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국열차
(Photo : ) 열차 밖으로 나가기 위해 남궁민수와 요나가 일으킨 폭발. 남궁민수와 커티스의 희생으로 요나와 티미가 살아남는다.

기독교에 대한 부정적 패러디는 이제 대중문화 속에서 하나의 트렌드가 되어버린지 오래지만, 설국열차의 패러디는 그것이 다른 하나의 강렬한 메시지 전달에 보조적 역할을 담당한다는 점에서 더 흥미롭다. 제1화에 이어 영화 내에서 기독교 신앙이 어떻게, 그리고 무엇에게 동굴 바깥 진리의 자리를 내주었는지 알아보자.

◈탈출: 기만적 정치∙종교 이데올로기의 판을 깨기

이제 영화 <설국열차>에서 그림자의 위치로 떨어져버린 기독교의 운명은 어떻게 예견되는가? 기독교 신앙은 근원적 폭로 앞에서 완전히 무력화되고 만다. 영화는 부조리한 사회질서와 거기에 일조하는 종교(특히 기독교)의 거짓말에서 벗어나기 위해, 근원적이고 충격적인 폭로와 탈출이 필요하다는 메시지를 던진다. 여기서 근원적·충격적 폭로란 혁명 이상의 것을 말한다고 보아야 한다.

영화의 원작 만화 'Le Transperceneige'가 근대 시민혁명의 본산지인 프랑스에서 집필된 작품이라는 사실을 상기해 보자. 프랑스어로 'perce-neige'란 '눈이 내림'의 의미이다. 여기에 교통수단을 의미하는 'trans'가 붙은 'Transperceneige'는, 눈이 내려 쌓인 곳을 헤치고 지나가는 교통수단을 의미한다. 영화에서 예카테리나 다리에 눈이 쌓여 얼어붙은 자리를 돌파해 가는 열차의 모습을 연상하면 원작의 제목이 쉽게 이해될 것이다.

프랑스인들만큼 혁명의 허실을 체감하며 살아온 국민들이 있을까? 멀리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가까이는 1968년의 68운동까지, 프랑스는 시대의 획을 긋는 혁명의 여파를 몸으로 직접 체험하며 사는 사람들의 공간이었다. 그러나 다수의 혁명들은 부조리와 불평등, 그리고 인간성을 말살하는 자본주의 세태를 근본적으로 변화시키지 못했고, 프랑스인들에게는 반복되는 환멸을 겪게 하는 원인으로 작용하였다. 영화의 전체 플롯은 원작과 많은 면에서 차이를 보이지만, 열차 내의 혁명과 열차 바깥으로의 탈출이라는 원작의 소재들은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설국열차
(Photo : ) 영화의 원작만화, ‘Le Transperceneige’의 한 장면.

영화는 원작의 모티프를 이어받아, 플롯 막바지에서 정치적 열망과 혁명에 대한 회의적 시각을 여지없이 드러낸다. 정치적 혁명은 피상적 차원에서 숭고하고 정의롭게 보이지만, 내부적으로 보면 새로운 지배층, 새로운 정치체계, 그리고 이전보다 업그레이드된 기만적 이데올로기 산출의 반복일 뿐이다.

윌포드가 열차 최선두까지 돌파해 온 커티스에게 밝힌 진실은, 윌포드와 꼬리 빈민칸의 정신적 지도자 길리엄이 윌포드의 지배질서 유지를 위해 그간 협력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는 사실이었다. 이제 윌포드는 늙어버린 데다 커티스의 혁명을 조절하는 부분에 있어 기대를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이유로 길리엄을 처형해 버리고, 커티스를 자신의 후계자로 지목하고 회유한다. 꼬리칸 어린이들을 열차 부속품 대용으로 사용하는 비인간적 행태를 목격하기 전까지, 커티스는 길리엄의 회유에 거의 넘어가고 있었다. 현실의 혁명도 이와 같지 않은가?

프랑스 68운동의 주역이었던 진보세력 대학생들은 이후 프랑스 사회주의 정부의 집권층(대표적으로 미테랑 대통령)이 되지만, 미테랑 정부는 재정적자 누적과 비윤리적 행태(핵실험 강행, 르완다 내전시 정부군에 무기를 지원하여 민간인 학살에 일조)로 지탄받은 바 있다. 한국은 어떤가? 386세대의 주역들 다수가 정치 무대에 입문했으나, 오히려 노회하고 부패한 기성 정치인과 동화되는 모습에 지지자들에 큰 실망을 준 일이 다반사다.

