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ite
stats
에디션 선택 통합홈 English 로스앤젤레스 뉴욕 워싱턴DC 애틀랜타 시애틀 샌프란시스코 시카고 한국기독일보
SEA.chdaily.com
2017.11.17 (금)
X
뉴스 기독교 경제 Tech 라이프 오피니언 크리스천 잡스 포토 비디오

기독교인들이 영화 '갓 오브 이집트'를 감상하는 법

기독일보

입력 Mar 08, 2016 05:49 AM PST

Print 글자 크기 + -

기사 보내기 Facebook Twitter

[이영진의 기호와 해석 3] 이집트의 내세관과 참된 부활

수 년 전 한 교회에서 학생·청년부를 맡고 있을 당시, 설교 중에 영화 '해리 포터(죽음의 성물)'를 예화로 썼던 일이 있다. 죽음에 관한 주제를 다루면서 "천하의 해리 포터라도 죽음은 초월할 수 없다", "온갖 마법으로도 '죽음'은 어찌 못하지 않더냐" 뭐 이런 정도를 전달하였을 것이다. 그 주간에 한 학부모에게서 이런 전화가 걸려 왔다. "어떻게 설교에 해리 포터를 예화로 쓸 수 있습니까?!"

Like Us on Facebook

'죽음과 부활'이라는 주제가 기독교에만 있는 줄 알고 자란 아이가 이집트 같은 고대 문명에도 강력한 부활 신앙이 있는 줄 알았을 때 성경을 의심하고 결국 세상으로 가 버리는 대부분의 경우가, 바로 저런 문화적 외눈박이 토양에 기인한다.

<갓 오브 이집트>는 비록 '아이언맨' 같은 오락물로 옷 입었지만, '부활'이라는 내세관의 깊은 가치 문제를 주제로 읽을 수 있다.

'부활 신앙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기독교인의 경전'이자 '유대교의 경전'이기도 한 구약성서에는, 사실 우리에게 각인된 식의 부활 인식이 극히 약한 편이다. 내세관 자체가 명확하게 드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오히려 구약과 동시대라 할 수 있는 과거 이집트의 문명에서 보다 선명한 부활 개념을 발견할 수 있는 실정이다.

(1) 이집트의 부활 사상

이집트 종교의 내세관은 일찍부터 정교했다. 그들에게 있어 사람이란 육체와 카(Ka)·바(Ba)·아크(Akh)의 결합이다. 카는 영혼이며, 바는 인격이고(타자와 구별되는), 아크는 가장 높은 정신성이다. 죽음이란 영혼 '카'가 육체를 떠나는 것이다. '바'는 죽은 뒤에도 육체에 남는다. 그러나 카는 육체에 있을 때 영양을 섭취하기 때문에, 사후에도 제사 음식을 받아먹는 존재다.

그들에게 부활이란 이 '카'가 다시 '바'와 합칠 때 '아크'로 부활하는 것이다. 죽은 육체의 보존(미라)이 그들에게 중요했던 이유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이러한 부활 사상이 이집트에 어떻게 생겨났느냐.

(2) 신인가? 인간인가?

이 영화는 왕족들의 질펀한 일상 이야기로 시작한다. 그런데 알고 보니 그들이 신이라고 한다. 인간에서 신으로의 이 같은 자연스런 이입은 지당한 표현이다. 역사적인 것이다.

이집트 문명에서 최초로 왕조 형태를 띤 지배자는 메네스(Menes)로 알려졌으나, 자기들을 신으로 여기기 시작한 통치자는 조세르(Zoser)로 보고된다. 보다 복잡한 형태의 국가를 이룬 이 3왕조 시대는 전보다 다변화된 정치 문제의 해결을 위해 귀족 계급을 필요로 했고, 왕 자신을 신으로 여기는 신정(神政) 체제를 가져왔다. B.C. 2700년경의 상황이다.

