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3년 일어난 '황옥경부폭탄사건'을 그리고 있는 영화 <밀정(2016)>은 여러 면에서 재작년 개봉된 <암살(2015)>을 상기시킨다. 주변에 물어보니 필자만 그랬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두 작품 모두 의열단(義烈團) 이야기를 다루고 있으며, 어지간한 미국식 냉전 첩보극 이상의 긴장감과 수싸움, 그리고 액션을 선보이고 있다.

그러나 이런 것들은 두 영화를 관통하는 하나의 주제에 비하면 주변적 요소라고 볼 수 있다. '변절자', 이것이 두 영화를 함께 묶어서 생각하게 하는, 그리고 두 영화의 플롯을 이끌어가는 핵심 코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변절자를 중심으로 영화를 관람하고 보니, 문득 작중 정채산(실존인물 김원봉, 1898-1958)의 대사 하나가 귓전에 맴돈다. "이중첩자에게도 조국은 하나 뿐이오. 그에게도 분명 마음의 빚이 있을 거요. 그걸 열어주자는 겁니다."

이 대사를 듣고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국가라는 가치를 중심으로 생각한다면, 힘들겠지만 그게 가능할 수도 있을 듯하다. 변절자라도 설득하고 양심에 호소해볼 수 있을 듯하다. 그러나 유일하신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저버린 변절자라면? "그에게도 하나님은 하나뿐이오" 라고 확언할 수 있을까?

◈황옥경부폭탄사건: "그 친구 어떻습니까, 이정출... 어디 친구할 만합니까?"

<밀정>은 1923년 일어난 '황옥경부폭탄사건'을 영화적으로 각색해 그려내고 있다. 그러나 중요한 포인트들은 실제 역사를 그대로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영화가 그려내고자 하는 변절자의 모습을 단지 상상의 소산으로만 여길 필요는 없을 듯하다. 그만큼 주인공 이정출(실존인물 황옥, 1885-1950) 역을 맡은 송강호의 연기나 심리묘사가 뛰어난 탓이리라.

물론 각색으로 인해 주인공의 심정변화가 다소 극적이고 신파적인 측면도 있지만, 일제강점기 당시 매국노 일제경찰로 살아가던 한국인으로서 느껴야 했던 고뇌를 표현하는 데는 부족함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영화의 플롯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한때 상해 임시정부의 통역관 일을 맡았던 이정출은 절친했던 독립운동가들의 인물정보를 팔아넘기고 경무국(조선총독부 경찰행정기구)에 영입된다.

이후 그는 독립운동가들에게 접근해 밀정 노릇을 하며 독립운동 조직의 주요 인사들을 유인하고 체포하는 일로 경부의 직위까지 승진한다. 경부는 한국의 경찰 계급으로 따지면 경감급으로 경찰간부에 해당하며, 현장수사의 최고책임자 역할을 담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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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국노 일제경찰 간부로 독립운동가 검거현장을 지휘하는 이정출.

이렇게 매국노 경찰로 승승장구하던 그는, 상부로부터 의열단의 폭탄공작에 관련된 정보를 입수하여 의열단 핵심요원 중 하나인 김우진(실존인물 김시현, 1883-1966)에게 접근한다. 이정출은 김우진에게 접근하여 친분을 쌓으며 폭탄을 경성(서울)으로 들여오려는 의열단원들을 일망타진할 계획을 세운다.

이를 위해 상해까지 건너간 그는 김우진의 안내에 의해 기습적으로 의열단 단장인 정채산을 만나 설득을 당한다. 정채산은 이정출이 배신한 친우들에 대한 마음의 빚을 간직하고 있는 것을 간파해 이번 폭탄 거사에만 도움을 줄 것을 요청하고, 이정출은 혼란과 갈등 끝에 마지못해 협력을 약속한다.

그는 의열단원들과 같은 열차를 타고 폭탄의 운반을 도우나, 이정출의 동료인 일본인 경찰 하시모토 경부와 의열단 내 변절자의 밀고로 인해 경성역에서 의열단원 다수가 체포된다. 이정출도 폭탄을 숨기고 잠적해 있던 김우진을 끝까지 도우려다 발각되어 체포된다.

재판에서 이정출은 끝내 자신이 일본의 경찰로서 의열단원들을 일망타진하기 위해 이중첩자 역할을 한 것이라며 자신이 체포된 것에 억울함을 토로한다(실제 역사에서 황옥이 그랬다). 경무국 상층부는 그가 의열단을 도우려 했던 것을 알지만 그를 다시 공작에 이용하기 위해 곧 출감시킨다.

