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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난주간, 예수의 ‘낮아지심’ 기억해야"

기독일보

입력 Mar 20, 2016 09:04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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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교회는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예수님의 '대속'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샬롬나비, 2016년 수난주간 논평서

▲김영한 박사(샬롬나비 상임대표·기독교학술원장)
김영한 박사(샬롬나비 상임대표·기독교학술원장)

세계교회는 교회력에 따라 올 해에는 3월 넷째 주간을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죄를 대신 지시고 고통당하신 사실을 상기하는 수난주간으로 지키고 있다. 성부 하나님과 같은 본체이시나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스스로 낮아지신 성자 예수님은 죄가 없으심에도 불구하고 수난을 받아들이시고 십자가에 달리셨다. 그의 상함은 우리의 허물과 죄악 때문이며, 그의 십자가의 고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하고 영생을 얻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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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그의 고통을 통해 구원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인류는 여전히 죄를 범하고 있으며, 인류가 살아가는 세계는 다른 이들과 다른 생명들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기들만의 욕망에 충실하게 살아가는 장소가 되어버렸다. 따라서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는 그가 고통당함으로 우리에게 보여주셨던 바를 다시 기억하면서 이 땅에 하나님 나라가 임하기 위한 노력을 아끼지 말아야 할 것이다. 이에 샬롬나비는 그리스도의 '대속', '희생', '용서', '수난', '낮아지심', '화평케 하심'을 중심으로 다음과 같은 실천사항을 한국교회에 제안하고자 한다.

1. 예수님의 '대속'을 기억함으로써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이웃의 상황을 돌아보면서 그들의 고통을 해결하기 위해 자신을 내어주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해야 한다. 지금 우리의 사회와 교회는 인간성 말살의 사건들로 몸살을 앓고 있다. 타인을 해치고도 마음의 가책을 가지지 않는 이들이 늘어가고 있으며, 노인과 어린이들을 함부로 다루면서 생명까지 빼앗는 범죄가 많아지고 있다. 우리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 이 모든 문제가 극복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자신을 십자가에 내어놓음으로써 모든 관계를 회복시키시고 모든 죄로부터 우리를 구원해주셨듯이, 우리 역시 소외된 이웃을 위해 자신을 내어주어야 한다. 그럼으로써 인간들 사이의 관계를 올바르게 회복하고 어려운 처지의 이웃의 고통을 함께 짊어지는 역사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2. 예수님의 '용서'를 기억함으로써 우리 안에 있는 모든 원한과 복수를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원수를 사랑함을 몸소 보여주시면서 모든 폭력적 복수를 거부하셨다. 예수님은 고통당하면서도 그런 종류의 보복을 포기 하도록 가르치시고 모범을 보여셨다. 즉,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을 멈추는 것이 예수의 뜻임을 우리는 알고 있다. "죽임당한 어린 양이 권세를 받기에 합당하나이다." 이것은 고통을 당하면서라도 같은 방식의 보복을 거부하고 어떤 종류의 폭력이든 거절하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폭력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라, 폭력의 순환을 멈추는 것이 에수님 수난의 결과였기 때문이다. 그분은 칼이 아닌 십자가로, 무자비한 힘이 아니라 고난의 수용으로 모든 원한과 복수의 관계를 멸절시키셨다.

3. 예수님의 '수난'을 기억함으로써 사회에서 발생하고 있는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 문제들에 강한 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예수님을 따르는 삶이란 세상의 부정의를 비판함으로 나타날 수 있는 고난을 수용하는 것이다. 기독교인들에게 있어 고난의 수용이란 곧 고난을 감내하면서도 끝까지 기득권과 권력에 비판을 가해야함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고난은 언제나 기득권의 질서에 반대할 때 발생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리는 기득권 세력의 부정의에 저항했던 과거의 많은 기독교 전통들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우리가 그것에 공감을 가질 수 있는 이유는 그들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면서도 부정의한 상황에 적극적으로 저항해왔기 때문이다. 물론 부정의한 상황에 대한 저항은 지금 우리에게도 요구되고 있는 바이다. 과거의 몇몇 기독교 세력들이 예수를 따르기 보다는 기득권에 동조하면서 정치적 권력만을 탐했다는 사실은 그들이 진정한 기독교인들이 아닐 수 있다는 서글픈 결론으로 우리를 이끌고 있는 것 역시 사실이다.