필자는 여기서 보수세력을 옹호하고 진보세력을 비난하려는 의도는 조금도 갖고 있지 않다. 단 보수와 진보에 관계 없이, 아무리 이상적인 정치 이데올로기를 가진 혁명가라 하더라도 지도부에 등극하는 순간부터는 대중의 무지와 욕망이 거미줄처럼 복잡하게 얽혀들어 있는 현실 정치 시스템에 굴복하고 동화된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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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윌포드(왼쪽)를 죽이고 싶도록 증오하던 커티스도 윌포드의 달콤한 회유에 반쯤 넘어가버리고 만다.

이제 열차 밖에서의 삶을 꿈꾸는 선각자 남궁민수와 요나뿐 아니라, 종교와 정치 뒤에 숨어있는 기만의 이데올로기에 환멸을 느낀 커티스도 열차 밖으로의 탈출에 동참한다. 그들은 마치 니체(Friedrich Wilhelm Nietzsche, 1844-1900)와 같이 외적으로 부여된 모든 우상화된 규율과 질서를 '망치를 들고' 분쇄해 버리는 근본적인 전복만이 삶을 휘두르고 있는 거짓의 장막을 벗길 것이라고 믿게 된다.

물론 이 탈출 시도는 대단한 규모의 희생을 동반하는 결과를 낳는다. 열차 바깥으로 나가는 문을 열기 위해 남궁민수가 만든 폭탄은 남궁민수와 커티스를 희생시키고, 폭발의 여파로 발발한 눈사태로 인해 단 두 사람을 제외한 열차 내 모든 승객이 사망하게 만든다. 딸을 지키려는 남궁민수의 희생과 기계부속 대용으로 전락한 아이를 지키기 위한 커티스의 희생으로, 요나와 어린 남자아이 티미만이 살아남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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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hoto : ) 기계부속 대용으로 활용되고 있는 꼬리칸 빈민층 아이 티미.

◈열차 바깥의 삶: 삶의 진정한 조건

영화의 열차 밖을 '동굴 밖'이라고 말한다면, 아마 플라톤은 "말도 안 되는 일"이라고 화를 낼지도 모른다. 여전히 실존이라니! 플라톤에게 현세의 삶, 즉 물질 세계에서의 실존은 죽음 뒤 다가올 영원한 존재의 세계와의 합일에 비하면 불완전하고, 가상적이고, 비루하고, 숭고하지 않은 것이었다.

그렇지만 오늘날 고대인을 지배하던 초월적 세계에 대한 믿음과 바람이 그대로 통용될 리는 없는 법. 영화는 결말부에 현실적, 육체적, 물질적 삶을 인간 존재의 본질로 보는 현대의 시대정신을 여실하게 반영한다. 열차에서 탈출은 곧 기만적이고 통속적인 자기 존재 이해로부터의 해방을 의미한다. 탈출한 두 사람은 열차 바깥이 더 이상 사람이 곧장 얼어죽을 만큼 춥지 않고, 생명체들도 살아 돌아다닌다는 것을 알게 된다. 열차 안에서 남궁민수와 요나 두 사람만이 믿었던 진실, 즉 열차 밖으로 나가도 죽지 않는다는 진실이 입증되는 순간이다.

설국열차
(Photo : ) 폭발의 여파로 발생한 눈사태에 의해 전복되는 열차 차량들. 기만적 질서의 근본적이고 완전한 전복을 시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장면에서 필자는 20세기 실존철학의 거두 하이데거(Martin Heidegger, 1889-1976)의 '본래적 실존으로서의 세계-내-존재(In-der-Welt-sein)'라는 말을 떠올렸다. 여기서 이 용어가 가진 광활한 의미를 전부 풀어내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영화와 연관지어 짧게 이야기하는 것에 의의를 둔다.

요나와 티미는 이제 열차 내 질서에 적응하지 못한 범법자(영화에서 이유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남궁민수는 열차 내 질서에 적응하지 못해 죄수칸에 갇혀 있다, 혁명지도자 커티스에 의해 구출된다)의 딸이나, 기계 부속으로밖에 쓰일 수 없는 하찮은 하층민이 아니다.

둘은 인류의 마지막 남은 미래로서, 그 가치를 헤아릴 수 없는 고유한 존재로 자리매김한다. 더 이상 두 사람을 얽어맬 사람들은 존재하지 않는다. 둘의 존재는 어떠한 외부적 가치평가와 의미부여로부터도 자유로운 존재가 된다. 그들이 엘리트인지 하층민인지, 재력이 있는지 없는지, 지식이 많은지 적은지, 어떤 능력을 갖고 있는지 없는지 등은 그들의 존재를 평가하는 데 아무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열차에서 탈출한 그 순간만큼은, 그들은 '본래의' 고유한 자기로서 세계 속에 있고, 세계를 이해하며 존재한다.