이정출은 그 길로 감춰진 폭탄을 찾아 경무국 요인 다수를 폭사시키고, 남은 폭탄은 총독부 폭파에 사용하도록 의열단에게 넘긴다. 이로써 이정출은 의열단과의 약속을 지켜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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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열단원들의 폭탄 운반을 돕기 위해 열차에서 동료 일제경찰 간부를 사살하는 이정출.

◈역사와 염원의 브리콜라주: "이번엔 어느 편에 서게 되는지 봅시다"

영화의 플롯 대부분은 실제 역사를 따르나, 결말부는 다르다. 실제 역사에서는 황옥과 의열단원들이 일거에 체포되면서 폭탄거사 시도가 좌절되었다. 여기서 이정출, 즉 황옥이란 인물을 의열단에 협조한 사람으로 그리려는 김지운 감독의 의도가 드러난다.

황옥의 진정한 의도는 온전히 밝혀진 바가 없다. 다수의 역사가들은 황옥이 변절자로서 의열단원들을 밀고하고 체포되도록 만든 주범이라 보고 있다. 반면 의열단장 김원봉이나 의열단원 김시현 등은 해방 후에도 황옥과 교류하며 그를 동지로 여겼다.

폭탄사건 당시 황옥의 본심은 그 자신만이 알 일인데, 6∙25 전쟁 때 납북된 이후 세상에서 사라졌기 때문에 현재로서 진실을 알 수 있는 길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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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등장인물 이정출과 실존인물 황옥.

사실 김지운 감독에게는 황옥이 진정으로 변절자였는지 아니면 독립투사로 돌아섰는지의 문제는 그다지 중요해 보이지 않는다. 감독은 영화 결말부에서 황옥이 완전히 독립투사로 돌아섰으며, 실제 역사에서는 좌절된 폭탄거사를 성공시키는 장면을 강조해 선보이고 있다.

이로써 김지운 감독은 영화라는 장치를 통해 한국인의 가슴 속에 염원으로 남아 있는 친일파 척결을 시각화하고 있다. 해방 직후 친일파 청산에 실패하였을 뿐 아니라, 지금까지도 친일파들 및 그 후손들이 기득권을 잡고 승승장구하는 세태에 대한 한탄을 이정출이라는 인물을 통해 풀어내고 있는 셈이다.

변절한 친일파가 과거를 뉘우치고 다시 독립운동에 헌신적으로 뛰어들다니! 현실 세계에 존재하기 어려운 일을 개연성을 갖춘 플롯을 통해 보여줌으로써, 관객에게 일말의 위로를 선사하고 있는 것이다. <암살>도 영화 마지막 부분에 변절자 경찰간부를 사살하는 장면을 선보임으로써 <밀정>과 유사하게 역사의 심판을 강조하고 있다.

이처럼 영화 전반을 역사적 사실로 꾸려가다 결말부에서 모두가 소원하는 역사적 심판을 단행하는 브리콜라주 기법은, 관객들에게 상당한 위로를 준다. 사실과 허구를 적절하게 엮어내는 플롯구성 방식은 해외에서도 자주 사용되어 온 것으로, 대표적인 사례가 2009년 개봉된 쿠엔틴 타란티노(Quentin Tarantino) 감독의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Inglorious Bastards)>이다.

이 영화는 실제 역사에서 종전 직전 권총으로 자살한 히틀러(Adolf Hitler, 1889-1945)를, 미국 암살 특공대원들이 기관총과 폭탄으로 살해한 것으로 그려내고 있다. 타란티노 감독은 히틀러가 보면 무덤에서 뛰어올라올 정도로 화려한 난사 장면을 선보이고 있으나, 영화를 보는 관객들 대부분은 역사의 심판이 주는 만족감 때문에 진실 여부는 그다지 신경쓰지 않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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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바스터즈: 거친 녀석들> 중 실제 역사적 사실과 전혀 다른 히틀러와 괴벨스 살해장면. 현실로는 이루어지지 못한 역사의 심판을 내린다는 면에서 상당한 만족감을 선사한다.

◈교회 내부의 밀정들: "변심이 아니라 작심이라 해야지"

지금부터는 영화 "밀정"이 기독교적인 입장에서 갖는 의미를 살펴보려 한다. 영화 중반부, 의열단장 정채산은 이정출을 설득하려는 계획을 수립하면서 반간계(反間計)를 언급하였다. "반간, 적의 첩자를 역으로 우리 첩자로 만든다. 첩자 중에서도 가장 위험하지만, 또 그만큼 쓸모있는 게 반간이요."

