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개

데이비드 웬햄(David Wenham) 의 고전인 <바울: 예수의 추종자인가, 기독교의 창시자인가(Paul : follower of Jesus or founder of Christianity)?>는, 바울과 예수가 실제로 만난 적 없지만 그 둘이 서로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가 유사하다는 점을 통해 바울이 예수의 추종자라는 결론을 내린다. 하지만 정말로 과연 그러할까?

제임스 D. 테이보(James D. Tabor)는 기독교계에서 논쟁적인 학자다. 그가 이전에 쓴 <예수 왕조(The Jesus Dynasty)>는 수많은 기독교 신학자들에게서 비판을 받고 있다. 그가 말하는 왕조란 실상 예수와 가까운 자들로 이루어진 기독교 공동체를 의미하지만, 식상한 몇몇 이론들(예를 들면 예수의 실제 아버지가 로마 군인이라는 켈수스의 이론을 수용하는 등)로 전체적으로 평가 절하되고 있다.

그러나 <예수 왕조>는 다수의 종교학자들에게 호평을 받았으며, 테이보 역시 고고학적 발굴에 참여하거나 다큐멘터리 고문으로 활동하는 노스캐롤라이나 종교학과 교수이다. <예수 왕조>에서 암시했던 바울과 예수의 괴리감을, 그는 본서 에서 본격적으로 보여 준다(그는 시카고대학에서 기독교의 기원과 고대 유대교에 대해 다룬 논문을 통해 박사학위를 받았다).

요약

우리에게 바울은 어떤 존재인가? 테이보에 의하면, 현재 우리가 마주하고 있는 기독교는 바울에 의해 형성된 것이다. 그러나 진짜 바울은 누구인가? 저자는 본서가 "바울은 예수를 만나지 않았다"는 이 네 마디에 대한 설명이라고 말한다. 테이보에게 있어 바울은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이 세운 최초의 기독교가 아닌, '두 번째 기독교의 설립자'이다. 일종의 스포일러 같지만, 이를 미리 이야기하는 것이 독자들이 더욱 쉽게 이 책(의 서평)을 이해할 수 있도록 도울 것이다.

이 책은 순서가 있다. 우선 저자는 바울 이전의 기독교를 추적한다. 곧 예수의 기독교이자 그의 후계자인 예루살렘 사도들, 특히 야고보의 기독교를 바울 이전의 기독교로 부른다(기독교라는 용어 자체는 바울이 고안해 낸 것으로 시대착오적이지만, 부득이하게 사용한다고 저자는 말한다). '예수의 진짜 제자들'이란 예수의 생애 동안 예수가 직접 선택한 제자들이다.

그들이 공유하는 가르침은 소위 Q 자료에 가장 잘 나타난다. 예수의 어록이 야고보서에 거의 나타나지만(눅 6:30과 약 2:5, 마 5:19와 약 2:10, 마 7:21과 약 1:22, 마 7:11과 약 1:17, 눅 6:24와 약 5:1, 마 5:34, 37과 약 5:12 등), 바울서신에는 나타나지 않는다(후에 다루겠지만, 유일한 것이 성찬 전승인데 이것도 바울의 사상이 오히려 마가에 반영되고, 그 마가의 자료를 누가와 마태가 가져다 쓴 것이라고 저자는 주장한다).

그렇다면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이 바울과는 판이하게 달랐는가? 바꿔 말하자면, 바울만 독특한 교리를 주장하는가? 저자는 이를 하나씩 살핀다.

죽은 자의 부활은 바울의 주요 개념이다. 당대 유대교는 '소생'과 '부활'을 구분했다. 소생은 히브리 정경과 신약(복음서와 사도행전)에도 등장하는, 다시 죽을 운명에 처하는 기적일 뿐이다. 하지만 부활은 곧 죽은 자가 '마지막 날'에 다시 살아날 것'이라는 사상이었다. 그러나 부활은 단순히 내세의 삶도 아니고, 이전의 몸을 그대로 입는 것이 아니라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을 의미했다.

