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경섭 목사.
(Photo : ) ▲이경섭 목사.

'구미삼년불위황모(狗尾三年不爲黃毛)'라는 말이 있습니다. "개 꼬리 3년 묻어 두어도 황모(붓 만드는 데 쓰이는 족제비 털)가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비슷한 영어 경구에 "A crow is never whiter for washing herself often"이 있는데, "까마귀가 자주 씻는다고 결코 희어지지 않는다"는 뜻입니다.

이는 교육 무용론을 말하자는 것도 아니요, 소위 성골(聖骨)들이 하위 카스트들(subcastes)을 영원히 수하에 묶어 두려고 고안한 숙명론 이데올로기도 아닙니다. 인간 본성을 변화시키기가 어렵다는 뜻입니다. 기독교적으로 푼다면, 자연인을 영적 존재로 바꾸는 중생(born again)의 불가성을 말한 것이라고나 할까요?

즉 예수님이 "육은 육이고 영은 영(Flesh gives birth to flesh, but the Spirit gives birth to spirit. 요 3:6)"이라며 영과 육의 불거래성(不去來性)을 말한 것이나, 사도 바울이 영과 육의 불연속선성(고전 2:14, 갈 5:17)을 말한 것과 같습니다.

성경에 의하면 영과 육의 거리는 큰 구렁(chasm)이 끼어 있어 서로 오갈 수 없는 음부와 낙원만큼이나 멉니다(눅 16:26). 육에 속한 자연인을 아무리 닥달하고 계발시켜도 영의 사람으로의 변환은 불가하며, 천국의 빗장을 열게 할 수 없습니다.

기독교는 이 불가능한 일을 지상 목표로 설정했으며, 목사는 이 중생을 목적으로 교회에서 설교와 가르침을 수행합니다. 기독교는 육에 속한 자연인을 갖고 뭣을 하자는, 예컨대 자연인을 보다 계몽된 자연인으로 개량하는 것이 아닌, 전혀 다른 차원으로의 변환, 중생(born again)을 목표로 합니다. 이것이 기독교의 차별성이며, 기독교를 성령의 종교로 일컫는 이유입니다.

만일 기독교가 전자에 목표를 둔다면 존재 의의가 없습니다. 이 목표에 도달하는 데는 기독교가 아니라도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아니 오히려 그것을 지상 목표로 삼고 있고 그 일에 최적화된 세상의 종교나 교육이 더 효율적입니다.

웨스트민스트신학교 변증학 교수 코넬리우스 반 틸(Van Til) 박사의 저서 <개혁주의 교육학(Foundation of Christian education)>에 등장하는, 스코틀랜드의 어느 목사와 주당(酒黨) 교인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는 늘 술에 절어 있는 성도에게 '술 취함은 성경이 금하니 단주하라'고 오랫동안 권면해 왔으나, 그야말로 우이독경이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목사가 "당신은 위대한 스코틀랜드인으로서 그까짓 술 하나 끊지 못하느냐"고 하자 단번에 술을 끊었다는 내용입니다. 말씀의 권고로 결행하지 못했던 단주를 민족의 자존심에 호소당하여 이루어낸 것입니다.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하는 대목입니다. 반 틸 교수가 이 이야기를 통해 말하고 싶어한 것은 두 가지였습니다, 단지 단주(斷酒) 같은 외형적 행동 변화를 이끌어 내는 일은 꼭 기독교가 아니라도 가능하다는 것과, 아무리 그리스도인에게 바람직한 행동의 변화가 일어났다 하더라도 중생의 열매가 아니면 세리가 바리새인으로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바리새인을 "회칠한 무덤"이라 책망하신 것도, 그들에게 중생은 없이 겉치레의 모범적 행위만 있었기 때문입니다.

작금의 칭의 논쟁에 있어 성화를 칭의의 조건인 양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면, 그 기저에 인간의 행위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는 계몽주의 가치관이 자리합니다. 물론 칼빈도 성화를 매우 중시했지만 인간 행위를 절대적인 칭의의 표준으로 삼지는 않았습니다. 그가 재세례파를 비판한 것도 참된 교회의 표지를 인간의 경건에 둔 그들의 태도 때문이었습니다(주지하듯이 개혁교회는 참교회의 표지를 말씀의 선포, 성례의 정당한 집행에 둡니다).

칼빈은 전적 타락한 인간(구원받은 자라 할지라도)의 경건에 대해 크게 신빙성을 두지 않았고, 사람의 눈으로 성화의 진위를 판단하기도 어렵다고 생각했습니다. 참 성도이지만 성화되지 못한 행동을 나타낼 수 있고, 거짓된 성도이지만 훌륭한 행동을 보여줄 수 있다는 사실 때문이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가 계모와 통간한 고린도교회의 패륜(고전 5:1)과 바리새인의 외식(마 23:25) 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목표는 종교다원주의나 계몽주의들처럼 인간의 행동 수정에 있지 않고, 종교개혁자 루터의 말대로 가나의 혼인잔치에서 물이 포도주로 바뀐 것과 같은 존재론적 변환 곧 중생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돌들로 아브라함의 자손을 만든다(마 3:9)"고 하신 그 일, 바울 사도가 "마음의 할례(롬 2:29)"라고 했던 그 일입니다.

기독교 신학의 핵심도 그리스도의 구속의 목적도 다 이 중생에 있습니다(벧전1:3). 중생만이 하나님 백성과 천국 입성의 자격을 갖추어 주기 때문입니다(요3:5).

그러면 중생은 어떻게 일어납니까? 오직 믿음을 통해서입니다(요 1:12). 여기서 믿음이란 단순히 하나님이 계신다는 유신론적 신앙, 혹은 하나님을 믿으면 도움과 보호를 받을 수 있다는 보편적인 종교 신앙이 아닌,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대속신앙입니다. 곧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나니(요 6:56)"라는 예수님의 말씀이 구현되는, 그야말로 중생으로 이끄는, 그리하여 명실공히 바울이 말한 "내가 산 것이 아니요 내 안에서 그리스도가 사는(갈 2:20)", 그 믿음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고 중생과 천국 입성을 도모하는 자들이 있으니, 그들이 종교다원주의자 뉴에이지언(New Agean)들입니다. 이들은 보편적인 종교 신앙, 명상, 예술, 문학을 통해 중생과 영계로의 진입이 가능하다고 믿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왜곡된 믿음의 확신을 근거로 다른 사람들에게 자신들의 교리와 경험을 전수시키기까지 합니다. 작금의 출처가 불분명한 소위 종교다원적인 영성 훈련들의 난무가 그 증거입니다.

그러나 육에 속한 자연인을 아무리 갈고 닦아 심오한 경지에 올려 놓아도 그것은 자연인의 심오함일 뿐입니다. 그들이 경험한 심오한 체험들 역시 마음의 심연(深淵)에서 이뤄진 보편적 종교 체험일 뿐입니다. 그런 자연인의 심연(深淵)의 체험이 결코 영적인 체험과 동일시 될 수 없으며 더더욱 중생의 체험일 순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을 속전으로 받아들여 죽은 영혼이 살아나고 그리스도의 생명이 그에게 유입되지 않는 한, 결코 '구미위황모(狗尾爲黃毛)' 같은 중생의 기적은 일어나지 않습니다.

/이경섭 목사(인천반석교회 담임, 개혁신학포럼 연구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