이 대사에 나온 반간(反間)이라는 용어는 손자병법(孫子兵法) 제13편인 용간(用間: 간첩의 이용법)편에 나오는 말이다.

"간첩을 이용하는 방법은 5가지가 있다. 향간(鄕間), 내간(內間), 반간(反間), 사간(死間), 생간(生間)이 그것이다. 이 5가지 간첩을 동시에 활용함에도 적이 그것을 알지 못하는 것은 교묘하게 간첩을 활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곧 신기(神紀)로서 임금이 가진 보물이다.

1. 향간이란 그 고장 주민을 간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鄕間者, 因其鄕人而用之).

2. 내간이란 적의 관리를 간첩으로 이용하는 것이다(內間者, 因其官人而用之).

3. 반간이란 적의 간첩을 역이용하는 것이다(反間者, 因其敵間而用之).

4. 사간이라는 것은 허위사실을 아군 간첩에게 믿게 하여 그것을 적에게 전달하는 일이다(死間者, 爲誑事於外, 令吾聞知之, 而傳於敵間也).

5. 생간이란 (사간으로 잠입했던 간첩이) 그 때마다 돌아와 보고하는 것이다(生間者, 反報也)."

이정출이 먼저 일제 경찰의 간첩으로 의열단원들에게 접근해 오니, 그를 설득해서 거사를 성공시키는 데 역이용하자는 것이 정채산이 세운 반간계의 요지이다. 이 장면은 일제 경찰이 독립운동 조직에 얼마나 많은 간첩공작을 시도했는지, 그리고 이런 밀정들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독립운동가들이 얼마나 고심하며 살았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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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출을 대상으로 반간계를 전개하는 정채산과 김우진. 거사를 위해 협조하도록 설득 중이다.

그런데 이런 공작은 단지 독립운동 조직에만 시도되었던 것은 아니다. 조선총독부 수뇌부는 사회 각 영역에 한국인 밀정을 심어 국가정책에 반대하는 세력들을 감시하고 탄압했는데, 여기에는 한국교회도 대상으로 포함돼 있다.

한국 개신교회는 일제강점기 직전 미국인 선교사 언더우드(Horace Grant Underwood, 1859-1916)와 아펜젤러(Henry Gerhard Appenzeller, 1858-1902)의 선교를 시작으로 개척되기 시작했다. 이들은 직접 전도활동과 더불어 교육기관과 병원 등을 세우는 일에도 적극적이었는데, 총독부 측은 기독교회의 개화운동이 교인들에게 일제강점기의 사회적 부조리를 일깨우고 독립운동 참여를 부추긴다 하여 일찌감치 한국 개신교회를 요주의 대상으로 감시하고 있었다.

당시 연희전문학교(연세대학교의 전신)를 비롯해 대부분의 기독교 계통 학교들이 종합대학 인가를 받지 못하고 기술전문학교로 개교한 이유도 한국인들, 특히 기독교인들이 고등교육을 받는 것을 막으려는 총독부의 계산이 작용하고 있었다.

한국 개신교회에 대한 총독부의 탄압과 견제는 1930년대 초반에 개시된 신사참배 강요를 통해 크게 강화됐다. 1930년대 초반 신사참배 강요는 기독교 선교사들이 설립한 학교들을 대상으로 시행됐고, 다수의 기독교 학교 교장 및 교사들이 학생들의 신사참배 면제를 허락해 줄 것을 요청하거나 신사참배 이행을 거부하다 해직되기에 이르렀다.

대표적으로는 1936년에 숭실전문학교 교장 맥퀸(G. S. McCune)과 숭의여중 교장 스눅(V. L. Snook)이 해임 추방되고, 두 학교는 폐교되었다. 이 외에도 1937년에는 다수의 장로교계 학교들이 신사참배 절대불가 입장을 고수하자 강제로 폐교됐다. 이후 총독부가 점차 신사참배를 교회들에게까지 강조하려 하자, 이 문제는 선교사들과 한국교회 전체의 문제로 비화되었다.

이 당시 신사참배에 대한 한국교회 지도자들 사이의 의견은 대략 세 갈래로 나뉜다.

첫 번째 갈래는 민족주의적 견해를 고수한 측으로, 신사참배의 종교성과 비종교성 여부를 떠나 한국인이 일제의 제국주의 국민의례 및 제례에 참여할 수 없다는 입장을 고수하다 파직되거나 투옥됐다. 대표적으로는 장석인 목사(독립운동가이자 진보적 민족주의자였던 장준하 선생의 아버지)와 같은 인물을 들 수 있다. 당시 장준하(1918-1975), 윤동주(1917-1945), 문익환(1918-1994) 등은 교회 지도자는 아니었으나, 기독교 학교 학생의 신분으로 일본어 교과서 찢기 운동이나 학생들의 신사참배 반대운동에 주도적으로 참여했다.

