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문으로서의 '신학'과 신앙은 어떤 관계이며, 기독교는 과연 '철학'과 거리가 먼 것일까? 이런 물음들을 가지고 강영안 박사(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 서강대 명예교수)와 마주했다. 벨기에 루뱅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한 그는 암스테르담 자유대학교 대학원에서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철학자이자 기독교인이다. 뜻밖에도(?) 그는 어렸을 때부터 예장 고신측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고, 지금도 고신대가 속한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이다. '고신'이라는 단어가 주는 강한 보수성 때문인지, 그의 이런 이력이 낯설다. 하지만 고신은 마치 향수(鄕愁)처럼 강 박사를 아련하게 만드는 두 글자이기도 하다. 그런 철학자와의 진지했던 대담. 역시 뜻밖에도, 머리가 아닌 가슴이 통했던 2시간이었다. 다음은 추석 명절을 앞두고 만난 그와의 일문일답.

강영안 박사.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인 그는 “고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저 밑바닥 어딘가를 흐르며 지금도 고신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송경호 기자
강영안 박사. 학교법인 고려학원 이사장인 그는 “고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저 밑바닥 어딘가를 흐르며 지금도 고신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는다”고 했다. ⓒ송경호 기자

-박사님께 있어 '고신'은 어떤 교회입니까?

"고신은 개혁신학 전통 위에 서 있는 교회입니다. 그렇기에 신앙뿐 아니라 사회 모든 영역에서 언제나 개혁을 추구해야 할 교회입니다. 흔히 고신을 보수적이라고 합니다. 이 '보수적'이라는 단어에서, 신앙의 보수가 아닌 그저 기존의 것을 고수하는 '사회적 보수'라는 인상을 받습니다. 오늘날 고신이 개혁에 무감각해져 버린 것 같아 안타깝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고신은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고자 하는 의지가 있습니다. 그것이 비록 겉으로 드러나진 않지만, 저 밑바닥 어딘가를 흐르며 지금도 고신을 떠받치고 있다고 믿습니다.

아울러 제가 이사장으로 있는 고신대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고신대는 지금으로부터 70년 전, 한국교회가 일제 신사참배라는 '과거사'로 몸살을 앓고 있던 당시 설립됐습니다. 그 시작은 다름 아닌 회개운동이었습니다. 그러면서 '생활의 순결'과 '신앙의 전통'을 기치로 내걸었습니다. 그리고 이는 '코람데오', 즉 '하나님 앞에서'라는 말로 압축됩니다. 또한 이는, 우리가 예수님을 믿어 의롭게 된, '의인인 동시에 죄인'이라는 고백에 기반하고 있습니다. 비록 고신이 처음의 이 정신을 잊었다 할지라도, 회개하고 다시 실천한다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는 저력이 고신에 있다고 확신합니다."

-소개하고 싶은 '고신의 신앙'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제가 고신에서 배운 귀한 신앙의 전통 중 하나는, '모든 일을 주께 하듯 하라'는 정신입니다. 밥을 먹든, 장사를 하든, 아이를 키우든, 글을 쓰든 무엇을 하든 주께 하듯 하면 그것이 곧 거룩한 하나님의 일이라는 것입니다. 한국교회에 깊이 뿌리박힌 소위 '성속 이원론'은 바로 이러한 정신 앞에서 그 힘을 잃을 것입니다.

교회는 세상으로 나아갈 성도를 키우는 훈련소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오히려 교회가 그들을 교회 안에 가둡니다. 세상을 회복시켜야 할 성도를 교회를 위한 성도로만 머물게 합니다. 마치 한 달란트를 땅에 묻어두듯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그들을 풀어주어야 합니다. 목회자들도 하나님나라의 관점에서 그들과 동역해야 합니다. 이것이 개혁신학의 가장 중요한 면이자 또한 고신의 자랑스러운 전통입니다."

강영안 박사는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지 등 모든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며 “나는 그렇게 묻고 답을 구하면서 결국 자기 인식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했다. ⓒ송경호 기자
강영안 박사는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지 등 모든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한다” 며 “나는 그렇게 묻고 답을 구하면서 결국 자기 인식의 한계를 깨달았다”고 했다. ⓒ송경호 기자

-철학은 기독교와 어떤 관계에 있을까요?

