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언과 분별

월터 모벌리 | 새물결플러스 | 648쪽 | 22,000원

누구를 신뢰할 것인가?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예전에 언뜻 한국에 5만의 교회가 있다고 들었던 적이 있다. 지금은 얼마나 되는지 잘 모른다. 매 주일마다 5만 편 이상의 설교가 행해지고 있다고 가정해 볼 수 있다. 좁디 좁은 이 땅에,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지금의 시대와 사람들, 심지어 성도들조차 목회자에 대한 신뢰도는 다른 분야의 지도자나 타종교 지도자 보다 낮다. 심각한 문제의 끝자락에 와 있음에도, 정작 목회자들은 성도들의 섬김과 순종의 겉모습만 보고 안일함에 빠져 있는 것 같다.  

다만 목회자들이 느끼는 것은 자신의 교회 밖에서 벌어지고 있는 성경공부와 다른 교회에서 행해지고 있는 좋은 프로그램들 때문에, 자신의 교회 성도들이 빠져 나갈까봐 긴장감을 느끼고 있는 것 정도다.

그러나 성도들의 입장은 조금 다르다. 그동안 목사님의 가르침을 신뢰해 왔고 따라 왔다. 그런데 목회자들이 말하는 소위 '시험'에 빠지는 것이다. 그 시험에 빠지게 한 대상이 바로 목회자일 때, '믿음이 약해서'라고만 치부하고 끝낼 것인가?

지금 성도들은 '신뢰할 사람'을 찾고 있다. 물론 하나님을 신뢰해야 한다. 그러나 '누구의 말을 신뢰해야 하는가?'는 현실에서 그렇게 단순하지 않다. 그냥 종교생활 안에서 자기 만족을 하고 있는 사람이 아닌 진정으로 하나님을 만나고 진실된 믿음 생활을 하고자 하는 성도들이나, 자신의 문제들을 진정 하나님의 방법으로 응답받고 해결하고자 하는 성도들은 조용히 신뢰할 만한 자들을 찾고 있다(물론 자기 상처로 인해 유리방황하는 자들도 있지만, 조용히 교회 안에 머물고 있으면서 풀리지 않는 문제들에 대해 신뢰할 만한 자들을 찾고 있는 자들을 말한다).

본서의 제목이 '예언과 분별'이지만, 주제는 바로 '누구를 신뢰해야 하는가?'이다. 수많은 설교와 가르침들이 교회들 안에 있지만, 지금의 교회를 조금 극단적으로 표현하자면 '똑똑한 목회자는 많지만, 신뢰할 만한 목회자가 없다'고 할 수 있다.  

예레미야

본서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참 예언과 거짓 예언을 구별하는 작업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구별의 기준을 예레미야 선지자를 중심으로 한다. 그 이유에 대해 저자는 첫째로 그동안 성경신학에서 해 왔던 본문의 구조와 특징을 중심으로 각각의 예언들을 살피는 것은 구태의연한 방식으로서 예언의 다양성을 담아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둘째는 모든 선지자들이 외치고 있는 '돌아옴'의 메시지로 분별하는 것은, 이기적 목적을 가진 선지자들 또한 자신의 이기적 목적을 위해 얼마든지 종교심을 자극한 '돌아옴'을 외침으로서 '위장'과 '거짓'의 훌륭한 도구로 사용될 수 있기 때문에, '돌아옴'을 분별의 기준으로 삼는 것은 적절치 않다고 보고 있다.

예레미야를 분별의 기준으로 삼은 세 번째 이유는 예레미야가 성전에서 예언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저자는 성전의 가치를 배제하거나 무시하려는 의도가 아니라, 구약과 신약의 역사 모두 성전 중심의 메시지들에서 심각한 오류들이 반복되어 등장하고 있고, 성전은 매우 중요한 기독교의 요소인 반면 예언과 메시지를 왜곡시킬 수 있는 매우 유용한 도구로 전락할 수 있기 때문에, 성전과 다소 격리되어 있는 예레미야를 분별의 기준으로 삼았다고 밝힌다.

마지막으로 예언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드러내기 위해 예레미야를 분별의 기준으로 정립했다. 분명 예레미야는 선지자로서 초월성(신비성)이 나타나지만, 동일한 대선지서(이사야, 다니엘 등)에 비해 역사성이 잘 드러나 있다. 선지자 개인의 메시지가 아니라, 역사의 현장 속에서 반응하는 예언이 상대적으로 잘 소개되고 있기 때문에 저자는 예언의 역사성을 강조하고, 그에 따른 예언자의 도덕성(진실성)을 분별의 기준으로 세우기 위함으로 보인다.