바울이 주장한 부활은 거기에 더해 '존재 양식의 변화'였다. 바울은 피와 살을 지닌 '육체'를 다시 입는 부활을 생각한 적이 없다. 바울에게 있어 그것은 소생이다. 예수의 부활체는 엄밀히 말해 물질적 육체가 아니라 영적 몸, 즉 살려 주는 영(Living-Spirit)이다. 바울이 부활한 예수를 '보았다'는 것도 역시 이러한 영이신 예수에 대한 신비적 체험이었다. 즉 저자에 의하면 예수가 이전의 육체를 입고 부활한 것이 아니라, 비록 그의 시체는 사라졌으나 그는 '영'이 되었다는 것이 곧 바울이 주장한 예수의 부활이다.

예수 현현은 사실 바울과 그의 측근(마가와 누가)을 통해 최초로 유포됐지만, 각자의 신학에 맞게 개작돼 예루살렘 현현 전승과 갈릴리 현현 전승으로 구분됐다(그 둘은 조화될 수 없다). 바울은 누구보다 이 예수 현현 체험을 강조하는데, 거기에는 예수의 부활에 대한 바울의 독특한 사상뿐 아니라 바울 스스로에 대한 인식도 한몫한다.

바울은 예루살렘 사도들과 달리 예수를 직접 만난 적이 없다. 그러나 바울은 스스로를 예수에게서 '직접' 계시를 받은 존재로 여겼고, 다른 사도들은 예수가 지상을 생활하는 동안 선택받았지만 자신은 태어나기 전부터 선택받았다고 믿었다. 바울의 이러한 운명론은 예정론으로 흔히 오해되지만, 바울은 자신을 모세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했으며, 그리스도를 여호와라고 믿었다.

바울이 아라비아에서 3년간 무엇을 체험했는지 알 수 없지만, 그것은 바울 스스로를 모세와 엘리야와 연결시키는 데 큰 역할을 감당했다. 즉 바울은 자신을 모세, 엘리야와 같이 여호와(천상의 그리스도)와 특별한 관계를 지닌 이스라엘의 위대한 선지자로 자각했던 것이다.

심지어 바울은 예수가 이루지 못했던 일들이 자기에게 맡겨졌다고까지 믿었다. 왜냐하면 예수는 이방인까지 순종시켜야 했지만 그렇지 못했기에, 그 과업을 자신이 이루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자신의 운명도 선지자가 예언했다고 생각했다. 이것이 바로 바울 예정론의 실체이다.

그렇다면 바울이 받은 구체적인 '비밀' 혹은 '복음'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우주적 가족과 하늘 왕국이다. 이것은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이 선포했던 것과 다르다. 그들은 이 땅에 이루어질 하나님나라를 선포했지만, 바울은 천상의 그리스도(땅의 예수가 아닌)를 선포했다. 바울이 사는 세계는 계몽주의 시대 이전으로 마법이나 유령 등 미신으로 보이는 세계를 그대로 믿었다.

바울은 실제로 악령이 활동하며 위계를 갖는다고 믿었고, 하나님의 자녀가 새롭게 태어나 이 세계에서 구출받아 이 세계를 구출하기 위해 우주적 가족을 이룬다는 것은 그에게 비유가 아닌 실제였다. 바울이 말하는 칭의란 하나님이 누군가를 선택하셔서 예수의 죽음을 통해 그를 죄와 죽음에서 건져 주시는 것이고, 성화는 영이신 예수를 통해 영적 몸을 가진 존재가 되는 것이며, 영화는 완전한 우주적 천상 가족의 완성이었다. 즉 모두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고후 1:21-22 참조)이 구원이다. 예수는 하늘에서 이루어진 것 같이 '땅에서도'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왕국을 말했지만, 바울은 그것과는 완전히 달리 살과 피를 지닌 육체는 상속조차 받을 수 없는 '천상의 왕국'을 주장했다.

