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의 초반에 요한복음의 표적들 뒤에 사람들의 오해와 예수님의 강해가 등장한다고 말씀드렸는데, 두번째 표적과 세번째 표적 이후의 강해와 오해가 5장에 붙어서 나와서 같이 소개를 해 드립니다. 마찬가지로 네번째와 다섯번째 표적도 같이 나눌 예정입니다.

4장에서 사마리아에서 있었던 사건 뒤에 요한은 잠시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영접함을 기록하고 죽어가는 아들 때문에 예수님을 찾아온 고관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요한복음 4:44에서 예수님께서 직접 대언자가 자기 고향에서는 아무 존경을 받지 못한다고 하셨음을 기록하는데, 그 바로 다음절에 요한은 보란듯이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였다고 얘기합니다. 우리는 이런 모순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요? 예수님을 찾아온 고관의 이야기는 이 모든 것이 열쇠가 되어서 풀리게 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고향 사람들 즉 갈릴리 사람들이 예수님을 받아들이는 이유를 예루살렘에서 행하신 기적을 봤기 때문이라고 얘기합니다. 이는 표적을 보고 찾아온 니고데모를 연상케하며 단 하나의 기적을 행하지 않았음에도 오직 예수님의 말씀만 듣고 예수님을 받아들인 수가성의 여인 그리고 사마리아에 사람들과 대조되어 나타납니다.

그분의 말씀으로 인해 더욱 많은 사람이 믿고 그 여자에게 이르되, 이제 우리가 믿는 것은 네 말 때문이 아니니 이는 우리가 직접 그분의 말을 들었고 이분께서 참으로 세상의 구원자 그리스도이신 줄 알기 때문이라, 하였더라. <요한복음 4:41~42>

예수님께서 첫번째 표적을 보여주신 가나에서 이 고관은 자신의 아들이 거의 죽게 되었으니 자기 집으로 와서 아들의 병을 고쳐 줄 것을 요청합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이 고관을 위로하는 것도 아니고 고쳐주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아니고 표적들과 이적들을 보지 않으면 도무지 믿으려 하지 않는다며 책망하십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기적을 보고 예수님을 믿고 따르던 무리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는 이유를 나타내 보이신 것 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그 고관에게 아들이 살았다며 집으로 돌아가라고 말씀하시자, 고관은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집으로 돌아갑니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이르시되, 네 길로 가라. 네 아들이 살아 있다, 하시매 그 사람이 예수님께서 자기에게 하신 말씀을 믿고 가더라. <요한복음 4:50>

지금 고관은 죽어가던 자기의 아들이 살았는지 죽었는지 모릅니다. 그의 눈으로 보지 못했으니까요. 하지만 표적을 보지 않았음에도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고 하시자, 그 말씀 만을 믿고 집으로 돌아 갑니다. 그리고 이 고관은 결국 예수님께서 아들이 살아 있다고 말씀하신 그 같은 시간에 아들이 병에서 나았음을 듣고 온 가족이 예수님을 믿게 되며 5장으로 넘어 갑니다.

5장에서는 유대인의 명절로 인해 예수님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일어난 사건이 등장 합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복음을 설명하기 위해 단어 하나, 표현 하나에도 의미를 담아서 설명을 하고 있는데, 우리는 유대인의 명절이라는 시간적 배경에도 주목해 봐야 합니다. 6장에서 유월절, 7장에서 초막절이라는 것을 밝히면서 5장에서는 유대인의 명절이라고만 하고 어떤 명절인지는 밝히지 않은 이유는 38년된 병자를 고치신 사건이 안식일이란 무엇인지에 대한 유대인들의 오해를 풀어주기 위함일 것일 겁니다. 유대인의 3대 명절은 유월절, 칠칠절, 초막절인데, 이 세 절기는 모두 안식일을 바탕으로 만들어진 성회 즉 모든 남자들이 모여야 하는 절기 입니다. 그런데 요한은 38년 된 병자를 고치는 표적이 한 명절에 그것도 안식일에 일어난 일임을 통해 무언가를 설명하려고 합니다. 또 그냥 절기 혹은 명절이라고 하지 않고 유대인의 명절임을 강조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유대인이라는 단어가 70번 등장하는데, 대부분의 경우 일반 유대인을 지칭하는게 아니라 종교 지도자들 즉 바리새인이나 제사장들을 가리키는 단어로 자주 사용합니다. 요한은 이 단어를 사용함으로 이 사건이 유대교라는 종교를 예수님의 은혜와 대조시키려는 의도를 넌지시 비춥니다.