분별의 주제들

본서는 이믈라의 아들 미가야, 엘리사와 발람, 사도 요한, 사도 바울, 이렇게 4명의 인물을 대상으로 '참 선지자와 거짓 선지자들을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에 대해 풀어간다. 각각의 내용들은 현장의 목회자들이 직면해야 할 중요한 주제들을 다루고 있다. 허투루 다루는 것이 아니라 매우 신중하고 밀도 있게 다루어줌으로써 실제 목회자들이 이러한 부분에서 부주의하게 해서는 안 되며, 나오는 주제들에 대해 스스로 신중에 신중을 다해야 함을 말한다.

사실 모든 사람들이 자기중심적이라는 것을 안다. 목회자도 예외가 아니다. 필자도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서 과거에는 스스로 '거짓 목회자'라고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목회자로서 살아 왔지만, 현재는 시시때때로 나 자신이 거짓 목회자일수도 있고, 그렇게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면서 스스로 주님 앞에 점검하고 점검받는 시간들을 지속하고 있다.

본서에 나오는 거짓 예언자들의 모습은 매우 일상적임을 발견할 수 있다. 본서를 자세히 읽어보기를 권면하면서 간단하게 소개한다면, 미가야 선지자 이야기를 통해 아합왕의 무시무시한 권력 앞에 미움을 받아 초라하게 보이는 한 선지자 미가야는, 현실의 두려움에 굴복하여 자신의 메시지를 변경하거나 바꾸지 않는다.

엘리사와 발람의 비교는 영적인 눈이 밝아짐과 어두워짐의 기준은 선지자의 신실한 마음과 하나님을 향한 태도 즉,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을 만나고 좇아가는 선지자와 자신의 이익을 챙기기 위해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고 찾는 선지자를 대조함으로써 하나님을 만나고, 그 음성을 듣는 것보다 그것을 대하는 태도와 목적의 중요성을 이야기한다.

사도 요한은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메시지 선포, 즉 말과 입으로만 사랑하는 자와 그 사랑을 실천함으로 성육신된 사랑을 실천해 내는 자, 바울은 십자가를 본받는 삶과 십자가를 이용하는 삶의 대조들을 통해, 참 예언과 거짓 예언자들을 분별하고 있다.  

본서에 약간 아쉬운 점에는, 현재 기독교의 아쉬움이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첫째, 본서가 논문들을 모아 편집됐다고 느껴지는 부분이라 충분히 이해 되지만, 균형을 잡기 위해 독자들에게 미리 첨언한다면 예언의 분별에 대해 역사성과 도덕성으로 매우 논리적으로 몰고가고 있다는 점이다. 그 논리성과 내용들 모두 필자는 동의하고 있지만, 이것이 예언 분별의 전부라고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고 당부하고 싶다.

둘째, 마지막 7장 '오늘날의 예언과 분별'에서 현재 다뤄야 할 아주 복잡한 신학적 문제들에 대해 문제제기를 하면서, 저자는 기독교가 회색지대의 개방성의 필요를 이야기하고 있음에도 신학적 입장에서만 고려하고 있다는 점이 아쉽다.

예언이란 하나님과 인간의 만남이라고도 볼 수 있다. 그리고 그 예언의 클라이막스는 예수님의 성육신이다. 즉 하나님의 말씀이 인간의 육신으로 나타나심이다. 하나님 편에서만의 예언이 아니라, 인간의 편에서 예언이 함께 만남을 이루어야 진정한 사귐과 교통, 그리고 열매가 맺어진다고 필자는 생각한다.  

양날의 검  

필자는 본서를 읽으면서, 목회자의 한 사람으로써 하나님의 말씀과 메시지는 사도 바울이 말한 것처럼 '양날의 검'이라 생각한다. 양날의 검에 대한 여러가지 해석과 적용이 가능하겠지만, 그 중 하나는 바로 무찔러야 하는 적은 외부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도 있다는 사실이다.

예수님을 영접했다 하여 내 안에 있는 문제들을 덮어둬선 안된다. 현재 기독교 안에 '신뢰할 만한 사람'이 없다는 것은, 모든 메시지의 방향이 외부로만 향하고 있고 자기 자신을 향하고 있지 않다는 방증일 수 있다.  

본서는 메시지의 내용보다는 그 메시지를 전하는 예언자의 진정성을 말하고 있다. 동일한 본문과 메시지 내용이라도 메시지를 전하는 사람과 상황에 따라 하나님의 유익을 위한 메시지가 되기도 하고, 메신저 자신을 위한 메시지가 되기도 하기 때문이다. 이단보다 더 무섭고 악랄한 것이 거짓(똑똑한 자기중심적)선지자이다.  

본서는 다소 부담스러울 수 있지만, 말씀을 전하는 모든 자들이 곁에 두고 읽어야 할 책으로 추천한다.      

/강도헌 목사
크리스찬북뉴스 운영자, 제자삼는교회 담임, 프쉬케치유상담연구원 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