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성욱 교수.
(Photo : ) ▲정성욱 교수.

요즘 '알라' 때문에 사방이 시끄럽다. 한 달 전쯤 미국 복음주의권 대표 명문인 휘튼대학교(Wheaton College)의 한 여교수가 "무슬림과 그리스도인은 동일한 신을 예배한다"고 주장했다가 대학의 징계를 받았다. 이 사건으로 미국 복음주의권에서는 '과연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같은 신인가?'에 대한 논쟁이 뜨거워졌다. 

며칠 전 한국에서도 IVP가 '예일대 미로슬라브 볼프(Miroslav Volf) 교수의 「알라」 번역 출간 기념 특별좌담회'를 열었고, 반응이 뜨거웠다고 한다. 볼프 교수의 「알라」가 영어로 출간된 것은 지난 2012년이었기에, 그 어간에 미국 내에서도 이미 뜨거운 논쟁이 한차례 진행됐었다.

먼저 필자는 한국 IVP가 이 책을 출간한 것이 단순한 '노이즈 마케팅'은 아니길 바란다. 소동을 일으켜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려는 얄팍한 상술이 아니길 바란다. 솔직히 이 책에 대해 필자는 개인적으로 많은 유감을 갖고 있다. 그 이유는 아래에서 자세히 다루기로 하고, 우선 이 책이 한국교회와 사회에 줄 수 있는 몇 가지 긍정적 시사점에 대해 생각해 보겠다.

첫째, 이 책은 부적절한 내용에도 불구하고, 출간 시기는 적절했다고 생각한다. 한국교회 내에서 이슬람과 이슬람 선교에 대한 관심이 증폭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그렇다. 한국교회 일각에서 이슬람에 대한 마녀사냥식 대응에 대한 반성이 제기되고 있는 시점이어서 또한 그렇다. 한국 사회 내에서도 테러방지법 및 할랄식품과 관련된 논쟁이 뜨거워진 시점이기에 더더욱 그렇다. 2001년 9·11 테러 이후 지난 15년간, 이슬람은 서구교회와 사회 내에서 중심 화두로 자리잡았다. 향후 적어도 10년 동안 이슬람이 한국교회와 사회의 주류 담론을 형성해 가게 될 것은 분명해 보인다.

둘째, 이 책은 감성에 치우쳐 지성의 제자도에 대한 추구와 열정을 상실한 한국 그리스도인들에게 생각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히 이슬람의 정체와 알라의 본질에 대한 좀 더 근본적 의미의 고민거리를 제공하는 측면이 있다. 단순히 '카더라' 통신이 아닌, 원전에 대한 분석과 정확한 정보를 담고 있는 2차 자료에 근거한 진지한 사유와 토론의 촉매제가 될 것이다. 

셋째, 이 책은 이슬람과 관련된 담론과 토론에 있어 건강한 주도권을 쥐고 한국사회를 선도할 수 있는 계기를 한국교회에 제공해 줄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이다. 특히 볼프의 정치신학적 접근은 '한국 사회를 위한 공동선(Common Good) 추구'라는 '한국교회의 공적 책임 의식(public responsibility)'을 촉발하고, 이와 관련된 다양한 실천 전략을 고민하도록 이끌 것이다. 

 

알라 좌담회 볼프
▲지난 22일 '알라' 출간 기념 특별좌담회에서 참석자들이 발제를 청취하던 모습. ⓒ이대웅 기자

 

 

적어도 이 세 가지 점에서 나는 이 책의 출간을 긍정적으로 본다. 하지만 앞에서 이미 지적한 것처럼, 조직신학자인 필자에게 이 책은 신학적으로 너무나 아쉬운 점이 많다.

첫째, 성경의 하나님은 삼위일체 하나님이시다. 삼위일체란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 세 위격이 영원한 한 분 하나님으로 존재하신다는 뜻이다.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은 동일한 신적 본질을 가지고 있으며, 상호 내주를 통한 완전한 페리코레시스(perichorresis)적 연합 (communion)을 이루고 계신다. 그리고 삼위일체는 영원한 사랑의 교제와 교통 가운데 존재하신다. 