장소적 배경을 보면 양 문 곁에 베데스다라는 연못에서 일어난 사건입니다. 양 문은 이름 그대로 양이 드나드는 물인데, 그냥 아무 양이 드나들었던 문이 아니라 제사를 드리기 위한 양들이 드나드는 문이었고, 베데스다는 자비 혹은 은혜라는 뜻의 헤스다(בית חסד)와 집이라는 뜻의 벳 (חסדא)의 합성어로 은혜의 집 혹은 자비의 집이라는 의미의 장소 입니다.

잘 아시다시피 이 연못에는 전설이 있었는데, 천사가 물을 휘저은 후 가장 먼저 들어 가는자는 누구든지 병이 낫는다는 것 입니다. 아마도 이 곳의 물이 온천수이거나 특별한 성분이 있어서 치료에 용의했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고고학적으로 이 곳에서 병을 고친 귀부인이 큰 돈을 기부했다는 비문이 발견됨으로 요한복음에 나와 있는대로 병자들이 병을 고치는 장소로 사용 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아마도 이 곳에 있던 많은 병자들 중 피부병이 있는 환자도 있었을 것이고 근육통이 있었던 환자도 있었을 텐데, 요한은 이 곳에 허약한 자, 눈먼 자, 다리저는 자, 몸이 오그라든 자들의 큰 무리가 있었다고만 얘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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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 많은 병자들이 있었는데, 예수님은 무려 38년 동안 이 곳에서 물이 움직이면 먼저 들어가려는 한 남자를 만나 그와 대화 하십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이 사람은 일어나 걸을수가 없던 사람이었습니다. 이 사람이 연못물이 움직이고 가장 먼저 연못에 뛰어 들어갈 가능성은 전혀 없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오랜 시간 포기하지 않고 자기의 병이 낫기를 바라며 베데스다 연못에서 물이 움직이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에게 예수님이 온전하게 되고 싶은지를 물어보십니다. 그 때 이 병자는 온전하게 되고 싶은지 아닌지에 대한 대답 대신 아무도 자기를 물 속에 넣어주지 않아서 병이 낫지 않는다고 한탄하고 있습니다. 즉 38년된 병자는 은혜의 집에서 은혜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노력으로 병이 낫고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고 하고 있습니다. 즉 지금 요한은 스스로 절대로 구원을 얻을 수 없는 죄인들이 율법을 지킴으로 스스로 구원을 얻으려고 노력하는 것을 38년 된 병자에 빗대어 보여주고 있는 것 입니다. 이 38년 된 병자 안에는 바리새인들도 있고, 제사장들도 있고, 우리도 있는 것 입니다.

가데스바네아에서 떠나 세렛 시내를 건널 때까지의 기간이 삼십팔 년이라. 마침내 이때에 군사들의 모든 세대가 주께서 그들에게 맹세하신 대로 그 군대 가운데서 소멸되었나니 <신명기 2:14>

이 사람들은 정탐꾼들을 보내고는 하나님의 능력을 생각하지 않고 자신들의 힘으로는 가나안 땅의 거인들을 이기지 못할거라고 한탄하고 모세를 원망하다가 율법을 받고 38년간 광야를 떠돌게 됩니다.

