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커 파머 | 김명희 역 | 아바서원 | 216쪽 

별을 던지는 사람

삶에 정답이 있을까? 이런 질문이 가끔 떠오를 때가 있다. '정답이 있다? 없다?'라는 질문이 인식과 분별의 한계를 가진 불완전한 인간으로서 언급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스탠리 하우어워스는 종종 '정답이 없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 살기'라는 언급을 했다. 정말 진지한 그리스도인으로 살려고 할 때, 우리가 알고 있는 지식과 경험의 범위 안에서는 완전한 정답을 찾을 수 없다는 생각이 점점 더 커진다. 그리고 우리의 삶에는 정답이 아니라 신비로 가득 차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현장에서 간음한 여인을 율법사들이 예수님 앞에 데려 왔을 때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행동은, 율법을 파기하신 것도, 율법을 지키신 것도 아니었다. 많은 학자들의 해석들이 있지만, 그 해석 또한 완전한 정답은 아니다. 더욱이 그 해석들 모두를 합쳐도 정답이라고 말할 수 없다. 그 이유는 진리란 어느 하나의 정답에 제한을 받지 않고 오히려 모든 정답들을 포괄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이것은 4세기 아우구스티누스가 마니교에서 기독교로 회심하는 과정에서 플로티누스의 일자(One)의 초월성과 일자가 모든 것을 포괄한다는 개념을 받아들이면서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창조를 설명하려고 했던 개념이며, 오리겐과 같이 아우구스티누스도 이 개념을 가지고 삼위일체를 설명하려 한다. 즉, 하나님만이 온전하고 불변의 진리이시며, 우리 인간은 결국 전체적 진리가 아니라 부분적 진리 안에서 살 수밖에 없다는 겸손이, 다원주의와 상대주의를 낳을 수 있는 위험이 있다고 할지라도 참된 하나님을 향해 나아가는 바른 태도일 것이다.  

요나

본서는 선지자로서 그렇게 존중받지 못하는(?) 선지자 '요나'를 역설의 주인공으로 앞세운다. 요나는 앗수르를 향한 하나님의 계시와 명령을 민족주의적 관점에서 받아들이지 않음으로써 하나님의 뜻에 저항하는 하나님의 선지자이다.

파머는 언급하지 않았지만, 필자는 요나가 하나님의 선지자라는 사실 자체부터 역설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파머는 요나가 다시스로 가던 중 만난 폭풍과 물고기 뱃속을 두고 불완전한(요나와 같이 자기중심적인 신앙생활) 우리 인간과 기독교가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결국은 니느웨로 가고 있다고 역설을 설명함으로 시작한다.

이사야와 호세아 같은 선지자가 아니라 요나 같은 자를 선지자로 사용하시는 하나님이 어쩌면 더 역설적이게도 느껴진다. 저자가 구체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하나님 앞에서 지금의 기독교가 요나(하나님에게서 멀어지고 있지만, 그곳에 하나님의 은혜와 뜻이 성취됨)가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는 듯하다.

지금의 교회, 정말 공동체일까?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정확하다고 확신할 수는 없지만, 신학대학원(20년이 넘었다)에서 교회론을 배울 때 교회가 공동체라는 개념을 배운 기억이 없다. 물론 신앙 공동체, 전도 공동체 등의 이야기는 언급되었지만, '공동체'라는 주제를 다루어 보지는 않았던 것 같다(이것이 오늘날 하나님도, 성경의 가르침이 중심도 아닌 성장이 중심된 교회가 양산되는 문제와도 관련이 없다고 부인할 수 없다).  

저자는 안정적 교수직을 휴직하고 퀘이커교의 어느 공동체에 들어간다. 그리고 그가 성경을 통해 믿고자 하는 그리스도인의 공동체(교회됨, 무형적이고 보편적 교회도 포함)에 직접 삶으로 뛰어든다. 그리고 그곳의 공동체 삶을 통해 공동체의 장점과 역설들을 직접 몸으로 체험한다. 그리고 현재의 일반적 교회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공동체를 추구할 것인가? 공통성을 도모할 것인가?'

이미 현대 교회는 예배를 중심으로 각각의 개성과 차이들이 하나(일치가 아님)가 되어 연합되는 공동체가 아니라, 각각의 다른 목적들을 가지고 있는 다수의 개인들이 예배(조직)라는 공통성을 공유하고 있는 집단이 되어버린 것이 아닌지를 질문한다.

파커가 말하는 공동체

저자는 자신이 경험하고 체험한 공동체를 통해 '진정한 공동체는 하나님의 자비와 하나님의 심판 모두를 경험하게 한다', '공동체 자체를 목적으로 하거나 상품으로 해서는 안 된다', '공동체는 유토피아라기보다 도가니나 제련소이다. 여기서 자아간 충돌이 일어난다. 그리고 자아의 한계와 다른 사람의 필요성을 깨닫게 된다'고 말하면서, 공동체의 역설적인 역할과 가치들을 증거한다. 즉 공동체는 우리의 결핍을 채워주는데, 우리가 원하는 것과 원하지 않는 모두를 채워준다는 것이다(원하지 않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는 더 중요하다). 이것을 본회퍼는 이렇게 말했다.

