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하는 그리스도인

이원석 | 두란노 | 242쪽

필자는 자녀가 셋이다. 큰 아이가 곧 고3이 된다. 초등학교까지는 학원에 보내지 않았는데, 중학생이 되면서부터 아이들 스스로 학원에 보내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지금은 아이 셋 모두가 학교 공부로 부족해 학원에 다닌다.

고등학생 아이를 보고 있으면 '참 불쌍하다'는 마음을 지울 수 없다. 정말 공부를 위해 사는 것 같다. 너나할 것 없이 이렇게 공부를 하는데, 과연 공부는 왜 해야 하고? 공부란 정말 무엇일까?

공부의 의미

공부가 뭘까? 본서의 저자는 머리에 지식을 주입하는 것을 넘어 어느 한 분야에서 숙련된 직공이 되는 과정을 공부(工夫)라고 정의한다. 공부는 특정한 분야의 장인이 되는 것, 그래서 공부의 본질은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體得)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렇다. 지식은 한 면으로는 머리에 축적되고, 다른 한 면으로는 몸에 스며들어야 하는 것이다.

공부는 전인적인 것이다. 진정한 달인이 된다는 것은 머리에 지식을 넣을 뿐 아니라 몸으로 그 지식을 체현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공부는 반복이다. 즉, 공부는 '재미없음'을 '재미있음'으로 승화시켜 가는 과정이며, '서툴고 어려움'을 '편안하고 자연스러움'으로 받아들이는 인내의 과정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라면 성경에 달인을 꿈꿔야 하지 않을까!!!  

왜 공부해야 하는가?

1990년대부터 한국교회는 '제자훈련' 붐이 일어났었다. 필자도 제자훈련 지도자 과정을 오래 전에 이수했다. 정말 그 당시 필자는 교회가 제자훈련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취지는 매우 좋았다. 목회자 중심이 아니라 평신도를 목회의 협력자와 파트너로 삼고자 하는 '만인제사장'적 교회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먼저 신학훈련을 받지 못한 평신도들이 훈련을 받아야 했다. 그래서 다양한 제자훈련과 성경공부 교재들이 쏟아져 나오고, 모든 교회가 공부하는 교회, 훈련하는 교회의 모습을 갖추는 듯 했다. 그 사이 시간은 20여 년이 흘러 버렸다. 문제는 교회 안에서 훈련은 잘 돼 있지만, 담임 목사의 말씀에 순종하는 자세는 잘 돼 있지만, 정작 자신의 삶의 문제들과 세상 앞에, 세상을 향해서는 무능함을 넘어 담을 쌓아 버린 것이었다.

본서 제목이 '공부하는 그리스도인'이다. 그러나 본서가 말하는 '공부'는 또 다른 하나의 성경공부나 제자훈련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역설적이게도 다수의 성도들은 교회에서 성경공부를 많이 하면 할수록, 세상에서는 염세적이거나 무능력해지는 현상이 나타난다. 즉 세상적인 것은 모두 무가치하다거나 육신에 속한 것이라 여기고 멀리해야 한다고 여기며, 자신과 세상을 분리시키려고 한다. 이러한 현상들은 일반은총적 관점의 부재에서 오는 현상으로 많은 성도들에게 혼란과 갈등을 유발시키고 있으며, 교회를 떠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중요한 것은 지금까지의 제자훈련은 세상 앞에, 세상 가운데 건강한 그리스도인에 대해 적절한 답을 제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오히려 다분히 세상과 결별시키고 교회에만 집중시키는 분열을 조장하고 있다는 혐의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그래서 본서의 저자는 성경공부를 멀리하는 것이 아니라, 인문학 공부의 필요성을 강조한다. 그리스도인이 왜 공부를 해야 하는가? 이 세상에서 빛과 소금이 되는 건강한 그리스도인으로 살아내기 위해서이다.  