그런 그에게 예수님은 일어나 자리를 들고 걸으라고 명하시자, 이 병자가 온전하게 되어 자기 자리를 들고 걸을 수 있게 됩니다. 38년간 광야를 떠돌다가 자신을 신뢰하던 사람들이 다 죽고나서야 약속의 땅에 들어갈 수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스스로에게 어떤 능력이 없음에도 멍청하게 연못가에 들어가면 병이 나을거라고 소망을 갖던 38년 된 병자가 예수님을 만나서 은혜로 구원을 얻는 이야기가 오늘 세번째 표적이 설명하고 싶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인 것 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필이면 이 병자를 안식일에 고치십니다. 분명히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시는 문제 때문에 곤란하게 될 것을 아시면서도 왜 예수님은 안식일에 이 병자를 고치셔야 했을까요? 이 표적뿐 아니라 예수님은 안식일에 많은 표적을 보여주시다가 종교 지도자들과 충돌하는 모습을 보여주십니다.

유대교 사람들은 안식일 지키는 것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겼는데, 이들은 하나님의 의도와는 상관없이 자의적으로 가령 1,000보 이상을 걸으면 안된다거나 어떤 물건을 들고 계단을 오르내리는 것을 금지하는 등의 안식일을 지키는 규례를 정해서 이를 어기지 못하게 했습니다. 결국 안식일을 어기는 예수님을 죽이게 되는데, 이는 율법이 결국 은혜의 예수님을 죽일수 밖에 없다는 영적 원리를 설명하는 중요한 내용입니다.

결국 두번째와 세번째 표적의 메세지를 정리하면 하나님은 이 세상에 베데스다 즉 은혜의 집을 제공하셨지만 안식일을 대표로한 율법을 통해 구원을 얻으려는 불가능한 인간들이 죄로 인해 죽어가지만 그 사람들중 은혜의 어린양 예수 그리스도가 찾아가 그를 세우시면 단번에 구원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며, 그 방법은 절대로 기적을 보는 것이 아니고 말씀을 믿고 신뢰함을 통해서 이루어진다는 내용입니다.

이제 세상 사람들이 특히 종교인들이 이를 어떻게 오해하는지 예수님께서 이를 어떻게 설명하시는지를 보시면 이 메세지가 더 선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유대인들이 병 나은 사람에게 이르되, 오늘은 안식일이니 네가 네 자리를 나르는 것은 율법에 어긋나느니라, 하매 <요한복음 5:10>

유대인들은 38년 된 병자가 하루 아침에 멀쩡하게 나은 모습을 보고 깜짝 놀라는게 아니라 안식일이니 자리를 들고 나르는 것이 율법에 어긋난다고 책망합니다.

안식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2장에 처음 등장합니다. 하나님께서 일곱째 날에 안식하시며 그 날을 복 주시고 거룩히 구별하셨다고 합니다. 이 안식일은 하나님 나라의 완성을 상징합니다. 하나님 나라의 완성은 어떻게 이루어졌나요? 하나님께서 친히 일하셔서 안식에 필요한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입니다. 마치 부모님들이 여행 계획을 짜고, 돈을 모으고 아이들을 비행기에 태워서 아이들은 아무것도 한게 없지만 신나는 여행지에서 재미있게 놀 수 있듯이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준비하시고 모든 것을 완성하셨기 때문에 안식이 가능했던 것 입니다.

인간의 타락 이후 하나님은 모세를 통해 율법을 주시고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라고 말씀하십니다. 안식일은 말 그대로 사람들에게 쉼을 주고 생존을 위한 일에서 자유하라고 주신 것이며 인간의 타락으로 인해 깨어진 완전한 천국을 아주 약간이라도 맛보고 소망하라고 주신 것인데, 인간의 종교성은 이 안식일 마저도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특별한 일을 하거나 하지 못하도록 만들어 놓고는 그것을 통해 안식일을 지켰냐 지키지 못했냐를 선악 판단하는 것 입니다.

그렇다면 안식일의 참 의미는 무엇일까요?

