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육신적 교회

마이클 프로스트 | 새물결플러스 | 384쪽

'몸'이 없는 사람이 가능할까? 절대 불가능하다. 하지만, 왜 기독교는 구원의 대상에서 몸을 그토록 배제시키고 있는가? 몸의 욕구에 대한 '비신앙적' 혹은 '반신앙적' 뉘앙스는 과연 성경적 가치관인가? '영적인 사람', '신령한 사람'은 몸에 대해 절제만을 강조하고 요구하는데, 이는 성경적인가? 과연 몸을 돌보고, 몸을 가꾸며, 몸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몸의 욕구들에 중요하게 관심을 가지며, 몸의 느낌들을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영적이지 않거나 비신앙적 또는 비성경적인가? 종교적 체험을 소중히 여기면 신비주의이고, 사회적 운동을 하면 세속적 신학이 되는 것이 성경의 주장인가?

탈(脫)육신적 믿음

성육신(incarnation)의 반대 개념인 탈육신(excarnation)의 개념은 몸에서 피부와 장기를 기술적으로 제거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어떤 고대문화의 풍습으로 들짐승들이 사람의 시체를 먹도록 남겨두기 위해 자연적 방법으로 행해졌다.

다른 한편 중세 유럽에서 손으로 살을 벗기는 것은 일반적 의례였다. 중세 유럽인들은 타국에서 죽은 군주와 군대 장군들의 몸에서 살을 벗겨 뼈들을 먼 곳에서부터 고국으로 위생적으로 운반할 수 있었다. 본래 게르만 관습인 이 풍습은 라틴어로 '모스 튜토니쿠스'로 불렸고, 문자적 의미로 '독일 관습'이다. 이 풍습은 기독교 세계 전역에서 왕과 성자들이 가지고 있던 유골과 소유물을 숭배하는 성물숭배로 발전했다(몸을 지나치게 강조한 편향적 결과물이다).

지금 고대의 탈육신 풍습이 더는 성행하지 않지만, 또 다른 탈육신이 일어나는 역사적 시대에 살고 있다. 즉 육체에서 영혼이 분리되는 것을 포용하라는 요구가 점차적으로 확대되고 있는 것이다. 지금의 탈육신은 몸과 영혼을 분리하는 이원론에 근거한다. 초기 기독교는 신플라톤의 영향을 받았다(그 이유에 대해 바울 신학과 연관해 연구해 볼 가치가 있다). 그래서 기독교 전통 안에 자연스럽게 영혼과 육체를 분리하는 이원론적 사상이 형성되었고, 그 사상은 사상으로 끝나지 않은 채 기독교인들의 사고 구조(형태)로 자리잡고 있다. 바로 '성(聖, 영,종교적 의례, 교회)'과 '속(俗, 몸과 물질, 세상)'의 분리적 사고 구조이다.

역사적으로 탈육신은 죽은 사람들을 존중하는 방법이었다. 동물들이 먹는 먹이가 되도록 시신을 놓아두어 흙에서 흙으로 돌아가게 만드는 순환관계로, 적절한 애도를 위해 전쟁터에서 죽은 사람의 시신을 위생적으로 운반하기 위해 살을 벗기는 방법으로 존중한 것이다. 이런 방법은 죽은 자들에게 의미를 부여했고, 살아 있는 자들의 문화적 가치들을 반영하여 조심스럽게 선택한, 신성한 의식들이었다.

하지만, 이분법적으로 몸을 무시한 사고 구조는 타인(비기독교인, 세상)과 우리(기독교인, 교회)의 구별을 낳게 됐다. 타인에 대해서는 맹목적으로 그 전체를 무시하고, 우리 것만이 옳다는 자화자찬에 빠진다. 자연도 '대상화'하여 이용과 착취를 정당화하고, 자신들이 생각하는 영적인 것을 조건화하여 자신들이 생각하고 있는 영적이지 않다고 생각되는 모든 것들을 폄하하거나 적으로 간주하여 폭력(무관심, 비판, 왜곡, 공격, 비난)을 서슴치 않는 형태들이 계속해서 나타난다.

현재 탈육신적 믿음은 매우 달콤한 유혹이다. 죄에 대한 책임, 자신의 삶에 대한 책임, 그리스도인으로서 이 시대와 자신이 속한 교회 안에서만이 아니라, 교회 밖에서의 공동체와 자신에게 맡겨진 사역적인 모든 부족함이나 잘못된 책임은 예수 그리스도의 속죄로 대속되어 우리의 삶이야 어떠하든, 주일예배에 빠지지 않고 입술로 신앙의 고백만 바르게 하면 우리는 영적으로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종교적 행위와 교리적 지식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면, 우리의 육신적 삶에 대해서는 자유롭다는 유혹이다.