"흔히 기독교 신앙을 철학과 거리가 먼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저는 철학을 처음 공부할 때부터 그것을 기독교와 대립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철학이 기독교 신앙을 가장 잘 표현할 수 있는 학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물론 그 반대로도 작용할 수 있습니다. 철학을 공부하다 신앙을 버린 이도 보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철학은 '양날의 칼'과 같습니다. 하지만 철학은 제 기독교 신앙을 보다 단단하게 했고, 기독교가 가장 합리적이며 체계적이라는 확신을 저로 하여금 갖게 만들었습니다. 저는 철학을 통해 기독교가 인간의 삶을 가장 윤택하게 하는 사상이자 세계관이라는 것을 더욱 분명히 알 수 있었습니다. 저뿐 아닙니다. 저와 같은 기독교인 철학자들이 꽤 많습니다.

철학을 한 마디로 표현한다면, '묻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삶이 무엇인지, 하나님은 어떤 분이신지, 인간은 무엇을 위해 살아가는 지 등 모든 것들에 대해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는 게 철학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그렇게 묻고 답을 구하면서 결국 자기 인식의 한계를 깨달았습니다. 그러고 나니 겸손해질 수 밖에 없었습니다. 어거스틴은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참된 철학자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다.' 바꿔 말하면,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이야말로 참된 철학자입니다. 다시 말하지만, 철학과 기독교는 결코 서로 대립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지만 철학은 '영성'보다는 '지성'의 영역이라 할 수 있지 않나요?

"일단은 머리로 하는 게 사실입니다. 먼저는 알아야 하니까요. 하지만 앎이 모든 걸 지배하진 않습니다. 알고 난 다음에는 그것을 행동으로 옮겨야 합니다. 이를 위해서는 의지가 필요한데, 우리들로 하여금 의지를 불러일으키게 하는 것은 머리가 아닌 가슴입니다. 그러므로 진정한 철학은 단순히 지성에만 머물지 않고 가슴을 통해 손과 발을 움직이게 해야 합니다. 전통적으로도 철학은 이를 지향했습니다. 터툴리안이나 오리게네스, 어거스틴과 같은 기독교 초기 변증가들은 '기독교 신앙이야말로 참된 철학'이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철학은 단순히 지성이나 지식이 아닌, 삶의 체계와 방식입니다.

영성과도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습니다. 그런데 이 '영성'이라는 단어를 좀 짚고 넘어가고 싶습니다. 사실 이 단어는 개신교 신학 용어라고 보기 힘듭니다. 가톨릭에서 쓰던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보다는 경건이라는 표현이 더 맞을 것 같습니다. '지성과 영성'이라는 것도 '학문과 경건' 혹은 '지식과 경건'이라고 하는 게 좋겠습니다. 그리고 이 두 가지는 개혁주의 전통에서 꼭 함께 가야 하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대로 알지 못하고 경건해질 수 없으며, 경건함 없이는 지식도 온전해질 수 없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다원주의 사회 속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야 할까요?

"정치와 경제, 문화 등 삶의 모든 영역에서 다원주의적 사고방식이 확산하고 있습니다. 식생활만 봐도 옛날에는 밥과 된장찌개로 대표되던 밥상이 지금은 빵과 파스타, 초밥 등으로 다양해졌습니다. 사회도 각 구성원들의 개성을 존중하는 공동체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종교도 그렇습니다. 여러가지가 공존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상황에서 기독교인들은 어떻게 살아가야 할까요. 먼저는 우리가 이런 다원적 환경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우리가 해야 할 것은,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한 삶을 살아가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3장 15절, '너희 마음에 그리스도를 주로 삼아 거룩하게 하고...'라는 말씀을 따라서 말입니다.

뿐만 아니라, 그 뒤에 이어지는 '너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에게는 대답할 것을 항상 준비하되 온유와 두려움으로 하고'라는 말씀 역시 기억해야 합니다. 즉 이 다원적인 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믿는 진리가 무엇인지, 그리고 그것이 왜 진리인지를, 그것을 묻는 이들에게 대답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러자면 논리가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믿는 믿음을 논리적으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합니다. 강요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다원적 사회에서 살아가려면 타자에 대한 존중이 필요합니다. 그렇다고 그저 모든 것을 각자의 취향으로 받아들일 수는 없기에, 기독교의 진리를 합리적이고 논리적으로 전해, 절대적 가치 또한 있음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합니다.

