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죄

가브리엘 N. E. 플루러 편집 | 박예일 역 | 개혁주의신학사 | 238쪽 | 12,000원

자기가 아는 것을 설명하는 것도 쉬운 일만은 아니다. 그러니 자기가 알지 못하는 것은 더 설명하기 힘들다.

'속죄(贖罪, atonement)'는 사람이 스스로 체득하거나 습득할 수 있는 지식이 아니다. 그런데 기독교에서는 근본 지식이다. 기독교를 논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속죄'라는 관문을 통과해야 한다. 그런데 이 관문을 설명하기 어렵다. 2000년이 지나도록 명쾌하게 설명한 글은 없다.

'속죄'라는 단어에는 'atonement' 외에 'expiation'도 있다. 'expiation'은 제물(祭物)에 관련된 것으로 '화를 푸는' 의미이고, atonement는 대속(代贖, ransom)에 관련된 것으로 '값을 지불함'으로 보인다. 이 책 <속죄>에서는 'propitiation'과 'expiation'이 긴밀한 관계가 있다.

우리나라에서는 2016년 '칭의 이해(김세윤의 유보적 칭의)'에 대해 다양한 논의가 진행되었다. 칭의 이해에서 다양한 논의가 나오는 이유도 '속죄'의 개념, 효과 등에 대해 서로 이해가 다르기 때문이다.

필자는 '속죄, 전가 교리, 칭의 교리'를 한 묶음으로 이해해야 구원 매커니즘을 확실하게 규명할 수 있겠다고 생각한다. 그 과정에서 속죄에 대한 이해를 위해, 이 책 <속죄>는 매우 유용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7명의 저자가 8개의 주제로 제시한 것을 플루러가 편집해서 제시했다. 7명의 저자는 제임스 패커, 존 위트, 제임스 몽고메리 보이스, 존 거스트너, 스프라울, 싱클래어 퍼거슨, 벡 등 복음주의 계열과 개혁신학 계열이 주축이 된 매우 보수적인 자세를 견지하고 있는 이들이다. 속죄에 대해 17세기 튜레틴의 <그리스도의 속죄>부터 시작해 21세기 사역자들의 <속죄>를 비교하는 독서를 제안해 본다.

<속죄>에서는 중요한 용어들이 등장하는데, 용어를 통일된 개념으로 제시하지 않는다. <속죄>에서는 통일되지 않는 단어를 한글로 제시하고, 영문 표기를 하지 않는 아쉬운 점이 있다. 그러나 그 핵심 단어와 개념을 추출해 개념화를 진행한다면 좋은 신학 훈련이 될 것이다. <속죄>에서는 핵심 단어가 모두 제시돼 있다.

첫째, 만족설(Satisfaction Theology, 안셀름)과 감화설(Moral influence theology, 아벨라드)이다. satisfaction은 통상 '만족'이라고 번역하는데, 명료한 번역은 아니다. '만족(satisfactio)'에 대한 연구는 문병호 박사(총신대)가 상당히 진행했고, '무름'으로 제시하고 있다(참고. 문병호, <그리스도의 무름>, 신학지남 289호, 2006년). 아벨라드에서 '속죄의 필연성'에 대한 이해는 자유주의까지 연결된다. '속죄'와 '심판'은 한 짝으로 연결된다.

둘째, propitiation이다. 유화(宥和)로 번역했다. 로마서 3장 25절에서 '속죄의 희생'으로 번역했고, 화목제물 등으로 번역한다.

셋째, 대표 대리적(representative, substitute) 속죄 개념이다.

넷째, 화해(reconciliation) 개념이다. 위트는 화해를 관계회복, 태도의 변화로 제시했다.   

<속죄>는 서평하기 매우 어려워서 상당히 긴 시간을 소요했다. 그것은 평가가 아니라 개념을 정립하는 책이기 때문이다. 완전하게 개념을 정립하지 못한 상태에서, 위에 제시한 단어를 제시하는 수준에서 종결했다. 위 단어를 정립한다면 다음 단계로 전가(imputation)가 필요하고, 그에 따른 주입(infusion)과 분여(impartation)까지 연결된다. 그리고 칭의(justification)에 대해서 논의할 수 있다.

그러나 연구자가 완전한 이해가 없는 상태에서 여러 제안을 해야 할 위치에 있다. 그렇기 때문에 최선을 다하는 겸손한 자세가 필요하다.

<속죄> 저자들도 탁월한 사역자들이지만 서로 불완전한 부분들이 있다. 그러나 중세 시대부터 현재까지 모든 단어는 제시돼 있다. 그러한 '속죄'에 대해 교회 이해를 조망하는 것은 가능하다. <속죄>는 '속죄 방식'을 '그리스도의 피의 속죄 제사'를 근거로 제시하려고 노력한다고 이해했다.

고경태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위원, 주님의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