왕의 아들들은 보다 중요한 직책을 맡아 사제직과의 구별이 없었으며, 왕족이 아닌 일반인에게도 왕의 이름으로 활동할 수 있는 권위가 부여되었는데, 이것이 귀족 제도이며 이러한 조직력의 강화에서 비롯된 것이 바로 내세 사상이었다.

왕자들과 귀족의 무덤은 왕의 피라미드 가까이에 밀집해 있었는데, 왕은 여전히 신에 의해 영생이 보장된 유일한 자로 생각되었으며, 절대 군주인 파라오 시대에는 파라오에게만 '바'가 있기 때문에 부활도 파라오만 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었다.

단, 특별한 귀족의 경우 파라오와 무덤을 공유할 때 거기서 파라오와 함께 부활할 수 있었다고 여겼다. 그러던 것이 일반인의 내세 사상으로 보편화된 것, 그것이 바로 이집트의 부활 사상이다.

과거 왕의 특권이었던 장례 예식과 비석들이 이제는 모두의 권리가 된 것이다. 누구든 의로운 성품이라고 판단되기만 하면, 죽을 때 오시리스 신에 의거해 영원한 행복에 들 것이라는 내세관이 인기를 끌었다. 그것은 한 마디로 물질과 정치적 혼돈에서 새로운 가치의 발견이었다.

이 영화에서 오시리스 왕이 덕의 화신인 듯 표현되는 전거다.

(3) 세트

헬라 문명에서 하늘과 땅이 우라노스와 가이아였다면, 이집트 문명에서 하늘은 누트(Nut)고, 대지는 게브(Geb)다. 둘 사이에서 하루에 신이 하나씩 태어나는데 오시리스(Osiris)가 첫째이고 세트(Seth)는 셋째이며, 오시리스의 아내 이시스(ISIS)가 딸로서 넷째이다. 천체를 숭배했던 문화의, 천체에 대한 의인화다.

오시리스가 형이라는 이유로 이집트의 왕이 된 것이 못마땅했던 세트는, 어느 날 질 좋은 관을 짜 와서는 이렇게 제안한다. 

"이 관에 몸이 꼭 맞는 자에게 이 관을 선물로 주겠다."

모두가 그 관이 몸에 맞지 않았지만 오시리스에게는 꼭 맞았다. 세트는 오시리스가 관에 들어간 즉시 그 관을 나일강에 던져 버렸다. 이후 아내 이시스의 여정 이야기가 펼쳐진다(영화에서는 아들의 여정 이야기지만).

이시스는 관을 찾아내 한 궁전 기둥으로 만들어 숨기고 오시리스의 부활을 고대하지만, 세트는 다시 그 관을 열고 오시리스의 몸을 14조각으로 나눠 버린다('해리 포터'에서 볼드모트의 조각난 몸이 여기서 모티프를 얻었다). 오시리스는 천신만고 끝에 자신의 모든 조각을 찾아 맞춘 이시스에 의해 부활하지만, 명계의 신이 된다.

<갓 오브 이집트>에서는 아들 호루스가 주인공으로 각색되어 오이디푸스처럼 눈을 잃기도 하고, 헤라클레스 또는 페르세우스처럼 시련과 연단을 통해 신의 권좌에 오른다. 이러한 과정에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태양신 라(Ra)와의 관계는, 이집트를 포함한 당대 모든 고대인의 관념에 자리했던 '태양이 갖는 가치와 기원'을 인상적으로 잘 표현해내고 있다.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바로 세트(Seth)다. 부자와 가난한 자가 각각 바친 제물을 가리키며, 하나는 값지고 하나는 보잘것없음에도 이 둘의 가치는 동등한 것이라고 선포하는 오시리스에 비해, 무자비하고 잔혹하게 묘사된 '세트'.