두 번째 갈래는 신사종교론(신사참배는 이방신을 모신 신사에 참배하는 종교적 행위라는 견해)을 주장한 측으로, 신사참배가 엄연히 이방신에 대한 제사이므로 신앙의 정절을 지키기 위해 절대 참배할 수 없다고 주장하다 파직되거나 투옥돼 고문을 당하고, 일부는 순교자 반열에 올랐다. 대표적인 인물로는 주기철 목사(1897-1944), 이기선 목사(1878-1950), 최봉석 목사(1869-1944), 한상동 목사(1901-1976), 헌트(Bruce F. Hunt, 1903-1992) 선교사, 이주원 전도사 등을 들 수 있다.

세 번째 갈래는 신사비종교론(신사는 일본의 국가행사에 불과하며 종교성은 없다는 견해)을 주장한 측으로, 신사참배가 종교적 제례가 아니라 단지 국민의례에 불과하므로, 기독교 계통 학교들과 교회에서 얼마든지 수용할 수 있는 것이라 해명했다. 대표적 인물로는 장로교의 신사참배 가결 당시 총회장이었던 홍택기 목사(?-1950) 외 친일부역 행위에 앞장선 혐의로 해방 후 반민특위에 회부되었던 정인과 목사(1888-1972), 전필순 목사(1897-1977), 김길창 목사(1892-1977), 양주삼 목사(1897-1950) 등을 들 수 있다.

신사참배 가결 측의 대표 목회자들은 이곳에서 참배한 뒤 일본 동경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쓰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방문하며 참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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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1년 완공되고, 1925년 신사에서 신궁으로 격상된 서울 남산의 조선신궁. 신사참배를 가결한 측의 대표 목회자들은 이곳에서 참배한 뒤, 일본 동경의 이세신궁, 메이지신궁, 가시하라신궁, 아쓰다신궁, 야스쿠니신사 등을 두루 방문하며 참배했다.

사실 한국교회 내 친일 부역자들의 준동은, 바로 이 신사참배 문제로 인해 확연해졌다고 볼 수 있다. 그 역사적 분기점은 1938년 9월 10일 제27회 장로교 총회로 알려져 있다. 한국교회사에는 이 날이 1910년의 경술국치(庚戌國恥) 이상 치욕적인 날로 기록되어 있다.

이날 총회가 열리는 평양 서문밖교회 안팎으로는 정복과 사복을 입은 일제 경찰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살벌한 시선으로 총회 참석자들을 위협하고 있었다. 이 와중에 장로교 총회장이던 홍택기 목사와 친일 목회자들은 '신사참배 결의 및 성명서 발포'를 일방적으로 가결시켰다. 총회 당시 다수 목회자들이 투옥과 순교를 불사하고 신사참배 결의 가결을 반대하려 했으나, 일제 경찰과 신사비종교론을 부르짖는 목회자들 측의 합동 '작전'으로 신사참배에 찬성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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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기독교 대표 성지참배 기념사진(1938년 12월).

이 작전에 총독부가 얼마나 많은 공을 들였는지는 당시 목회자들을 회유하거나 위협하는 데 힘쓴 경찰관들에게 내려진 후한 포상을 통해 간접적으로 확인할 수 있다. 이날 장로교 총회의 신사참배 가결로 경찰관 89인에게 표창, 특별상여, 특별승급 등의 포상이 내려졌다.

여기서 일제 경찰이 사용한 작전이 단지 위압뿐이었을까? 총회 이후 한국교회 내 친일 부역자들의 활동이 이전보다 노골적으로 전개된 정황으로 미뤄볼 때, 일제 경찰이 신사참배 가결을 위해 적극적이고 치밀한 용간책을 채택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이때 용간책은 영화 "밀정"에서 정채산이 말한 반간은 아니었겠지만, 적어도 향간, 혹은 내간 정도로 분류될 수는 있을 것이다.

한국인 목회자들을 위협하고 포섭하여 한국교회가 내부로부터 신앙의 정절을 포기하도록 한 점에서는 향간이라 할 수 있을 것이요, 지도자들을 포섭하여 한국교회 전체 신앙의 정신을 흐려놓았다는 점에서는 내간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계속>

/박욱주 교수(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