4.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낮아지심'을 기억함으로써 정치적 권력욕을 과감히 포기해야 한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동등됨을 포기하고 십자가를 지셨으며, 이와 동시에 인간이 늘 바라는 권력 역시 모두 포기하셨다. 그리고 바로 이 포기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는 승리하셨고, 또한 승리하시고 계신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요구하는 것은 권력의 내려놓음이며, 동시에 기득권층이 되려는, 그래서 권력을 획득하여 세속적 정치권력을 발휘하겠다는 욕심의 포기다. 세속의 정치권력을 가진 자들, 그리고 가지게 될 자들은 이미 자기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폭력을 정당화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으며, 따라서 그 본질상 결코 예수를 따를 수 없는 자들이다. 한국교회에게 기독교인들에게 일차적으로 필요한 것은 권력을 통해 세속정치를 직접 바꾸겠다는 욕심보다는, 권력의 잘못을 비판하되 그 권력을 스스로 소유하여서 행사하겠다는 욕심을 과감하게 버리는 것이다.

5. 예수님의 '화평케 하심'을 기억함으로써 남한과 북한 사이에, 그리고 우리 사회 안에 만연하고 있는 대립과 갈등을 극복하려 노력해야 한다.

우선, 한국교회는 남한과 북한 사이에 어쩔 수 없이 벌어지고 있는 대립을 해소하기 위한 소통수단과 사업들을 다양하게 구상하기 시작해야 한다. 우리가 비판해야 하는 대상은 북한을 잘못 이끌고 있는 권력자들이지 결코 그곳의 주민들이 아니다. 미워하는 마음을 버리고 형제들의 굶주림을 해결할 수 있는 여러 가지 소통수단과 사업들을 반드시 준비해야 한다. 한국교회는 북한에 대한 조건 없는 인도적 원조를 다시금 제안해야 한다.

다음으로, 한국교회는 한국사회 안에서 벌어지고 있는 보수와 진보 사이의 갈등, 부자와 가난한 자 사이의 갈등, 그리고 기성세대와 젊은 세대 사이의 갈등을 극복할 수 있는 방안들을 모색해야 한다. 각자 생각이 다르고, 경제적 사정이 다르고, 살아온 세월이 다르다는 것은 결코 다툼의 이유가 될 수 없다. 오히려 그리스도의 수난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그리고 우리 안에 화평을 가져오시기 위한 희생임을 기억해야만 한다. 다름은 다툼을 통해 말살되어야 하는 것이 아니라, 대화를 통해 평화로운 공존에 이르러야 할 우리의 현실이다.

6. 예수님의 '희생'을 기억함으로써 인간에 의해 남용되고 있는 자연과 피조물을 돌보아야 한다.

한국교회는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본받아 인간에 의해 남용됨으로써 고통당하고 있는 자연환경과 피조물들을 돌보아야 한다. 이러한 돌봄이란 단순한 자연보호를 의미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것은 나 자신의 편의와 기호를 포기하면서 자연의 희생을 줄이는 실천으로 확대되어야 하며, 자연의 파괴적 개발에 적극적으로 저항하는 모습으로 나타나야 한다. 피조물에게 고통을 가하는 인간의 행위는 곧 그것을 창조하신 하나님에게 고통을 가하는 것과 같다. 모든 피조물은 하나님의 것이지 우리가 마음대로 남용하고 멸절시킬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그리하셨던 것처럼, 우리는 피조물의 고통을 줄여나가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 예수님의 수난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받았음은 곧 우리 역시 그분의 수난 안에 참여해야 함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 수난을 통해 우리는 이웃과 생명을 살림과 동시에 모든 원한과 갈등을 극복하고 용서와 화목에 이르게 된 것이다. 수난주간을 맞이하여 한국교회는 그리스도의 삶과 고난을 기억하면서 소외된 이웃, 자연, 피조물의 고통에 참여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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