'논리'라는 말에 거부감을 갖는 이들도 있을지 모릅니다. 신앙은 논리가 아니라는 생각 때문일 것입니다. 하지만 저는 성령이 사람을 바꿀 때 논리를 무시한다고 생각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그것을 사용하신다고 믿습니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믿는 가운데 그것을 논리적으로 생각하며 읽는다면, 성령은 그것을 따라 우리의 마음을 움직이고 믿음을 더욱 굳건하게 하실 것입니다."

-그렇다면, 동성애에 대해서는 어떻게 보십니까?

"이미 언급했듯 오늘날 다양한 음식들이 있고 저마다 취향을 따라 좋아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그것대로 존중받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모든 게 다 그렇지는 않습니다. 가령 세계관의 경우, 내가 왜 그런 세계관을 선택했는지, 논리적이고 이론적인 근거를 댈 수 있어야 합니다. '그냥 그것이 좋다'는 것은 선택의 이유가 되지 못합니다. 동성애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단순한 취향의 문제일 수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볼 때 다원주의 문화 속에서 사는 기독교인들은 지금까지 해왔던 것보다 훨씬 더 많이 생각하고 더 깊이 따져 물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신앙을 더 확고히 만들어, 우리 속에 있는 소망에 관한 이유를 묻는 자들에게 그것을 설득력 있게 전달해야 할 것입니다.

다만 한 가지 기억해야 할 것은, 베드로 사도의 말씀처럼, 언제나 온유와 두려움을 잃지 않는 태도입니다. 만약 기독교인들이 다른 종교와 사상, 다른 삶의 방식을 무시하고 이런 것들에 배타적인 모습을 보인다면 세상도 우리의 소망에 관해 들으려 하지 않을 것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다는 사실을 결코 잊어선 안 될 것입니다."

-일부 목회자들의 일탈 행위가 알려지면서 윤리와 도덕성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이런 흐림이 자칫 '율법주의'를 부추기지 않을까 하고 염려하는 이들도 있는데요.

"기독교 윤리에 있어서 가장 기본적으로 이해해야 할 것은, 그것이 행위의 문제라기보다 존재의 문제라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행위는 존재를 따른다'는 말을 남겼습니다. 사과나무가 사과를, 감나무가 감을 맺는 이치를 떠올리면 이해가 보다 쉬울 것입니다. 나무가 존재라면 열매는 행위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행위를 해야 할 것인가'를 묻기 전에 '우리는 어떤 존재여야 하는가'를 먼저 물어야 하는 것이지요.

그리고 존재를 결정하는 것은 다름 아닌 '소속'입니다. 에베소서 5장 8절, 곧 '너희가 전에는 어두움이더니 이제는 주 안에서 빛이라 빛의 자녀들처럼 행하라'는 말씀이 이를 여실히 증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기독교 윤리에선, 기독교를 믿는 이가 예수님 안에 있는지 밖에 있는지가 매우 중요한 기준이 됩니다. 예수님 안에서, 빛의 자녀가 된 이는 빛의 열매를 맺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를 거꾸로 보면, 빛의 열매를 맺지 못하는 이는 예수님께 속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하기도 합니다. 예수님께서 '그 열매를 보아 나무를 알 수 있다'고 하신 것처럼 말입니다. 이처럼 존재와 행위는 그야말로 동전의 양면과 같습니다."

강영안 박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도전으로 무신론과 다원주의, 그리고 소비주의를 꼽았다. ⓒ송경호 기자
강영안 박사는 오늘날 한국교회가 직면한 도전으로 무신론과 다원주의, 그리고 소비주의를 꼽았다. ⓒ송경호 기자

-현재 한국교회가 직면한 도전에는 어떤 것들이 있을까요?

