쓰면서 응답받는 감사기도

 

유성준 | 평단 | 288쪽

 

기도 응답에 궁금증이 일 때면 어김없이 등장하는 인물이 있다. 평생에 걸쳐 50,000번 이상의 기도 응답을 받은 것으로 유명한 조지 뮬러다.

조지 뮬러의 평전이 인기리에 읽히던 시절, 아마도 그 직후였을 것이다. 수첩에 기도제목을 적고 그것이 성취되었는지 꼭 확인해 보라고 조언을 아끼지 않은 신앙 선배가 있었다. 선배의 말은 역시 그런 방식으로 응답을 확인한 조지 뮬러의 습관과 얽혀 묘하게 일리가 있었다.

아무튼 선배의 열변에 불구하고, 난 그 방법을 따르지 않았다. 듣고 이내 잊었거나 확인하지 않고도 이미 기도 응답에 확신을 가졌거나 둘 중의 하나였을 테지만, 내 경우 8할이 전자였을 공산이 크다.

서점 매대에 꽂힌 책들을 매의 눈으로 살피던 중, 그리 예사로워 보이지 않는 책에 시선이 멈췄다. 「쓰면서 응답받는 감사기도」. 그 책의 제목을 또박또박 읽는 사이, 앞서 언급한 에피소드가 머릿속을 헤집고 들어왔다. 피식 웃음이 났던 건, 그 선배는 내가 조지 뮬러를 읽지 않았을 거라 믿고, 무슨 대단한 방법을 전수하는 것처럼 너스레를 떨지 않았을까 싶어서였다. 이 부분은 당장 확인할 길이 없으니 나중에 선배를 만나기라도 하면 풀 일로 잠시 밀쳐 둔다.

길어지기 전에 정리하면, 인용한 에피소드와 전혀 문맥과 닿지 않은 의문을 정말 별일이다 싶을 만큼 떠오르게 만든 책임에서 이 책이 자유로울 수 없다는 것이다. 지극히 사적인 의혹과 이 책이 무슨 상관관계로 얽혔을까 싶지만, 그렇지 않다. 생각지 않은 순간에 터져 나온 유머가 적잖은 반향을 일으키듯, 이 책의 나이브한 편제가 그것과 유사한 형식을 만들어내기 때문이다.

책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저자는 한쪽 면을 믿음의 선배들이 고백한 기도로 채운 반면, 다른 한쪽 면은 여백으로 남겨두었다. 한쪽에 실린 글을 다른 쪽 여백에 필사하는 방식이다. 인용한 글의 길이는 대체로 짧다. 따라서 필사하고 남은 여백에 얼마든지 자신의 기도를 적을 수 있다. 상상력을 자극하는 여백의 특성에 맞춰, 특정 선배의 글에 빗대어 자신의 현실 고투 또는 감사를 기록할 수도 있다. 어느 경우든 독자 하기에 달렸다. 그만큼 특별한 형식에 얽매이지 않는 점이 이 책의 장점이다.

변명하자면, 선배에 얽힌 지극히 사적인 의혹 역시 그런 장점에 기댄 결과였다. 상상력의 나래가 다소 멀리 펼쳐지기는 했다. 문맥에서 벗어난 상상이라도, 때때로 그런 상상이 생의 한가운데 자리한 특정 에피소드에 입체감을 부여하고 양념 못지않은 풍미를 제공한다는 사실에 공감할 것이다. 그 정도 선에서 이해해 주시면 고맙겠다.

언젠가 "천하에 쫓기지 않고 나오는 명문은 없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그 글은 총체적 위기 가운데 좌절하지 않고 대담하게 위기에 도전한 이들이 지닌 언행의 힘을 일깨운다.

만약 저자가 책에서 치부 없이 위대함에 이른 선배들만 다루었다면, 적어도 덜 위대한 이들의 성취만 나열했다면 책에 실린 명문의 가치는 현격히 떨어졌을 것이다. 이 경우 오히려 이웃 아저씨의 인생 회고담이 명문보다 나을 수 있다. 공감의 원천은 누군가의 글이 내 삶과 전혀 동떨어지지 않았다는 동질감에서 오기 때문이다.