그 이름을 역사 속에서 살피자면, 힉소스(Hyksos) 족과 관련 있는 것 같다. 힉소스 족이 B.C. 1720년쯤 고대 이집트 도시 타니스(Tanis)에서 세력을 펼쳤다는 근거가 한 기념비에서 발견된 일이 있는데, '400주년 비석'으로 불리는 그 석비는 바로 '세트'가 400년 동안 통치한 것을 기념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제19대 왕조 직전에 세워 놓은 것으로 파악되는 이 비석에 따르면, 아시아 복장을 입고 나타난 세트 신은 한 마디로 이집트인 입장에서 외국의 신이었던 것이다(고대의 '아시아'는 오늘날의 동남아시아가 아니라 팔레스타인 부근이다).

서부의 셈족이었던 이 힉소스 족과 요셉 일가와의 연관성을 우리가 고고학과 연관지어 언급할 때 이렇다 할 역사성이 있는 건 아니지만, 그렇다고 아예 연관이 없는 것도 아니다.

특히 이 영화 속에서 세트(Seth)가 처음 등장할 때 자신을 "사막에서 살아남은 존재"로 일컫고, 또 그가 태양신 '라'에게 도전하는 존재로 묘사된 사실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

(4) 반(反)신화적(Anti-mythological) 이념

세트는 오시리스 신화 속에서 불모의 사막, 건조한 열기/불 따위가 의인화되어, 비옥한 토지, 관개수, 특히 (태양)빛과 대립하는 영원한 적수로 등장한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성서에서 이스라엘의 하나님은 자신이 택한 백성을 사막에서 처음 대면하셨고, 또 그들을 사막으로 인도해내셨다는 사실이다. 그 이야기가 구속사의 주된 전개를 이루고 있다.

게다가 구속사 서문에 해당하는 이 천지창조 본문에는, 그 태양에 저항하는 이념이 고스란히 전제되어 있어 더욱 공교롭기만 하다.

"창 1:14 하나님이 이르시되 하늘의 궁창에 광명체들이 있어 낮과 밤을 나뉘게 하고 그것들로 징조와 계절과 날과 해를 이루게 하라 15 또 광명체들이 하늘의 궁창에 있어 땅을 비추라 하시니 그대로 되니라 16 하나님이 두 큰 광명체를 만드사 큰 광명체로 낮을 주관하게 하시고 작은 광명체로 밤을 주관하게 하시며 또 별들을 만드시고 17 하나님이 그것들을 하늘의 궁창에 두어 땅을 비추게 하시며 18 낮과 밤을 주관하게 하시고 빛과 어둠을 나뉘게 하시니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았더라 19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니 이는 넷째 날이니라".

여기에 묘사된 천상계 광명들(the celestial heavenly luminaries)은 필경 해와 달일 텐데, 그 명칭이 일체 제거되어 있다. 왜일까. 그 이유는 오로지 하나, 당대 신화에 대한 저항과 거부에 기인한다.

피조물은 영원한 것이 아니며 창조된 것으로서, 섬김을 받는 것이 아닌 섬기는 존재다. 태양신 샤마쉬(Shamash)와 달신 야리(Yarih)가 연상되는 그 명사들은-쉐메쉬(태양)와 야레아크(달)-제거된 채 단지 '광명들'로 소개된 것이다.

그래서 우리의 천지창조 본문에는 낮과 밤은 있지만, 그것을 주관하는 태양과 달이라는 명칭은 없다. 즉 이와 같이 (태양과 달이 빠진) 어색한 본문은 태양 숭배에 저항하는 이념을 지닌 '구속사 서문'으로 읽을 때만 자연스럽게 읽힌다.

<갓 오브 이집트>에서 사막의 불덩어리 화신으로 소개되고 있는 세트가 이집트인들에게 잔악한 신으로 각인된 것은, 태양 숭배에 저항하는 이런 상대적 기호 탓이 아닐까?

이 영화에서 호루스는 세트의 근원으로 여겨지는 '사막의 불'을 꺼버리려고 안간힘을 쓴다. 한 가지 더욱 공교로운 사실은 셋째 날에 태어나 셋째 아들이 되었다는 이 이집트 신의 이름이, 아담의 셋째 아들인 세트와 같다는 것이다.

