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이어령 | 포이에마 | 360쪽 | 15,000원

*감상(感想): 내용과 상관없이 작가의 이름만 보고 손이 가거나 사게 하는 저자가 있습니다. 개인마다 다르겠지만 소설가로는 <개미>의 베르나르 베르베르와 편혜영이고, 교양 만화가로는 <먼나라 이웃나라> 시리즈의 이원복이고, 역사가로는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시리즈의 유홍준과 정민 교수님이고, 미래 예측으로는 최윤식과 최현식이고, 클래식으로는 김성현 기자이고, 미술로는 이주헌 평론가이고, 영화나 소설평론으로는 이동진 기자이고, 인문으로는 <지대넓얕>의 채사장이고, 신학 쪽으로는 흑곰북스의 황희상과 김남준 목사님, 존 스토트와 유진 피터슨, 팀 켈러이고, 강해쪽으로는 마틴 로이드존스 목사님이 그렇습니다.

그리고 어떤 분야를 떠나 이름만으로 장르가 되고, 브랜드가 되는 저자가 있습니다. 바로 '이어령 교수님'입니다. 이어령 교수님에게는 여러 수식어가 있습니다. 여러 진영 신문의 논설위원이었고(아주 드물지요), 문학평론가이면서 고등학교 국어교사였고, 교수였으면서 초대 문화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저에게 있어 이 모든 수식어보다 가장 어울리는 수식어는 '뛰어난 글쟁이'입니다. 어떤 글을 쓰든 깊은 통찰력을 담고 있어 기가 질리게 합니다. 책을 많이 읽는 사람은 많고, 많은 정보를 아는 사람은 많지만, 많은 정보를 가지고 하나의 현상에서 내면의 중심을 꿰뚫어 쓰는 작가는 아주 드뭅니다. 이어령 교수님은 그런 면에 있어 감히 '천재'라 칭하기에 부족함이 없습니다.

최근 이어령 교수님은 자신의 딸 고(故) 이민아 목사님으로 인해 신앙을 갖게 됐고, 그러면서 지성과 영성을 접목시키는 여러 책들을 내면서 좋은 반응을 얻고 있습니다. 이번 책은 자신의 특기인 '문학' 중에서 소설 5편(<카라마조프 형제들>, <말테의 수기>, <탕자, 돌아오다>, <레미제라블>, <파이 이야기>)을 가지고 그 안에 들어간 영성을 강의한 내용을 책으로 엮은 겁니다. 저는 이 소설들 중 <레미제라블>과 <파이 이야기>만 읽었습니다. 이제 감(感)과 상(想)의 대화로 이 책에 대해 더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감(感)→상(想): 너는 이 책 어땠어? 나는 만약 같은 주제로 다른 사람이 썼다면 안 읽었을 거 같아. 물론, 그랬다면 이 정도의 높은 퀄리티(quality)의 글을 쓰기도 어려울 거라 봐. 이렇게 평할 정도로 아주 잘 썼고, 출판사에서도 저자에 자신이 있어 저자의 이름을 표지에 크게 썼지.

*상(想): 이 책을 처음 읽을 때부터, 다 읽고 나면서 드는 하나의 생각은 '압도된다'야. 문장 하나에 동서양의 모든 지식을 날카로우면서 정확한 직관력으로 꿰는 능력이 아주 탁월해.

소개를 할까. 프롤로그만 읽어도 이 분의 진가를 알 수 있어. 프롤로그는 소설에 대한 이야기야. "소설(小說)에 왜 '작은 것'을 뜻하는 '소(小)'가 들어갔는지 알 만 합니다. 모두가 소인들의 이야기입니다. 밀랍과 깃털로 날개를 만들어 자신을 가둔 섬에서 탈출하는 다이달로스의 이야기가 '신화'라 한다면, 그의 아들 이카로스가 너무 높이 날다 날개의 말랍이 녹아 땅으로 추락하는 이야기는 '소설'인 것입니다. 신화의 주인공들은 신이고, 전설의 주인공들은 영웅이요 장사(壯士)들입니다. 중세 로망(roman)의 주인공 역시 왕이고 기사들입니다. 하지만 근대 소설의 주인공은 바로 담 너머에 살고 있는 이웃 사람들, 그도 아니라면 술주정꾼, 간질환자, 장애인, 그리고 홈리스들일 것입니다(8쪽)."

놀랍지 않아? 나는 여태 소설을 많이 봤지만 왜 소설(小說)에 소(小)가 들어갔는지 몰랐거든. 과학과 문학을 구분하는 설명도 좋아. "제가 늘 이야기하듯, 설명할 수 있는 것을 설명하는 것이 과학입니다. 빅뱅도 설명할 수 있고, 숫자로 증명할 수 있어요. 그런데 문학은 설명할 수 없는 것을 설명하는 것입니다. 설명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설명할 수 없는 것, 그러니까 신이라든지, 사랑이라든지, 경험해보지 못한 것들도 이야기하잖아요(11쪽)."