삼위일체 하나님의 존재 방식 자체가 코이노니아(koinonia, 교통)이다.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도 완전한 하나님이시지만, '세 분의 하나님들'이 계신 것이 아니라 영원한 '한 분 하나님'이 계신다. 이것이 기독교 신관의 근본 진리이다.¹

삼위일체론적 관점에서 볼 때, 꾸란의 알라와 성경의 하나님은 결코 동일하지 않다. 완전히 다르다. 성경의 하나님은 삼인격적(tripersonal) 존재인 반면, 꾸란의 알라는 단일인격적(monad/unipersonal) 존재이다. 삼위일체는 기독교의 하나님과 모든 다른 종교의 신들을 뚜렷하게 구별해 주는, 기독교의 절대적 독특성이다. 이 점을 부인하면서 기독교인임을 자처한다면, 그것은 자기 모순일 뿐이다.

둘째, 성경의 하나님은 기독론적으로 정의된다(Christologically defined God). 간단히 말해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이시다. 신약성경 곳곳에서, 하나님이란 말은 삼위일체의 세 위격들 중에서도 아버지를 지칭하는 데 집중되었다. 그래서 신약성경은 자주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를 동일시한다. 

다시 말해 성경의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들로 가진 분이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신 그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선언하시는 분이 참 하나님이시다. 그렇지만 꾸란은 "알라에게 아들이 있다고 하는 자는 징계를 받아 마땅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악의적인 신성 모독이며 거짓이기 때문이다(꾸란 18:4-6)"라고 선언한다. 상식과 합리적 추론을 존중하는 모든 사람에게 있어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는 결코 같을 수 없다.

셋째,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주님(Kurios)이자 구세주로 선포한다. "예수는 주님이시다"라는 고백은 초기 예수 운동의 핵심 신앙고백이었다. 그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의 제2격으로서 사람의 본성을 취하여 성육신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시라는 확언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예수를 하나님으로 예배하며 경배한다. 

하지만 무슬림은 결코 그럴 수 없다. 꾸란의 이싸(꾸란에서 예수를 부르는 말)는 결코 알라가 될 수 없다. 꾸란이 묘사하는 이싸는 단지 인간에 불과할 뿐이다. 꾸란의 이싸는 우리를 위해 성육신하신 하나님도, 죄인의 구속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신 구주도 아니다. 꾸란은 마리아의 아들을 메시아로, 또 하나님으로 믿는 것을 불신앙으로 정죄하고 있다(꾸란 5:17). 이싸가 알라라는 주장은 이슬람의 근원을 무너뜨리는 것이다.

볼프도 이 사실을 모를 리는 없다. 그럼에도 그는 왜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동일한 신이라고 주장하는 것일까? 볼프가 말하고 싶어하는 바는 결국 성경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존재론적(ontologically)으로는 동일한 예배의 대상이지만, 인식론적으로(epistemologically)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 이해가 다르다는 것이다. 신에 대한 기독교와 이슬람의 이해가 서로 다르지만, 존재론적으로 같은 신을 예배한다는 것이 그가 이 책을 통해 주장하고 싶어하는 것이다.

 

알라 볼프 좌담회
▲알라, 미로슬라브 볼프, 백지윤 옮김, IVP, 416쪽, 22,000원.

 

필자가 볼 때 이 주장은 네 가지 차원에서 문제가 있다.

첫째, 논리학적 차원의 문제이다. 기독교와 이슬람의 신 이해와 인식은 단순히 다름의 차원에 머물지 않는다. 왜냐하면 양 종교의 신 이해는 서로 양립되거나 조화될 수 없을 정도로 모순되기 때문이다. 논리학의 기본 원칙인 모순율(principle of contradiction)에 따르면, "A는 B인 동시에 B가 아닐 수는 없다" 또는 "A는 非 A가 아니다" 따라서 "예수는 신이다"라고 하는 기독교의 진리 주장은 "예수는 신이 아니다"라는 이슬람의 진리 주장과 양립될 수 없다. 둘 중 하나가 진리이거나 둘 다 거짓일 수는 있어도, 둘 다 진리일 수는 없다.