엿새 동안에 주가 하늘과 땅과 바다와 그것들 안에 있는 모든 것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였느니라. 그러므로 주가 안식일을 복되게 하여 그 날을 거룩하게 하였느니라. <출애굽기 20:11>

첫번째로 고대 사회에서 누구도 갖고 있지 않았던 일주일이라는 생활 싸이클을 통해서 하나님만이 유일한 창조주이시며 이스라엘 백성들만이 언약 백성임을 누리며 살 수 있게 하는 것 이었습니다. 그래서 에스겔서에는 안식일을 표징 즉 언약의 징표라고 하는 것 입니다.

또 거기서 나는, 나와 그들 사이에 맺은 언약의 징표로 '안식일'을 주었는데, 그것은 바로 나야말로 그들을 거룩하게 만드는 '주'인 줄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에스겔 20:12 - 쉬운말 성경>

그렇다면 하나님과 이스라엘 백성이 맺은 언약  무엇입니까? 그것은 나는 너희의 하나님이 되고 너희는 나의 백성이 된다는 것 입니다. 타락한 인간들 중에서 하나님께서 택하신 백성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그들을 구원해 내시고 그들에게 영생을 주시겠다는 것이 언약의 실체 입니다. 즉 안식일의 진정한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와 그로 말미암은 구원을 상징하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아무도 먹는 것이나 마시는 것으로 인하여 또 거룩한 날이나 월삭이나 안식일에 관하여 너희를 판단하지 못하게 하라. 그것들은 다가올 것들의 그림자이거니와 몸은 그리스도께 속해 있느니라. <골로새서 2:16~17>

그래서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은 내가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와 관계가 없는 자들이 어떻게 되는지를 보여주기 위해서 율법으로 안식일을 범하면 돌로 쳐 죽이라고 명령하신 것 입니다. 그리고 같은 이유로 성경은 유독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병자들을 고치는 장면을 많이 등장시키는 것 입니다. 진짜 안식은 이런 것이다라는 것을 보여줌과 동시에 완전한 하나님의 나라를 완성하기 위해서 새 창조를 하시는 모습을 보여주시는 것 입니다.

그런데 그런 안식일의 진짜 의미를 이해하지 못하고 율법적으로 안식일을 지키기만 하면 복 받을거라고 생각했던 바리새인들이 안식일의 실체이신 예수님에게 안식일을 지키지 않았다고 예수님을 죽이려고 하는 것 입니다.

예수님은 안식 즉 영생이란 인간이 율법을 지켜서 이루어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완성을 하신다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해 추가 설명을 하십니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아들은 자기가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스스로 할 수 없느니라. 그분께서 무슨 일들을 하시든지 이것들을 아들도 그와 같이 하느니라. <요한복음 5:19>

인자로 오신 예수님께서 스스로 하나님이시면서도 겸손하게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외에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스스로 할 수 있는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우리가 스스로 할  수 있는것이 있을까요? 요한복음 5장은 계속해서 안식일을 매개체로 모든 것이 하나님의 공로이니 율법을 지켜 스스로 구원을 이루려는 인본주의에 빠진 인간들에게 그것을 포기하고 은혜를 받아들이라고 하는것 입니다.

또 예수님은 친절하게도 그 은혜를 받아들여 영생을 얻는 것은 말씀이신 예수님의 말을 듣는 것임을 가르쳐 주십니다.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또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자에게는 영존하는 생명이 있고 또 그는 정죄에 이르지 아니하리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졌느니라. <요한복음 5:24>

그리고 말씀의 실체가 무엇인지를 사람들에게 설명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그리스도임을 증언하시는 분이 아버지라고 하시며 그 근거가 성경이라고 다시 얘기하며 성경이 하나님의 말씀이며 그 성경은 예수님을 증언하고 있고 그 말씀안에 영생이 있음을 강조하십니다. 그럼에도 그 말씀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평생 성경만 연구해 온 종교 지도자들을 책망하십니다.