내가 '압도된다'는 표현은 조금도 과장되지 않아. 아마도 이 책을 읽은(읽을) 많은 독자들도 질식될 것처럼 압박하는 밀도 있는 문장에 감탄하지 않을까 싶어.

*감(感): 나도 너의 의견에 동의해. 이 분 글의 특징이지. 아주 오래 전에 읽은 <축소지향의 일본인>에서도 그랬고, <디지로그>, <생각의 탄생>, <지성에서 영성으로>에서도 그렇지. 네가 인용했던 프롤로그에 보면, 문학과 성경의 접합점을 설명한 글이 나와 있어.

"아무리 신앙심 깊은 크리스천이라도 일상의 세계에서 기도의 세계로 들어가고 기도의 세계에서 영성의 세계로 들어가는 데는 문학적 상상력이나 시인이나 예술가의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러지 않고서는 그야말로 가나의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하는 것이고 맹물이 포도주가 되는 기적을 믿을 수가 없는 것이지요. 그리니까 예수님은 시인에 가장 가깝고 그 일생은 소설가의 어떤 작품보다도 탁월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드라마에요(12쪽)." 읽다 보면 '아, 맞다'는 감탄이 절로 나오게 되어 있어.

*상(想): 나는 초반에 줄을 많이 쳤지. 그런데 읽다 보니 못 치겠는거야. 너무 줄칠 곳이 많아서. 감상평은 써야겠고, 쓰려면 줄을 쳐서 중요한 부분을 알려줘야 하는데, 포기하게 됐어. 소개할 부분이 너무 많은데다 그러면 이건 감상평이 아니라, 또 하나의 책으로 엮어도 될 정도의 분량이 나오겠더라고.

*감(感): (웃음) 충분히 이해가 가. 나도 그랬으니. 나는 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중요하게 깨달은 게 '내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 내가 어떤 감정과 배경을 갖고 읽느냐에 따라 글의 주제가 바뀔 수 있다'는 거야.

여기 소개된 책들 중에서 직접적으로 '기독교'와 관련된 책은 앙드레 지드의 <탕자, 돌아오다>뿐이야. 내가 만약 이 다섯 권 중 감상평을 쓴다면 이 책만 골랐을거야. 그런데 이어령 교수님은 폭넓게 본 거지.

읽으면서 '이런 식이면 기독교 소설이 아닌 건 없겠다' 싶었어. 하다 못해, 불교경전인 <법구경>도 영성의 시각으로 읽으려고 하면 기독교적인 해석이 가능하겠다 싶어. 물론, 이건 과잉이겠지만(웃음).

*상(想): 과잉이겠지만 전혀 아니라고 볼 수 없는 게, 하나님께서 모든 만물을 지으셨다는 것을 믿는다면 어떤 사물, 어떤 풍경, 어떤 사람, 어떤 이념, 어떤 책에서도 하나님의 섭리와 진리를 발견할 수 있어. 네가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느냐'가 중요하다고 했잖아.

가장 쉬운 예로 이 책에서 마지막으로 언급한 <파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새로웠어. 영화평론가 이동진 기자(평론가지만 오래전부터 '기자'로 알고 있었고, 그의 글에선 '기자다운' 분석력이 보여 퇴사한 지 오래되었지만 기자가 어울리는 작가로 생각해서 붙입니다)와 소설가 김중혁이 팟캐스트 <이동진의 빨간책방>에서 다룬 책들중 소설 부분만 묶어서 낸 책 <우리가 사랑한 소설들>에서도 <파이 이야기>를 소개했는데, 아무리 이동진 기자가 종교학과 출신이라 해도 영화 전문이고 김중혁은 소설가라서 그런지 영화적이면서 소설적으로만 파고 들어. 완전히 다르진 않지만 같은 책을 읽었다고 여기지 않게 하지.

이렇게 볼 때 '이 책이 어떤 책이냐?'보다 중요한 건 '나는 어떤 사람이냐?'이지 않을까 해. 이건 아주 중요한 철학적이면서 신앙적인 질문일 거야.