"온전한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깨어진 경우가 수없이 많았던 것은 막연한 꿈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 하나님의 은혜는 그러한 꿈들을 바로 부수어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가 진정한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알기를 분명히 원하시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는 다른 그리스도인과 다른 사람들, 그리고 운이 좋다면 우리 자신에 대해 엄청난 환멸을 느껴야 마땅하다. ... 기독교 공동체 자체보다 공동체에 대한 자신의 꿈을 더 사랑하는 사람은, 그의 개인적인 의도가 아주 정직하고 진지하고 희생적이라 하더라도, 기독교 공동체의 파괴자가 된다."

아마도 저자는 오늘날 본회퍼가 말하고 있는 교회가 없다는 것에 진지하게 고민하는 듯하다. 교회는 더 이상 공동체가 아니고 복음(?)을 통해 사람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쇼핑몰'이 되어가는 모습들에 안타까움을 숨기고 있는 것 같다.

공동체가 가지고 있는 가장 중요한 역설은 공동체에 몸담으면 자기 자신이 현실의 척도(중심)가 아니라는 것과, 우리의 다양한 시각을 통해서만 온전한 진실을 알기 시작할 수 있다는 것을 배운다는 것이다. 즉, 자신의 결핍을 발견한다는 것이다.

역설: 개인주의 사회에서 공동체성의 필요

저자는 공동체 또한 불완전한 인간들의 모임이기에, 아무리 훌륭한 공동체라 할지라도 문제점과 한계가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하지만 파머는 오늘날 극도로 개인적이고 이기적인 시대가 되어가는 원인에 대해, 교육에 문제가 있다고 주장한다(저자는 세계적인 교육학자이다). 즉 오늘날 풍요가 아니라 결핍을 양산하는 교육 제도에 문제가 있다는 것이다. 교육이 더 많은 부를 얻기 위한 수단이 되고, 성적에 따라 부의 기회 등급을 나누는 형태는 연합이 아니라, 경쟁을 부추김으로 결핍을 양산하고 있다는 것이다.

반면 공동체라는 것, 연대감과 유대감은 우리에게 풍성한 열매를 가져다 준다. 한 사람이 하는 것보다 두 사람이 하는 것이 훨씬 우수하다. 그러나 그러한 연대감과 유대감이 건강하게 활동하기 위해서는 많은 지혜와 희생이 따른다. 그러나 약간의 희생을 피하기 위해 공동체성을 희생시키는 것은 더 큰 희생이 되어 버린다.  

분명 모든 사람은 각 개인의 사적인 공간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그 사적인 공간은 공동체를 훼손할 만큼 커져버린 문제가 바로 오늘날 교회와 사회의 문제이다. 그 중에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문제는 도덕적 삶과 인격의 성숙을 잃어버린 삶이 만연해진다는 것이다.

별을 던지는 사람

오늘날 사람들은 소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 소비를 중심으로 살아간다는 것은 자신의 편리와 편의를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즉 불편함, 지루함, 희생을 요구하는 것은 '죄'와 같이 취급된다는 것을 말한다. 그럼에도 저자는 공동체의 불편함을 외치고 있다. 그 이유는 지금 이 시대에 아무도 관심을 갖지 않는 '참된 인간 됨', '인격'을 회복해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어느 지역 여행에서 겪었던 사건을 소개한다. 그곳은 바닷가 해변이었다. 그런데 밤이면 온 동네 사람들이 횃불을 들고 밤마다 출몰하는 불가사리를 잡아서 팔기 위해 해변가에 모여 들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루는 새벽 일찍 잠이 깨어 그 해변을 산책하는데, 새벽이라 아무도 없는 그곳에 한 사람이 혼자서 해변에 밀려 나온 불가사리를 다시 바다로 던지고 있는 광경을 목격하였다. 그런데 그 사람은 그 다음 날도, 그 다음 날도 그 시간에 불가사리를 다시 바다로 던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저자는 그 사람을 '별을 던지는 사람'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본서를 읽으면서 예레미야가 떠올랐다. 그 이유는 저자가 '외로운 선지자'처럼 느껴져서이다(글을 쓰고 있는 개인적인 느낌이다). 그리고 본서를 읽는 내내 '우리 모두가 외롭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주의를 넘어 이기주의가 만연한 이 사회에서 단순한 이합집산(離合集散)의 모임이 아닌 진정한 공동체성에 대해 묵묵히 고민하는 저자의 심장소리가 울려 퍼지길 바란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