따라서 바울이 말하는 '그리스도와의 연합'도 역시 비유가 아니라 실제였다. 그가 말하는 세례는 세례 요한이나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이 주장했던 회개의 세례가 아닌,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신비 의식이었다. 그리스도 '안'에 있다는 말은 단순히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부활하여 살려 주는 '영'이 된 그리스도와 하나가 된다는 것이며, 겉으로 보이진 않지만 내적으로 분명한 변화를 겪는 어떤 의식이다.

그 변화의 증거로 엑스터시적 현상들(은사, 대표적으로 배우지 않은 언어, 즉 방언을 하는 것)이 수반된다는 것을 사도행전은 보여 준다. 이는 심지어 죽은 자에게도 효력이 있는 것이었다(고전 15:29 참조). 더욱이 세례식 때는 반드시 '마라나타', '아바', '아멘' 등의 주술적인 언어(그것도 아람어)가 수반되었기에, 헬라어를 사용한 개종자들에게 그것들은 더욱 마술적 용어로 들렸을 것이다.

성찬도 마찬가지다. 빵과 포도주를 예수의 살과 피와 동일시하는 것은, 피를 금하고 신을 거룩한 존재로 여겨 쳐다보지도 못하는 유대인들에게는 상상치 못할 혐오스러운 것이었다. 다만 예수는 실제로 유월절 식사를 했을 것이고, 당대에는 '메시아 축제'라고 하여 메시아 시대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빵과 포도주를 즐기리라는 종말론적 사상이 유행했었다.

바울은 이에 착안하여, 그리고 자신의 그리스-로마 사회에서 이방인들을 대상으로 한 선교 가운데 들었을 신식(theophagy)을 혼합하여, 예수의 살과 피를 먹고 마심으로써 그가 천상의 그리스도께 직접 받은 그 '비밀' 혹은 '복음'을 더욱 분명하게 만드는 의식을 개발한 것이다.

나아가 바울은 이미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였기에, 그를 본받으라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그의 이런 선언은 단순한 도덕적 모범을 따르라는 것이 아니라, 실제 문자적으로 자신처럼 그리스도와 연합하라는 뜻이었다. 테이보는 너무도 마술적으로 들리더라도 그것이 바울이 살던 세계였고, 바울은 그만큼 자의식이 강했고 신비적 체험에 사로잡혀 있었음을 강조한다.

한편 바울은 급진적 종말론자였다. 바울은 예수가 자신이 살아 있을 때 다시 올 것이라 믿었다. 예수의 가르침만큼이나 바울의 가르침도 급진적인 이유는, 둘 다 급진적 종말론자였기 때문이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다'는 말과 '종도 없고 자유자도 없다'는 그의 주장은 여기서 기인한다.

다만 그는 유대인의 토라를 버리고 이방인처럼 그저 양심에 근거한 자연법만 추구할 수는 없었기에,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개념을 또다시 고안해낸다. 비록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은 유대교의 율법을 결코 버린 적이 없고, 예수는 율법은 일점일획도 없어지지 않고 자신은 율법을 완성하러 왔다고 말했으나, 바울은 모세의 율법을 버렸다. 저자의 표현에 따르자면, "바울이 가르치는 바가 함축하는 것은, 유대교의 종말 외에 다른 것이 아니다."

바울이 말한 '그리스도의 율법'이란 어떤 특정한 것을 하거나 혹은 금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성령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것은 유대교의 두 충동, 악한 충동(예체르 라아)와 선한 충동(예체르 토브) 간의 갈등과 다르다. 바울의 신비 체험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이처럼 독특한 바울의 사상들은 유대교와 매우 가까운 혹은 그 연장선상 내지 그 갱신에 있었던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의 가르침과는 너무도 대조적이다. 실제 우리는 놓치는 것이 있는데, 바울이 '개들'이라 칭한 '광명의 천사로 가장한' '거짓 사도들', '사탄의 아들들', '저주받을 자들'은 바로 이 베드로와 야고보를 포함한 예루살렘 사도들이었다! 야고보 및 다른 예수의 제자들, 심지어 예수까지도 토라와 그들의 선조들의 신앙에 열심이었으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고, 그 다툼은 갈라디아서에 명시적으로 그리고 고린도 서신 및 기타 편지들에서 나타난다.