저자가 인용한 글이 초대교회 교부, 중세 수도원의 수도사, 종교개혁자, 이름 없이 살다간 무명의 그리스도인을 가리지 않고 그들의 고백과 다짐, 울부짖음, 회개, 하나님과의 내밀한 대화 등으로 무한히 확장해간 이유가 거기에 있다. 우리 역시 그들이 겪었을 실패와 좌절, 환희의 순간을 두루 또는 일부분이라도 겪게 마련이라 공감할 조건을 적잖이 갖춘 셈이다. 그러니 읽기에 앞서 '생경한 구석이 없지 않을까'라는 걱정은 하지 않아도 좋다.

역시나 아는 인물의 글은 전체적인 맥락을 이해하는 데 무리가 없다. 반면 그렇지 못한 인물의 글은 감정 이입의 폭이 그만큼 줄어든다는 문제가 있다. 그 점에서 이 책에 아쉬운 구석이 없지 않다. 그렇다고 그와 같은 아쉬움이 다양한 필자로 진용을 갖춘 책에서 주로 확인되는 '마음에 맞는 글을 선택해가며 읽기'라는 또 다른 강점을 압도하지는 못한다. 아는 인물의 글은 거듭 되새기며 읽되, 모르는 인물의 글은 각자의 신앙 정도에 따라 되도록 상상하며 읽기를 권장한다.

단순히 선배들의 글을 필사하는 수준에서 벗어나 활자가 드러내지 못한 인물 특유의 생명력을 글의 행간을 통해 끌어당기기를 마다하지 않는다면, 그들의 글이 "손으로 옮겨 쓰면서 드리는 (자신만의) 기도"로 바뀌는 경험에 한 발 더 다가서게 될 것이다. 역시나 상상력은 행간을 북돋는 유의미한 수단임에 틀림없다. 그렇다고 엉뚱한 상상력을 발휘하는 것까지 용인하자는 취지는 아니니 이 점 새겨들을 것!

필사를 위한 책들이 비기독교인들에게 많은 유익을 주었듯, 이 책에서 아날로그 감성을 자극받는 등의 유익을 얻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런 유익은 극히 일부분일 뿐이다. 기독 서적은 저자의 말처럼 다른 유익에 앞서 '하나님과의 내밀한 교제를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그분을 알아가며 그분의 뜻이 무엇인지 생각하게' 만들어야 한다. 더불어 통렬한 자아 성찰과 분명한 회개에 이어 희생을 바탕으로 이웃과 세상을 향한 삶의 결단으로까지 나간다면 그만한 유익이 없을 것이다.

하나님나라의 가없는 세계로 독자를 인도할 여백에서, 이 책은 여느 책에 비할 바가 아니다. 여백을 무엇으로 채울지는 독자의 판단에 달렸다. 앞서 설명한 대로 글과 삶을 같은 평형추 위에 놓고 가감 없이 바라보기를 권한다. 그래서 현재 자신이 머문 도상이 어느 지점에 위치해 있는지 가늠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때야말로 가없이 펼쳐진 궁극의 지평선이 '수건을 벗은 얼굴(고후 3:6-11)'로 보이기 시작할 것이다. 그 부분에 이 책의 유익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끝으로 책 속 글편 하나를 소개한다. 우리에게 상상력과 감정 이입이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한다.

◈버림받은 느낌이 들 때(피터 마셜)

아버지, 때로 당신이
우리와 아주 멀리 떨어져 계신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숨어 계시는 것 같고
당신을 찾는 자들을 피하기로 마음먹은 것 같기도 합니다.
하지만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찾는 것보다 
당신이 우리에게 발견되기를 더욱 원하신다는 것을 압니다. 
당신은 약속하셨습니다. 
"너희가 마음을 다하여 나를 찾으면 반드시 나를 찾게 되리라."
또한 당신은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겠다고 분명히 말씀하셨습니다. 
우리와 동행하시며 모든 것을 함께하시는 당신을 알고 싶습니다. 
버림받은 느낌이 들 때도
모든 사람의 마음을 위로하시는 성령의 임재를 깨닫고
기꺼이 자기 자신을 굴복하게 하소서.
우리가 올라가서 당신께 다다르기 전에
당신이 먼저 내려오시어 우리를 맞이한다는 것을
몸으로 알게 하소서.

/김정완
크리스찬북뉴스 부운영자, 네이버 파워블로거, 평신도 사역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