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루터의 찬송가

마르틴 루터는 1483년 독일의 작센안할트 주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교회 성가대에서 노래하였으며, 거리에서 노래를 부르며 모금을 하여 학비를 보충하였다. 그러다 귀족 부인인 우슐나 부인이 그의 음악적 재능을 눈여겨 보고 그를 측은히 여겨, 수양아들로 3년동안 데려다 키우며 음악을 가르치고 대학까지 보내주었다. 그래서 루터는 성악에도 뛰어났으며, 류트를 비롯한 여러 악기들을 다룰 줄 알았다.

또한 화성법과 대위법에 대한 약간의 기술이 있어 다성음악을 작곡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고, 실제로 몇 곡을 작곡하였다. 그는 하나님께 나아가는 요소로서 음악의 힘을 인정했을 뿐 아니라, 음악의 교육적이며 도덕적인 힘도 굳게 믿고 있었다.

여러 종교개혁자들 가운데 루터가 독보적인 인물이었다는 점은 그의 음악관에서도 명료하게 드러난다. 루터는 음악에 대해 신앙을 지키고 영혼을 맑게 하는 하나님의 가장 큰 선물이라고 생각했다. "음악은 나를 자주 소생시켜 주고 무거운 짐으로부터 해방시켜 준다"는 말로 음악의 영적인 힘을 옹호했다. 하지만 그와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음악을 멸시하고, 교회에서 가장 중요한 악기인 오르간을 '마귀의 유산'이라고 부르며 없애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런 사람들에게 루터는 "음악은 하나님의 선물이요 축복이다. 음악은 또한 마귀를 몰아내 주고 사람들을 행복하게 만든다. 음악은 사람의 모든 분노, 음란, 교만, 그리고 모든 악을 잊게 해준다"고 역설했다.

"하나님의 말씀 다음으로 음악은 가장 높은 칭송을 받을만한 가치가 있다. 음악은 인간 감정의 주인이며 지배자이다. ... 음악은 인간을 조정하고 또한 자주 그들을 압도한다. ... 슬픈 자에게 평안을, 경솔한 자에게 자제를, 절망한 자에게 용기를, 교만한 자에게 겸손을, 흥분되어 있는 자에게 차분함을, 미움으로 가득 차 있는 자에게 유화(宥和)한 마음을 주는 데 음악보다 더 효과적인 방법이 어디 있겠는가?"

사제가 된 마르틴 루터는 시편 성경을 독일어로 번역하게 된다. 루터의 독일어 성경 번역은 1534년 간행되는데, 이후 독일 문학의 금자탑이 되었다. 이후 루터의 번역에 영향을 입은 많은 사람들이 성경 원문에서 자국어로 성경을 번역하게 된다,

이런 성경 번역에서 영감을 받아 시편 46편을 기초로 작사 작곡한 '내 주는 강한 성'은, 대부분 단조 가락이 많던 시절에 강한 장조로 승리를 주시는 주님께 대한 믿음을 확신 속에 노래하고 있다. 이 찬송은 1517년, 비텐베르크 교회 대문에 로마가톨릭교회의 부패와 타락을 비판하는 95개조 반박문을 발표함으로써 종교개혁의 깃발을 올렸던 때 지은 것으로, 수많은 '시편 명상'은 그의 신학과 삶의 그루터기가 되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

루터가 1524년 펴낸 찬송가(왼쪽)와 클로크가 1529년 개편한 찬송가. 여기에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돼 있다.
루터가 1524년 펴낸 찬송가(왼쪽)와 클로크가 1529년 개편한 찬송가. 여기에는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돼 있다.

2. 개신교 찬송가의 시조 루터

루터의 찬송가는 그의 절친한 친구로서 당대에 유명한 음악가인 요한 발터(Johann Walther, 1496-1570)와 루프(Konrad Ruoff) 등 지지자의 도움으로 출판되었다.

루터의 첫 찬송가 <새로운 영적 찬송가(Neue geistlich Gesänge, 1523)>는 4부로 되어 있는데, 현대의 악보와 같이 통합된 피아노 보표는 아니다. 루터가 만든 4부 찬송가는 각 성부가 따로 묶여 있기 때문에 각 권은 각각 해당 성부를 부르는 사람이나 그룹에 의해서 사용되었다. 쉽게 말해 '파트별 찬송가'라 하겠다.

루터의 둘째 찬송가는 <몇 편의 그리스도교 노래(Etlich Christriche Lieder, 1524)>인데, 흔히 <성가 8곡집(Achtliederbuch)>으로 불린다. 여기에는 루터가 지은 찬송 4편을 포함해 8편의 코랄이 들어 있다.

