만 아니라, 함께 임재하시고 때로는 부재하시며, 의롭기도 때로는 의심스러운 결과를 주시는 하나님의 성격들에 적응하여 사는 일로 그들의 삶이 구성되었다. 그 결과 이스라엘은 자신들의 삶이 다른 민족들의 삶과 달리, 때로는 손해를 가져오고 때로는 이익을 가져오기도 하는 거룩함을 유지해야 하는 특별한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임을 깨달았다.

신명기 4:7-8 은 구약 시대의 수많은 나라들과 달랐던 이스라엘 민족의 그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당시의 나라들 중 어느 부족이나 나라도 하나님에 대한 충성으로 그렇게 결집된 집단은 감히 없었다. 당시 이스라엘 민족의 삶은 철저하게 야웨 하나님의 특별한 뜻과 언약 목적에만 부합되도록 살아갔기 때문이다. 또 다른 이스라엘 민족의 특징의 예로 “거룩한 전쟁”을 들 수 있다. 폰 라트는 이스라엘 공동체는 하나님을 향한 제사 행위에 의해 그 적법성이 부여되고 제사 행위에 의해 명령되어지는 군사적 행동의 가능성이 있었을 것이란 가설을 세운바 있다. 이 때 여기서 나타나는 “거룩한 전쟁” 개념이란 하나님을 위해 싸우는 이스라엘에 관한 것이 아닌 그 반대로 이스라엘을 위해 싸우시는 야웨 하나님에 대한 것이 올바른 설명일 것이다. 왜냐하면 그 당시의 인근 국가들과 부족들 중, 특별한 민족으로서 이스라엘이란 나라에 특수성에 힘을 더해준 것은 그들 특유의 성격이나 특성이 아닌, 바로 야웨 하나님이시기 때문이다(삼하 7:22-23참조).

그렇다면 하나님은 왜 이스라엘에게 특별한 민족으로서 언약을 체결하신 것일까? 과연 이스라엘은 그 특유의 독특성을 지켜 나감으로써 어떠한 소망을 기대하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은 바로, 하나님이 그의 백성에게 주실 복리, 바로 “샬롬”이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그 약속은 단순히 이스라엘에게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장차 훗날에, 야웨 하나님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해당될 수 있음을 성경은 말하고 있다.

프랑스의 신학자 에드몽 자콥은 다음과 같이 말한바 있다. “구약성서는 우리에게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을 제공하지 않고 그 대신에 하나님의 행동들에 대해서 말하고 있다. 구약성서의 하나님은 자신의 초월성을 버리고서 자신의 운명을 자기 백성의 운명과 연결시키며 그 백성을 통하여 인류 전체의 운명과 연결시킨다.”

다시 말하면, 구약성경이 우리에게 말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에 관한 개념들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운명을 이스라엘이라는 한 민족의 운명과 연계시키고 그 민족을 통하여 인류 전체와 연계시키려고 초월성을 발휘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들을 보여주는 것이다. 왜냐하면 구약시대의 하나님은 자기 백성 즉, 이스라엘 백성들 개개인과 관련하여 어떻게 행동하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일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셨으며, 다음으로 모든 피조물 및 다른 민족들과 관련되어 온 천지만물을 포함하는 구원에 대하여 이차적인 관심을 가지고 계셨다고 보고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신명기 9:4-7절을 보면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종합적인 목적들을 이루기 위한 대리자로 선택되었음을 알 수 있다.

“네 하나님 야웨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신 후에 네가 심중에 이르기를 나의 의로움을 인하여 야웨께서 나를 이 땅으로 인도하여 들여서 그것을 얻게 하셨다 하지 말라. 실상은 이 민족들이 악함을 인하여 야웨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니라. 네가 가서 그 땅을 얻음은 너의 의로움을 인함도 아니며 네 마음이 정직함을 인함도 아니요, 이 민족들의 악함을 인하여 네 하나님 야웨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심이라. 야웨께서 이같이 하심은 네 열조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하신 맹세를 이루려 하심이니라. 그러므로 네가 알 것은 네게 이 아름다운 땅을 기업으로 주신 것이 네 의로움을 인함이 아니니라. 너는 목이 곧은 백성이니라. 너는 광야에서 네 하나님 야웨를 격노케 하던 일을 잊지 말고 기억하라. 네가 애굽 땅에서 나오던 날부터 이곳에 이르기까지 늘 야웨를 거역하였으되…”

또한, 이스라엘의 정복전쟁의 과정 안에서,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약속하신 내용 중에는 바로 인류 구속을 위한 새로운 목적이 표현되어 있음도 알 수 있다. 대표적인 예로 아브라함 계약을 말할 수 있다. 아브라함의 부르심을 통해 시작되었던 대를 이어가는 하나님의 약속은 모든 나라에 대한 축복을 담고 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했던 약속은 힘겹고도 위험한 상황 속에서 생존하고 번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 구체적이고 특정한 약속은 다음 세대에게 반드시 이어졌는데, 이 때 충실히 선대의 언약을 이어받은 다음 세대는 하나님의 특별한 힘을 동반할 수 있었다. 이 약속의 핵심 선물이 바로 우리가 가장 많이 말하는 “축복”이다. 히브리동사로서 “축복하다”는 창세기 네러티브들 안에서 새로운 삶에 대한 영역을 미리 보여주고 있는데, 이 새로운 삶이란 이스라엘을 통해 모든 나라들에게 전수되어야 하는 삶인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을 통해 하나님의 능력이 세상 속으로 들어올 수 있게 되고 그 능력이 모든 나라들에게 전수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연결을 통해 이스라엘은 수단으로서의 중요성과 책임성이 부여되고 그리고 세상의 모든 나라 즉 열방은 목적으로서 그들의 삶에 대한 신실하신 하나님의 특별한 능력이 실제화 되어 삶에서 나타나게 되는 것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