이제 두 사람은 어떤 허구적 기대감이나 욕망에 노출되지 않은 채 그들이 처한 위치와 시간과 세계에 대하여 본연의 자기로서 존재하며 살아갈 수 있다. 하이데거의 실존적 관점에서 바라본 영화의 결말은 이렇게 풀이된다.

 

설국열차
(Photo : ) 폭발의 여파로 발생한 눈사태에 의해 전복되는 열차 차량들. 기만적 질서의 근본적이고 완전한 전복을 시각화하는 것으로 보인다.

 

영화 <설국열차>에서 '동굴 밖 진리'는 각 개인이 고유하고 진솔하게 세계와 관계를 맺으며 그 안에 존재하는 자기의 의미를 수긍하는 삶을 지목하는 듯 하다. 그리고 바로 이런 진실에 의해 모든 종교적∙정치적 이데올로기의 속박이 분쇄된다는 것을 영화는 말하고 싶어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로써 영화는 오늘날 우리 사회의 지배적 시선이 기독교 신앙을 단지 동굴 속에 흐릿하게 비쳐진 허구적 그림자로 보고 있다는 것을 알려준다. 그리고 사람들이 진정으로 꿈꾸는 삶은 세속적 가치와 욕망이 투영된 이데올로기에 부응하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존재의 경이로움과 소중함(이는 이기적 자기애의 욕망과는 다르다)에 대한 가장 진솔하고 자유로운 수긍에 있음을 역설하고 있다.

 

설국열차
(Photo : ) 세계-내-존재로서, 본래적 실존을 영위하는 존재자로서, 요나와 티미는 조작되지 않은 동굴 바깥의 진리, 즉 각자의 고유한 실존을 대면한다.

 

그런데 이 시점에서 필자는 한 가지를 묻고 싶다. 지극히 고유하고 본래적인 자기를 찾는 정신의 발원지는 어디인가? 철학사에서는 보통 현대 실존철학의 출발점을 19세기 덴마크의 작가이자 철학자인 키에르케고르(Søren Kierkegaard, 1813-1855)로 본다. 그는 평생 다음의 물음을 고민하였다. "도대체 오늘 여기에 살고 있는 나는 하나님 앞에 어떤 자로서 존재해야 하는가?" 이 물음은 곧 누구도 함부로 규정할 수 없는 나만의 삶이 가진 의미를 찾고 이 의미에 부응하는 신앙을 모색하는 일로 이어진다.

키에르케고르가 찾은 고유한 삶의 의미는 결코 스스로 극복할 수 없는 죄성과 절망을 자각하는 것이었다. 이는 누가 구원 교의를 알려줘서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 마음껏 나아갈 수 없는 죄인으로서의 절망은 세계가 나에게 매기는 모든 가치나 기대, 의무 등을 부정하고, 오직 하나님 앞에서 가장 겸허하고 유한한 존재로서의 자기에 대해 진지하게 성찰할 때에만 절감하는 것이다. 복음은 바로 이렇게 자기를 이해하는 자에게 비로소 그 무한한 가치를 드러낸다.

예수님께서는 "내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을 불러 회개시키러 왔노라(눅 5:32)"고 말씀하셨다. 이때 죄인이란 자기의 외모(용모뿐 아니라 재력이나 권력, 지식, 기술 등을 모두 포함한 외적 가치들)를 내세우지 않고, 하나님이 지으신 세계에 의존해 있는 피조물로서 가장 정직한 자기이해를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오는 자를 말한다.

설국열차
▲"죄는 그 자체로 선으로부터의 단절이지만, 죄에 대한 절망은 선으로부터 더 심한 제2의 단절이다(키에르케고르)."

실존철학의 고유한 자기이해란 바로 이런 정신으로부터 유래됐다. 모든 인간적 장점들은 세속적 기대에는 부응하는 것일지 모르나, 하나님 앞에서 고유하고 진정한 자기 존재로부터 발견하는 죄성과 절망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무의미하다. 비록 하이데거 이후 실존철학은 대부분 하나님 앞에서의 자기에 대해 수긍하지 않고 자기 앞에서의 자기를 찾는 편이지만, 적어도 실존철학이 말하는 고유한 자기존재를 이해하는 인간상은 이미 기독교 신앙의 한 조건으로 복음의 가르침 속에 함축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필자는 영화 <설국열차>에서 지목하는 '동굴 밖 진리'의 자리가 여전히 기독교 신앙의 자리가 될 수 있다고 믿는다. 다만 오늘날 신자들이 신앙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하기보다 세속에서의 자기 앞가림에 바쁜 나머지, 원래 복음이 갖고 있던 귀한 가르침을 활용할 생각조차 못하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본다.