루터의 셋째 찬송가는 <영적 찬송가(Enchiridion geistlicher Gesenge, 1529)인데, 여기에는 26편의 코랄이 들어 있으며 가정이나 교회에서 쉽게 사용하도록 만든 회중 찬송가로서 단선율의 곡조 찬송가이다.

또한 루터를 도왔던 발터는 <신령한노래(Geistliches Gesangbuchlein, 1524)>라는 작은 찬송가 모음을 냈는데, 30곡 중 23곡이 루터가 작곡한 것이다. 이 책은 흔히 <비텐베르크 찬송가(Wittenberg Gesangbuchlein)>라고 불린다. 이는 찬양대를 위한 다성부 코랄집으로, 플랑드르 악파의 모테트 양식으로 편곡되었고, 주된 가락은 테너 성부에 있다.

클루크(Joseph Klug)도 루터의 공인하에 50곡을 담은 <개편 찬송가(Geistliche Lieder auf gebessert, 1529)>를 출판하였는데, 앞서 나온 찬송가들보다 많이 불려졌다. 여기에는 그 유명한 '내 주는 강한 성이요'가 수록되어 있다.

마지막으로 루터의 손을 거쳐 출판된 찬송가는 에는 120편의 찬송 가사와 97편의 곡조가 들어 있는데, 루터의 찬송이 28곡 수록되어 있다.

마르틴 루터는 신학자이자 음악가였다. 루터는 찬송을 철저히 복음과 연관지었다. 그래서 후대 사람들은 그를 '복음 찬송의 시조'라고 일컫는다. 오늘날 복음주의 찬송은 종교개혁을 주도했던 루터에게서 시작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써 구원을 얻는다는 성경의 진리'에서 비롯된 찬송이라 말할 수 있다.

3. 개혁자들의 두가지 개혁운동

종교개혁(Reformation)은 '교회다움'이라는 개혁운동이었다. 그 개혁운동은 위클리프, 후스 등 전(前) 종교개혁자들의 개혁은 별 성과를 보지 못한 채 루터에게 이어져 왔다. 루터의 말씀을 중심한 종교개혁과 찬송을 통한 음악개혁은 독보적이라 할 수 있다.

루터가 가진 두 가지 개혁운동의 축 가운데 하나는 말씀으로 돌아가는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아주 단순하고도 당연한 말이지만, 당시로서는 엄청난 주장이었고 그것은 교회개혁의 본질이었다.

또 하나의 축은 '음악' 개혁이었다. 루터에게는 '음악'이라는 새로운 병기가 있었다. 루터에게서 음악은 '생존'을 위한 위로를 넘어, 확신하는 믿음 가운데 그를 충만하게 이끌었다.

이러한 두 가지 개혁운동은 여러 면에서 교회의 변혁을 요구하고 있었다. 루터의 종교개혁이 시작된 다음 해인 1517년, 스위스의 종교 및 정치개혁을 주도한 울리히 츠빙글리(1484-1531)도 상당한 수준의 음악교육을 받았고 특히 악기를 다루는 데 재능이 있었지만, 어떤 식으로든 예배에 음악이 강조되지 않도록 했다.

스위스 독일어 사용권에서 일어난 츠빙글리의 개혁은 프랑스어권인 제네바에서 칼빈에 의하여 강력하게 추진되는데, 기존 교회 전통에 대한 칼빈의 깊은 불신은 예배에서 가톨릭의 전례는 물론이고 문화, 예술 등 사람들의 주의를 산만하게 할 가공적인 그 어느 것도 허락하질 않았다.

스위스의 츠빙글리도 목사인 동시에 음악적 재능을 인정받던 사람이었으며, 프랑스의 신학자 칼빈도 앞의 두 사람 못지 않게 교회음악에 대한 관심과 업적을 남긴 사람이었다.

이러한 음악에 대한 관심과 함께, 전문가에 비견되는 그들이 한 목소리로 교회음악의 개혁을 주창한 핵심은 바로 기존의 예배 흐름을 방해하는 음악을 버리자는 것이었다. 종교개혁자들은 교리적 문제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종교적 부패의 사슬을 끊어야 하며, 거기에는 음악적 타락도 포함된다는 점과 교회음악이 개혁되어야 한다는 점을 공통적으로 인식하고 있었다.

특히 사제만이 아닌 모든 회중이 주님의 은총을 직접 맛보는 예배가 중요한 주제로 대두되었는데, 이것은 당연히 당시 교회 음악에 대해서도 개혁하려는 노력을 가져왔다. 지금 우리가 교회에서 부르고 있는, 찬송가(Hymn)로 알고 있는 찬송은 루터와 츠빙글리, 그리고 칼빈 등 종교개혁의 결과로 성립된 개신교(Protestant Church)의 탄생과 함께 시작되었다.