성육신하신 예수님

그런데 질문이 생긴다. '왜 예수님은 성육신하셨을까?', '굳이 왜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을까?', '우리 인간에게 영적(이성적)인 것의 범위란 육체(체험)가 제외된 것이라는 점이 성경이 말하고 있는 것인가?', '과연 성경은 영적인 것과 물질(육신이 물질을 의미하고 있는가)적인 것을 구별하고 있는가?', '복음서에서 소개되는 예수님의 가르침과 예수님의 삶과 사역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믿음과 신앙생활에 가까운가, 아니면 지금 우리의 신앙생활 모습은 구약의 율법적 신앙생활에 가까운가?' 이러한 질문들에 대해 정직하게 풀어가야 한다.

본서는 교회 안과 밖, 양쪽 모두 매우 혼란스러운 탈육신적 현상들을 다루고 있다. 기독교 문화나 사상뿐 아니라 비기독교 사상과 문화 또한 인터넷과 스크린, 도덕적 모호성, 과학기술의 발달로 인해 인간의 자리가 기계로 대체되는 현상 등 탈육신적 현상이 강화되고 있음을 지적한다.

예수님의 성육신이 갖는 본질은 '분리'인가, '연합'인가? 예수님은 왜 육신을 가지고 이 세상에 오신 것일까? '성'과 '속'을 분리하시기 위함인가, '성'과 '속'의 잘못된 구별을 바로잡아 '화해'케 하기 위함인가? 예수님은 분명 영혼과 육체를 분리시키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영혼과 육체 모두를 구원하시기 위해 육체로 우리 가운데 오셔서 육체로 하나님의 의를 이루셨다. 우리 또한 영적으로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삶으로도 하나님의 의를 이루라고 명령하신 것이다.

저자는 우리 인간을 '영을 가진 몸'이라고 표현하였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우리의 몸을 '영혼의 집'이라고 말씀한다. 즉 우리는 몸이 있어야 영을 담을 수 있고, 우리 안에 있는 영은 우리 몸을 통해 표현되고 소통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성경을 통해, 영혼만이 아니라 몸의 부활을 약속한 것이다. 인간은 몸을 떠나 영만 존재할 수 없다. 인간의 몸과 영혼은 둘이 아니라 하나이다.

성육신적 교회와 삶  

본서의 저자는 제자됨에 대해 '도제'적 가르침을 강조하고 있다. 이탈리아 바이올린 장인 안토니오 스트라디바리의 정교한 바이올린에 관한 예를 들면서, 스트라디바리우스 바이올린을 모방하기 위해 여러 과학적 수치와 기법들로 연구하여 똑같은 재료와 재질과 치수 등 모든 것을 동일하게 사용해도 같은 소리를 만들어 낼 수 없었다고 한다. 하지만 스승 곁에 앉아 실습하면서 스승이 나무를 느끼듯 자신들의 손끝으로 그것을 느끼며 치수와 균형을 파악하고, 목재의 재질을 느끼면서 기술을 습득하여 스승의 소리를 이어가는, 머리로 익힌 기술이 아니라 몸으로 익힌 지식과 기술의 탁월함을 이야기한다.

본보기를 통해 배우는 것은 권위에 복종하는 것이다. 그것은 스승의 방식을 신뢰하기 때문이다. 스승의 기술의 효율성을 상세하게 분석하고 설명할 수는 없더라도, 스승의 모든 기술과 규칙들을 무의식적으로 터득한다.

진짜는 무의식적으로 되는 것이다. 자전거, 자동차 운전 등 진짜 내 것은 무의식적으로 된다. 컴퓨터 자판을 통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필자도 컴퓨터의 자판 위치를 의식하지 않고, 생각과 함께 컴퓨터 자판의 위치는 무의식적으로 손가락이 움직인다.

갈라디아서 2장 20절에서 '예수가 내 안에 산다'는 것은 우리의 몸이 무의식적으로 예수님의 모습이 나타날 때 쓸 수 있는 말이다. 즉, 몸과 영의 일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믿음과 몸의 행동이 자연스러운 일치로 연합되기를 명령하신 것이다. 믿음의 지식과 믿음의 몸이 따로 분리되어 있는 것은 참된 믿음에 아직 이르지 못했다는 증거다. 그렇다면 우선은 의식적으로 참된 믿음의 지식으로 우리의 몸을 쳐서 복종시키는 훈련을 반복해야 한다.

성경은 '교회'를 '그리스도의 몸(지체)'이라고 말씀한다. 즉 그리스도의 가르침이 교회의 행위(몸)를 통해 나타난다는 말씀이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이 세상에 몸으로 행하기 위해 부름 받은 존재이다.

본서는 '참된 성도, 참된 교회, 참된 선교가 무엇인가?'에 대한 중요한 핵심인 '성육신'을 지적하고, 정리해 주고 있다. 성육신적 교회는 바로 우리 몸 안에 임하신 성령, 우리 교회 안에 성령이 임하심은, 우리의 몸과 교회가 성령의 성육신임을 가르쳐 주고 있는 것이다. 참된 영적 삶과 영적인 교회가 무엇인지 알기를 원한다면 본서를 필독할 것을 권한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