바울이 자신의 편지에서 사도권을 그토록 주장하는 이유는 예루살렘 사도들의 불인정에서 오는 것이며, 사도행전의 '사도' 호칭도 역시 누가가 임의로 붙인 것일 뿐, 실제 베드로가 설교한 사도의 자질에 바울(그리고 명분상 바나바)은 부합되지 않았다. 그래서 바울은 그것보다 '더' 위대한 자질들(자신의 운명에 대한 히브리 정경의 예언, 여러 번에 걸친 신비적 체험을 통한 천상의 그리스도의 직접적 계시 등)을 반복하는 것이다. 이미 오래 전 F. C. 바우르 역시 고린도후서 10-13장에 나타나는 바울의 반대자들이 야고보, 베드로 및 예루살렘 사도들이라 주장했으며, 테이보 역시 그것에 적극적으로 동의한다.

그렇다면 왜 이토록 독단적이고 예수의 가르침과는 먼 바울의 '두 번째 기독교'가 승리하게 되었을까? 저자는 이 물음에 두 가지 답변을 우리에게 준다. 첫째, 바울이 선교했던 지역은 로마의 중심 도시들로, 이방 기독교인들이 특히 많았던 곳이었다. 둘째, 베스파시아누스와 하드리아누스 황제의 두 차례에 걸친 갈릴리, 유대, 예루살렘 정복 혹은 파괴는, 필연적으로 모든 유대교의 영역을 약화시켰다.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을 올바로 계승한 몇 안 되는 계파 중 하나가 에비온파 기독교였는데, 이는 바울의 기독교 정통에 의해 이단시되었다.

평가

바울 연구에 있어 이보다 더 도발적인 책이 있을까? 우리가 알던 기존의 바울상과 초기 기독교 세계를 꽤나 단순하게, 그러나 너무도 색다르게 보게 한다. 테이보의 가장 큰 특징은 당대의 문서를 그대로 읽어낸다는 점이다. 기독교 정경 외에도 외경들과 교부 문헌들을 오가면서, 그는 공평하게 거기에서 공유되는 정보 내지는 사상을 끌어낸다.

바울을 신비주의자로 보며 또한 예수 및 예루살렘 사도들과 단절된 존재로 보는 것이 테이보가 처음은 아니다. 슈트라우스, F. C. 바우르, 브레데, 심지어 프리드리히 니체 등 바울을 본래의 예수와 구별했던 이들은 이전에도 많았다. 그러나 이들이 주장한 바는 모두 사해사본 발견 이전의 것이며, 신약 연구방법론에 있어서도 다소 구시대적이다. 그러나 테이보는 그 모든 연구를 섭렵하고 오늘날의 현대 신학자들과 대화하며 이 논지를 전개했다. 논쟁적 부분들에 대해 단정적으로 말하는 글쓰기 때문에 개론적 지식이 없는 독자들에게는 다소 여과 없이 들릴 수 있는 문장들이 있지만, 전체적으로 논리는 탄탄하다.

보수적인 신앙을 가진 이들에게 이러한 책을 소개하는 이유를 간략하게 말해 주고 싶다. 신학 연구는 객관적으로 진행돼야 한다. 학술 서적이란 또는 학문적 글이란 신앙을 개입시키지 않고 최대한 중립적으로 진술해야 하며, 가장 개연성 있는 주장을 논리적으로 펼쳐야 한다. 테이보의 글은 국내 많은 독자에게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하지만 사실 그렇게 새로운 것도 아니다. 그에 앞서 이미 주장되었던 논증들에 힘을 싣고 단순화했을 뿐이다. 한국 출판계가 다양한 흐름의 신학서적을 금서 목록 취급하지 말고, 더욱더 많은 연구를 소개하며 토론하고 서로의 다름을 인정하는 가운데 성숙해 가길 바란다.

바울은 예수를 만나지 못했다. 그리고 바울은 예수와 예루살렘 사도들과 상당히 다른 주장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다. 결국 모두가 하나의 소망을 향해갈 뿐이다.

/진규선 목사(번역가, 서평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