4. 종교개혁에서 음악개혁으로

마르틴 루터는 종교개혁뿐 아니라 교회 음악개혁도 성취한 인물이며, 그의 종교개혁은 찬송으로 이뤄졌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처럼 종교개혁은 교회 음악의 모습도 바꾸어 놓았다. 종교개혁 전까지 교회의 모든 의식은 라틴어로 진행됐고, 성가도 모두 라틴어로 불렸다. 루터는 예배에서 일반 신도들이 이해할 수 없는 라틴어를 사용하는 것이 부당하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종교개혁 이후 교회에서 자기 나라 언어인 독일어 사용을 권장했다.

종교개혁을 통해 새롭게 탄생한 교회 음악 양식은 오늘날 찬송가에 해당되는 코랄(chorale)이다. 전까지 예배의식은 모두 라틴어로 진행되었으며, 노래는 성가대만 불렀다. 교인들은 그냥 자리에 앉아 성가대들이 부르는 노래를 '감상'하기만 했지, 직접 교회음악에 참여하지 않았다. 부르는 것이 허용되었다 해도 아마 한정된 사람만이 부를 수 있었을 것이다. 왜냐하면 노래가 너무 어려워 전문적인 훈련을 받아야만 부를 수 있기 때문이다.

루터는 일반 교인들도 음악에 참여하기를 원했다. 그래서 코랄이라는 새로운 양식을 창안하게 되었다. 루터는 사람을 움직이는 성가의 능력을 믿었다. 성가는 성경과 같은 것이기 때문에, 부지런히 가르치고 배워야 한다고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루터가 창안한 개신교회의 '코랄'은 음악을 통해 교인들이 직접 예배에 참여하기를 원했던 루터의 의지가 반영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루터나 칼빈, 그리고 츠빙글리 모두 다성부 음악의 화려한 부산물들을 과감히 교회 밖으로 던져 버리고, 경건히 그레고리오 성가를 부르듯 단선율에 가사를 실어 찬송하게 했다. 그들은 코랄이라는 형식을 통해 처음으로 교회 음악의 대중화를 실현했다. 그동안 예배 의식에서 소외되었던 교인들을 예배 찬송으로 끌어들인 것이다.

이렇듯 종교개혁자들은 교회음악을 정비하였다. 화려하면서도 장식적이고, 웅장하면서도 복잡했던 음악들을 그레고리오 성가처럼 군더더기 없이 깔끔한 단선율 찬송으로 정리했다. 음악적으로 본다면 시대를 거슬러 올라가 몇 백년, 아니 아예 처음의 상태로 되돌리는 결과 같았지만, 종교개혁의 정신이 그렇듯이 잘못된 것을 한 번에 개혁할 수 있는 방법을 버리고 처음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곧 교회다움과 예배의 회복인 것이다.

루터와 그의 동료들은 교회력에 맞추어 모든 주일에 부를 수 있는 코랄을 만들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코랄이라는 양식을 창안한 후 20년 동안 찬송 117편이 수록된 찬송가를 발행해 보급했다.

종교개혁 이후 마르틴 루터가 만든 독일 코랄(Chorale)이 지금 우리가 부르고 있는 찬송가의 효시가 된다. 코랄은 현대어로 번역하면 '찬송가'가 된다. 현대의 찬송가는 모두 4성부로 이루어져 있지만, 최초의 코랄은 화음도 없고 반주도 없이 제창으로 불리는 단순한 노래였다. 하지만 화성과 대위법을 통해 얼마든지 큰 형식으로 발전할 가능성을 가지고 있었다.

이효상 목사(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이효상 목사(미래목회포럼 사무총장).

종교개혁 이후 교회음악사는 찬송가의 역사로 이어진다. 그러나 서양 음악사의 역사는 바로크 음악, 고전 음악, 낭만 음악, 근대 음악, 그리고 현대 음악으로 이어진다.

종교개혁 이후 찬송가는 교회음악의 전부이며, 교회음악사의 중심적 흐름이다. 안타까운 것은 종교개혁 이후 교회 음악이 찬송가 외에 특별한 음악 양식을 생산하지 못했다는 점이다. 그러나 서양 음악은 오페라, 합주곡, 교향곡 등 수많은 음악 양식을 생산하며 음악계를 주도하고 있다.

루터의 의해 기초가 세워진 개신교회음악은 바흐에 의해 그 화려한 꽃을 피웠다. 특히 바흐는 코랄을 기반으로 코랄 전주곡, 코랄 환상곡 등 다양한 형태의 음악을 발전시켰는데, 이는 루터가 없었다면 이룰 수 없었던 음악적 성과였다.

루터는 모든 회중이 함께 찬송 드리기를 원했다. 이런 토양에서 '코랄'이 나오고 하인리히 쉬츠나 요한 세바스찬 바하, 펠릭스 멘델스존, 요하네스 브람스가 배출될 수 있었다.

/이효상 사무총장(미래목회포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