그것은 마치 모세라는 이름의 음가가 이집트어 '건져내다'로 호환되는 이치다. 세트는 히브리어로 보나 이집트어로 보나 그 기원을 밝히기 쉽지 않지만, 대체로 영어의 'Set(세움, 지명)'라는 뜻으로 양쪽 모두에 호환된다.

(5) 참된 부활

이 영화에서는 세트가 나라를 지배하기 전 아버지 오시리스가 어떻게 덕으로 다스렸는지를, 주인공 호루스가 신분 낮은 인간에게 회고하는 장면이 나온다. 모든 이집트 백성은 누구나 오시리스가 제공한 무덤에 묻힐 수 있었다는 것이다. 지금으로 말하면 무료 공동묘지인 셈이다.

오시리스가 매장 문화와 내세관에 있어 대중적 인기를 끈 것은 역사적 사실이지만, 이 영화에서처럼 내세로서 부활의 권한이 저렇게 신분 낮은 사람들에게도 적용되는 것은 파라오가 실존하던 문명 속에서는 요원하기만 했다.

그런 점에서 이는 영화의 각색이다. 오히려 그 부활의 참된 의미는, 그 내세관이 아직 명확하지 않아 보이는 구약성서를 통해 드러난다.

창세기 마지막 50장에는 야곱의 아들 요셉의 유언이 나오는데, 그는 사실상 파라오와 함께 부활에 들어갈 수 있는 신분을 획득했던 인물이다. 그런데 그는 이스라엘이 약속의 땅을 향해 이집트를 나갈 때, 반드시 자신의 유골을 빼내 줄 것을 후손들에게 맹세시키는 장면이 나온다.

이것은 내세에 얽힌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던 시절, 즉 영생과 부활에 관한 내세관이 아직 틀을 갖추지 못했던 그 시절, 그들의 내세 사상을 잘 밝혀 주는 대목이다.

그들에게 영생과 부활의 핵심은 그것이 영원히 어떤 불로장생(진시황제 식의)을 한다는 것이 있는 것이 아니라, '누·구·와 함께 영·원·히 있기를 원하느냐'였던 것이다. 요셉은 살아서도 죽어서도 신이었던 화려한 파라오와 영원을 동행하기보다는, 자신의 (언약 안에 있는) 가족, 공동체, 민족, 계약 백성과 함께하기를 고대했다.

초기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설립자 바울에게 있어서도 부활은 대단히 중요한 신학적 주제였는데, 그것은 그의 가르침에 있어 한 마디로 '소망'과 동의어였다. 초대교회가 직면했던 절박한 문제, 즉 이 땅에서의 실패 속에서, 부활은 그들에게 유일한 희망이었을 것이다. 그렇기에 만약 부활이 없다면 자신들이 가장 불쌍한 자라는 것을 소회로 밝혔을까(고전 15:19).

그 말은 당시 평균 수명 25세 정도에 불과하던 고대인들의 소망과도 상응하는 것이다(바울 시대에는 평균 수명이 40세 정도였다고). 그야말로 '죽음 너머 희망'인 것이다.

당시 평균 수명의 몇 배를 더 살고 있는, 사실상의 불로장생을 이룩한 우리 현대인이 지금 고대하는 부활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고령사회가 재앙처럼 되어 버렸기에 하는 소리다.

/이영진

호서대학교 평생교육원 신학 전공 주임교수로 재직하고 있는 필자는 다양한 인문학 지평 간의 융합 속에서 각 분야를 자유롭게 넘나들면서도 매우 보수적인 성서 테제들을 유지하여 혼합주의에 배타적인 입장을 견지한다는 점에서, 일반적인 융·복합이나 통섭과는 차별화된 연구를 지향하는 신학자다. 최근 저서로는 <철학과 신학의 몽타주(홍성사)>, <자본적 교회(대장간)>가 있다.

© 2016 Christianitydaily.com All rights reserved. Do not reproduce without permission.

의견 나누기

Real Time Analytics
Web Analytic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