'동굴의 비유'를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구원의 행로로 변증하던 자들은, 그저 이론만이 아니라 실천의 측면으로도 복음과 믿음을 위해 모든 것을 헌신하는 삶을 살았다. 오리겐은 믿음을 지키다 순교당했고, 어거스틴은 복음의 진리를 알고서 전 생애를 복음의 진리를 변증하는 데 바쳤으며, 특수침례교회 목회자였던 존 번연은 신앙을 지키다 영국 성공회의 교의에 불복한다는 이유로 12년간 수감생활을 했다. 당시 영국 감옥의 열악한 환경을 고려하면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킨 것이다.

그들에게는 세속의 기대나 질서가 무의미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나님 앞에 고유한 자기 존재이해를 갖고 순종한 "세상이 감당치 못하는 믿음(히 11:38)"을 가진 자들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동굴 밖 진리'가 기독교 신앙의 자리라는 것을 자신있게 변증할 수 있었다. 영화가 기독교 신앙을 '동굴 밖 진리'의 자리로부터 몰아내고 단지 동굴 속에 갇힌 가상의 그림자로 그려내는 것은, 실은 오늘날 기독교인들 중 진실된 믿음으로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찾아보기 어렵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은 아닐까?

피상적으로 보면 영화의 메시지는 기독교인들에게 불편함을 선사하지만, 실은 그런 불편함을 감내하게 된 원인이 교회와 신자들 편에 있는 것은 아닌지 반성해 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브리콜라주 인 더 무비(Bricolage in the Movie)란

브리콜라주(bricolage)란 프랑스어로 '여러가지 일에 손대기'라는 의미를 갖고 있다. 이 용어는 특정한 예술기법을 가리키는 용어로 자주 사용된다.

브리콜라주 기법의 쉬운 예를 들어보자. 내가 중·고등학교에 다니던 학창시절에는 두꺼운 골판지로 필통을 직접 만든 뒤, 그 위에 각자의 관심사를 이루는 온갖 조각 사진들(날렵한 스포츠카, 미인 여배우, 스타 스포츠 선수 등)을 덧붙여 사용하는 유행이 있었다. 1990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내신 분들은 쉽게 공감할 것이다.

이처럼 어떤 의미로든 자기 삶에 연관된 모든 감각적이고 관념적인 재료들을 손에 잡히는 대로 격식 없이 조합하여 하나의 멋진 작품을 만드는 일을 브리콜라주라고 한다. 이 기법은 오늘날 광고나 뮤직비디오, 조형예술, 팝아트(pop art) 등에 자주 동원되며 영화에서도 빈번하게 활용된다.

오늘날의 영화는 삶의 모든 관심사들을 매혹적인 방식으로 조합하여 그려내고 있다. 그 안에는 기독교인들이 환영할 만한 요소와 불편해할 만한 요소들이 정교하고 복잡하게 뒤섞여 있는 경우가 다반사이다. 본 칼럼은 관객들에게 큰 호응을 받은 영화들 속에 뒤섞여있는 아이디어들을 헤아려 보고, 이를 기독교적 입장에서 어떻게 해석하고 평가할 것인지 고민하는 기회를 만들어보려 한다.

박욱주
▲박욱주 박사.

/박욱주 박사

연세대학교에서 신학을 전공했으며, 동 대학원에서 조직신학 석사 학위(Th.M.)와 종교철학 박사 학위(Ph.D.)를, 침례신학대학교에서 목회신학박사(교회사) 학위(Th.D.)를 받았다. 현재 서울에서 목회자로 섬기는 가운데 연세대 연합신학대학원 겸임교수로 재직하고 있으며, 기독교와 문화의 관계를 신학사 및 철학사의 맥락 안에서 조명하는 강의를 하는 중이다.

필자는 오늘날 포스트모던 문화가 일상이 된 현실에서 교회가 보존해온 복음의 역사적 유산들을 현실적 삶의 경험 속에서 현상학과 해석학의 관점으로 재평가하고, 이로부터 적실한 기독교적 존재 이해를 획득하려는 연구에 전념하고 있다. 최근 집필한 논문으로는 '종교경험의 가능근거인 표상을 향한 정향성(Conversio ad Phantasma) 연구', '상상력, 다의성, 그리스도교 신앙', '선험적 상상력과 그리스도교 신앙', '그리스도교적 삶의 경험과 케리그마에 대한 후설-하이데거의 현상학적 이해방법'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