르네상스

각 분야에서 장인의 수준에 이른 고수들은 하나같이 '기본으로 돌아가라'는 '기본의 원칙'들을 강조한다. 기본이 바르게 돼 있어야 지속적 성장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기본이 잘못돼 있으면 성장의 한계에 곧 부딪치게 된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더 이상 복음의 확장을 이어가지 못하고, 성도들이 신앙성장의 퇴보현상이 일어나는 이유에 대해 단순히 열정이나 열심의 부족, 혹은 시대와 환경 변화 탓으로만 돌리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이미 우리는 기본에서 멀어져 있다는 사실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14-16세기 일어났던 문예부흥 운동이라고 불리는 '르네상스'의 본래 의미는 다시(re) 태어난다(naissance)이다. 르네상스의 본래 취지는 희랍의 정신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헬라어의 원문 고전을 다시 읽는 운동이었다. 서양 정신(철학)의 뿌리는 그리스(희랍)에 있다. 놀랍게도 루터가 당시 로마가톨릭의 문제점을 발견할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 고전과 인문학적 소양 때문이었다.

더욱이 인문학의 거장 에라스무스와는 매우 가까운 사이였고, 자유의지의 견해 차이로 결별하기 전까지 에라스무스는 루터의 훌륭한 종교개혁의 지성적 파트너였다. 칼빈 또한 에라스무스와의 직접적인 관계는 약하지만, 그의 대표작 <기독교 강요>는 에라스무스의 인문학을 바탕으로 한다고 할 만큼 인문학적 관점을 차용하고 있다. 즉 르네상스가 없었다면 종교개혁도 없었다고 할 만큼, 인문학은 종교개혁자들의 사상에 스며들어 있었다.  

공부하는 공동체

저자는 공부에 대해 분명한 철학을 가지고 있다. 공부는 머리가 아니라 몸으로 체득(體得)하는 것이다. 공부는 삶을 위해 하는 것이다. 독서는 소리내어 해야 한다. 독서는 반복하는 것이다. 이런 등등의 공부에 대한 훌륭한 통찰들을 제시하면서, 마지막으로 공부는 혼자하기보다는 함께 하는 것이 더 유익하고 효과적이라고 주장한다. 저자가 말하는 공부는 머리에 쌓아두고 자랑하거나 과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삶 속에서 적용할 수 있는 지혜들을 익히는 것에 더 무게를 둔다. 그렇기에 혼자 하는 공부보다는 여러 명이 함께하는 공부가 더 유익하다는 것이다. 특히 교회에서 성경공부와 함께 인문학을 함께 읽고 나누는 공부 모임을 만들어 볼 것을 제안한다.  

삶을 위한 고전 읽기  

그리스도인은 교회 안에 머물기 위해 부름 받고, 택함 받은 존재들이 아니다. 오히려 세상을 향하여 나아가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들이다. 즉, 그리스도인들이 빛을 발해야 할 곳은 세상이다. 사도 바울이 세상의 초등학문을 '분토'와 같이 버렸다고 언급한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세상의 학문을 '초등학문'이라 폄하하기만 했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자. 우리와 우리 자녀들은 초등학문을 거치지 않고 바로 대학교육을 받았는가? 사도 바울이, 모세가 세상교육을 받지 않았다면 모세오경과 바울서신들이 나올 수 있었을까? 교회가 성경을 가르치는 것이 당연한 것처럼, 과거 수도원에서는 교양과 인문학을 공부하는 것이 당연했다. 즉, 기독교 역사는 건강한 믿음과 영성을 위해 성경과 인문학이 중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고 있는 셈이다. 저자는 서문에서 "사람에게 영양이 결핍되면 병에 걸리듯이 지금 교회는 교양이 결핍되어 길을 잃고 있다"고 밝힌다.

본서는 부담스러운 '공부'에 대해 부담스럽지 않게 읽을 수 있도록 하고 있다. 물론 일반적인 점수를 올리는 공부 비법과는 거리가 먼 책이고, 인생과 삶을 위한 공부를 돕는 책이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