"세 가지 심각한 도전에 직면했다고 생각합니다. 그 첫째는 무신론입니다. 현재 교회 밖에서 무신론이 굉장히 그 힘을 키워가고 있습니다. 그 선봉에 리처드 도킨스와 같은 지식인들이 있습니다. 그렇다고 무신론이 지식인들 사이에서만 퍼지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일반 시민들을 대상으로 한 세계운동 차원으로 확산하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이를 교회 밖의 문제로만 취급해선 안 됩니다. 이보다 더 무서운 무신론이 교회 안, 그러니까 믿는 이들 속에 자리 잡고 있기 때문입니다. '입으로는 하나님의 존재를 시인하나 그 행위로는 부인하는 자들'이 바로 교회 안에 있는 무신론자들입니다.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는 이들 중에 실제로는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것이 가장 두렵고 큰 도전입니다.

그 다음은, 앞서 말했던, 다원주의입니다. 믿는 이들이 그리스도의 향기를 내며 꿋꿋하게 살아가기가 정말 쉽지 않은 세상입니다. 모든 것이 상대화 된 곳에서 절대적 진리를 전하고 참된 길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무엇보다 그 동안 기독교인들이 다원주의적 사회에서 복음을 따라 살아가는 법을 제대로 배우지 못했습니다. 이제라도 훈련이 필요합니다.
마지막으로 '소비주의'를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한 마디로 신앙을 소비의 대상으로 본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결국 욕구가 자리 잡고 있습니다. 자본주의를 통해 형성된 삶의 방식이 교회 안에서도 깊숙이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입니다. 말씀이 요구하는 것을 추구하고 따르기보다 오히려 내가 원하는 것을 좇아 교회를 다니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런 신자들의 욕구는 목회자로 하여금 이른바 '고객 중심'의 사고를 하게 만듭니다. 그들이 듣기를 원하는 대로 설교하기 쉽다는 것이지요. 죄를 지적하거나 잘못을 책망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즉, 설교와 교회 공동체를 하나님의 말씀에 입각해 목회자와 신학자가 규정하는 것이 아닌, 욕구에 바탕을 둔 신자들이 규정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소비주의가 지금의 성장주의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도전들을 무엇으로 극복할 수 있을까요. 바로 제자도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그 분의 삶을 따라가는 것입니다. 에베소서 4장 15절, '오직 사랑 안에서 참된 것을 하여 범사에 그에게까지 자랄지라 그는 머리니 곧 그리스도니라'는 말씀이 곧 우리 신앙의 목표가 돼야 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참된 제자들이 되어 이 사회에서 믿음의 본을 보여야 합니다. 이런 믿음과 삶의 통합이 바로 오늘날 한국교회에 주어진 가장 큰 과제라고 생각합니다.

또 각 교단들이 그들의 총회에서 이런 문제들을 다뤄야 할 것입니다. 지금 우리 교단이 처한 신학적·문화적·교회 내적 문제들은 무엇인지, 여러 도전들에 어떻게 응전해야 하는지 등을 심각하게 논의하는 자리가 곧 총회여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지엽적인 문제를 정치화 해 서로 다투고 경쟁하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못합니다.

총회가 총회다운 역할을 하기 위해선 우선 노회와 개교회가 제대로 기능해야 할 것입니다. 하지만 지금은 모든 것들이 총회로 집중되는 듯 한 인상을 지울 수가 없습니다. 소위 말해 '총회중심주의'입니다. 그러니 무엇 하나 제대로 해결하지 못한 채 오히려 교권만을 좇는 이들이 늘어나는 것입니다. 총회는 기본적으로 교단의 정책과 신학적·사회적 이슈를 주로 다뤄야 합니다. 그렇게 될 때 회복의 길 또한 열릴 것입니다."

강영안 박사는

한국외국어대학교 문학 학사, 루뱅대학교 철학 학사와 동대학원 철학 석사, 암스테르담자유대학교 대학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네덜란드 레이든 국립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를 거쳐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역임했다. 미국 칼빈대학교 철학과 초빙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

기독교윤리실천운동 집행위원장 및 공동대표, 한국철학회 회장,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 한국칸트학회 회장 등을 지냈으며,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와 학교법인 고려학원 제26대 이사장으로 있다. 내년 7월부터는 미국 칼빈신학대학원에서 철학신학을 가르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