*감(感): 이 책을 읽으면서 좋았던 건 소개된 다섯 권의 책을 전부 읽고 싶게 만든다는 거야. 우선 가장 먼저 소개된 <카라마조프 형제들>을 읽고 싶게 해. 어렵다고 소문이 나서 사 놓고 읽지 못했는데, 이 책을 읽고 나면 '만만하게' 생각하게 하여 도전해 보게 돼(웃음). 그리고 읽어봤다 해도 '이 책이 그런 내용을 담고 있었나?' 싶어 다시 읽어보게 하지. 물론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이 책 자체도 여러 번 읽어야 되는 책이야. 우리가 너무 이 책에 대해 칭찬만 했다. 안 좋은 점은 없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

*상(想): 안 좋은 게 있었구나(웃음). 나도 있었어. 이어령 교수님은 '지성의 눈으로 영성을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영성은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거든. 물론 소설도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읽어야 하기 때문에 동일한 시각이랄 수 있지만, 이어령 교수님이 평생 해 오던 일이 가슴으로 느껴지던 것을 머리로 끌어당겨 분석하여 토해내는 거였어. 그런데 영성이란 가슴에서 느껴지는 것을 머리가 아닌 손과 발로 전달시켜 행하게 하는데 있어.

 

이번 글을 읽자면 이어령 교수님은 성경을 '영성의 참 진리'로써가 아니라 '지식의 보고'로써의 도서로 읽고 있는 게 아닐까 하는 아쉬움이 들어. 이건 비단 이번 책뿐 아니라, 이 분이 쓰신 여러 신앙도서나 인터뷰를 읽다 보면 알 수 있어. 다만 이번 책에서 그런 시각을 더 확신시켜 줄 뿐이었지. 평생 해 오던 습관을 단번에 바꾸기 어렵겠지. 이건 이 분의 한계인 거 같아. 너는 뭐가 문제였어?

*감(感): 네가 처음에 말했잖아. 이 책은 처음부터 끝까지 '질식될 것처럼 압박하는 밀도있는 문장'이라고. 나는 그게 문제였어. 이 책은 쉼표없이 계속 불러야 되는 노래같았어. 어느 문장에선 쉬어야 하는데, 모든 문장에 엄청난 양의 정보를 가지고 있다 보니 내 스스로 간신히 쉬었다 읽게 되어 부담이 되더라고. 뭐랄까? 평생 쉴 줄은 모르고 일만 한 사람의 글 같다고나 할까.

*상(想): 하지만 나는 이 책을 좋아하는 입장에서 너와 나의 비판에 대한 변명을 하자면 이런 아쉬움은 '이어령 교수님'이기에 드는 비판일거야. 너무 좋은 책이잖아. 우리나라 기독교 작가 중에서 이만한 글을 쓰는 사람은 거의 없을거야. 그리고 읽고 나서 여러번 읽어야겠다고 다짐하게 하고, 한 문장에 여러 정보를 담은 책을 만나기란 아주 어려운 일이지.

그런 의미에서 작고 우스운 불만을 말하자면, 이 책은 여러 글쟁이들에게 좌절을 주는 책이야. 이 책이 모든 책의 가이드라인이라면 글을 쓸 수 있는 작가는 많지 않을테니(웃음).

*감(感): 아, 이 책의 빠트릴 수 없는 선물을 얘기하지 않았어. 이 책에는 부록으로 책에서 언급한 <탕자, 돌아오다>의 불어 완역본이 들어가 있어(초판 한정판이긴 하지만). '책 속의 책'이라 할만한 이 부록은 선물 같지. 원고지 100장 분량의 짧은 소설이지만, 주제와 메시지가 아주 강렬해서 여운이 오래 남지.

*감상(感想): 이 책은 할 이야기가 너무 많습니다. 이 책에선 다섯 권의 소설을 다뤘는데 정작 다섯 권의 내용은 다루지 않았고, 다섯 권이 전하는 메시지도 언급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상(想)이 말한대로 그렇게 다 이야기하다 보면 이 감상평은 감상평이 아니라 책이 될 겁니다(쓰는 저도 지칩니다. 벌써 몇 시간째 글을 쓰고 있는지... ^^).

이 시대의 최고의 지성이라 해도 절대 과장이 아니라 여기는 이어령 교수님의 <소설로 떠나는 영성순례>을 읽다 보면, 기독교 출판계나 기독교 문학에 있어 이 분이 계신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는 생각을 갖게 합니다. '기독교 문학'에 대해, 특히 '한국 기독교 문학'에 대해 홀대하는 경향이 짙은 현 출판 풍토에서 이분과 같은, 이 책과 같은 저자와 저서가 나왔으면 하는 바람을 가지게 됩니다.

한 문장도 버릴 게 없고, 한 문장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이 책은 두고두고 읽어야 됩니다. 이 책을 읽고 나서 소설을 읽게 되고(특히 기독교 소설), 성경을 다시 읽게 되는 동작을 가지게 되면 좋겠습니다. 이 책의 여러 목적 중 하나는 그것일테니 말입니다.

제가 티스푼으로 국물만 떠 드렸습니다. 감질나시죠? 읽으십시오! 읽어서 제대로 진한 국물맛도 보시고 큰 건더기도 드셔 보기 바랍니다.

/이성구 부장(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