또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친히 나에 대하여 증언하셨느니라. 너희는 아무 때에도 그분의 음성을 듣지 못하고 그분의 모습을 보지 못하였으며 또 그분의 말씀이 너희 속에 거하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분께서 보내신 이를 너희가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라. 성경 기록들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각하거니와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도다. <요한복음 5:37~40>

너희가 모세를 믿었다면, 나를 믿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세가 기록한 것이 나에 관한 것이기 때문이다. 너희가 모세의 글을 믿지 않는데, 내가 말하는 것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느냐?" <요한복음 5:46~47>

안식일을 예로 들어 율법 즉 성경이 사실은 지키라고 주신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설명하기 위해서 주신 것임을 소개해 드렸습니다. 이 당시 종교 지도자들은 예수님을 설명하기 위해 주어진 성경을 지키면 구원을 얻을 수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그것을 계속 지키려 했지만 그들은 38년 된 병자처럼 스스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이들임을 가리키는 것 입니다. 죄인인 인간은 하나님의 말씀을 지킬수 없을뿐 아니라 스스로는 그 말씀을 이해할 수도 없습니다. 전에도 말씀드렸지만, 이 세상의 어느 인간도 바리새인들 처럼 성경을 연구할 수 없습니다. 바리새인은 인간의 능력으로 성경을 가장 깊이 이해한 사람들입니다. 하지만 그들은 빛이신 예수님 앞에서 죄인으로 드러났고 그들의 성경에 대한 지식은 완전히 잘못된 것임이 드러났습니다.

지금도 인간들은 과학과 철학을 발전시키면서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신의 지식이 더 뛰어나다고 생각하고 있지만, 천만에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은 창조주 이시며 구원자이신 우리의 유일한 소망, 은혜가 넘치시는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 그리고 그 분이 주실 영생에 대해 말씀하고 계십니다.

 

두번째 & 세번째 표적에 대한 정리

  • 두번째 표적인 고관의 아들을 고치신 사건은 표적을 보시고 그 기적 자체가 신기해서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않으시는 예수님을 통해 기적을 쫓는 사람들에게 경고하심과 동시에 말씀을 통해 예수님을 믿고 신뢰하는 사람들이 참 신자임을 그리고 그들이 부끄럼을 당하지 않을 것임을 가르치십니다.
  • 세번째 표적인 38년 된 병자는 38년 간 광야를 떠돌다가 죽어간 스스로의 힘과 능력을 믿는 죄인들에게 은혜가 임하지 않으면 구원을 얻을 수 없음을 가르치십니다.
  • 요한은 그럼에도 율법을 지킴으로 의를 얻고 구원을 얻을 수 있을것으로 생각하는 종교 지도자들을 등장시키는데 그들이 갖고 있는 안식일에 대한 오해를 드러내고 이에 대한 강해를 하십니다. 안식일의 참된 의미는 완전한 하나님의 일하심을 통해 얻는 하나님의 나라 즉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얻는 은혜의 구원인데도 사람들은 그 참 의미를 이해도 못한체 안식일을 지켜서 죄를 짓지 않으려는 헛된 노력을 보입니다.
  • 성경은 예수님에 대한 하나님의 증언임에도 사람들은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고 믿지도 않으려 합니다.
  • 하나님의 증언 즉 성경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영생을 얻는 것이지만 하나님을 믿지 않기에 즉 하나님의 힘으로 살려고 하지 않고 스스로의 힘으로 이루려고 노력하기에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거부하고 안식 바깥 즉 예수 그리스도의 바깥으로 나아가려고 합니다.
  • 하나님의 언약 안에 있는 백성 즉 하나님을 나의 하나님으로 인정하고 하나님께서도 자기의 백성으로 인정하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어 하나님의 말씀을 이해하는 사람들에게는 생명이 있고 그 밖에 있는 사람들에게는 사망이 있을 뿐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