둘째, 진리론적 차원의 문제다. 특히 진리대응론(correspondence theory of the truth)에 의하면, 대상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인식이 대상과 일치할 때만 진리 주장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신에 대해, 기독교의 관념 또는 인식이 옳으냐 아니면 이슬람의 관념과 인식이 옳으냐는 반드시 양자택일의 문제이지 양립의 문제가 아닌 것이다. 동일한 대상에 대한 서로 모순되는 인식과 관념이 둘 다 옳을 수는 없기 때문이다.

셋째, 기독교의 예배관과 관련된 문제다. 기독교적 관점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방법은 사람이 정할 수 없다. 도리어 삼위일체 하나님께서 정하신다. 성경에 의하면 예배는 본질적으로 삼위일체적 행위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엡 2:18)". 기독교의 예배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through Jesus Christ) 성령 안에서(in the Holy Spirit) 아버지께로(to the Father) 나아가는 행위이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하지 않는 이슬람의 예배는, 결코 하나님이 인정하시는 정당한 예배일 수는 없다. 볼프는 무슬림들이 우상숭배자가 아니라고 주장하지만, 성경은 볼프의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한다. 그들은 자기들이 만들어낸 신을 자기들이 만들어 낸 방식을 따라 예배하고 있을 뿐이다. 성경은 그것을 우상숭배라고 정죄한다.

넷째, 볼프의 주장을 끝까지 밀고 가면 종교다원주의의 문을 활짝 열게 된다. 종교다원주의자 존 힉(John Hick) 역시 볼프와 비슷한 논리를 전개했다. 궁극적 실재에 대한 기독교·이슬람·유대교·힌두교의 인식과 이해는 다르지만, 모든 종교는 존재론적으로 동일한 궁극적 실재를 예배한다는 것이다. 그 결과 모든 종교는 절대 진리와 구원에 이르는 동등한 길이며, 모든 종교는 기본적으로 동일한 것을 가르친다는 종교다원주의 이데올로기를 확립했다.

볼프가 기독교의 삼위일체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가 동일한 신이거나 적어도 매우 유사하다는 주장을 펴는 숨은 의도가 무엇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그러나 그가 부적절한 주장을 하고 있다는 것은 부인하기 어렵다. 

 

알라 좌담회 볼프
▲미로슬라브 볼프 교수. ⓒ예일대 홈페이지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가 같은 신이라는 볼프의 주장이 가진 본질적인 신학적 부적절성에도 불구하고, 이 책이 던지고 있는 근본 질문은 유효하다. 그것은 "성경의 하나님과 꾸란의 알라 사이에 유사점은 없는가?" 하는 것이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유사점이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 유사점을 세 가지 차원에서 통합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첫째, 일반계시 또는 보편계시적 차원이다. 무슬림을 포함한 모든 사람은 자연만물에 드러난 보편계시를 통하여 하나님의 존재와 능력과 본성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다. "창세로부터 그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의 영원하신 능력과 신성이 그 만드신 만물에 분명히 보여 알게 되나니 그러므로 저희가 핑계치 못할지니라(롬 1:20)". 이슬람이 이해하고 있는 알라는 이러한 보편계시의 산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자연적 신 지식은 인간의 죄악으로 헝클어져 있고, 왜곡되어 있으며, 파편적이라는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보편계시는 결코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과 십자가와 부활에 대한 복음을 알려 주지 못하며, 참 하나님과의 인격적·구원적 관계로 이끌 수도 없다.²

둘째, 선교신학적 차원에서 기독교와 이슬람 사이에는 접촉점이 있다. 양자 모두 초월적 유일신을 인정하며, 신과 이웃에 대한 사랑을 강조한다. 인간의 죄를 지적하며, 죄에 대한 심판을 경고하고, 죄와 심판에서 구원의 길을 제시한다. 그리스도인이 무슬림에게 전도할 때, 기독교와 이슬람의 유사점 또는 접촉점을 적극적으로 활용해야 한다. 때로는 이 접촉점을 대화의 시작점으로 삼을 수도, 때로는 본격적으로 복음을 전하기 위한 징검다리로 사용할 수도 있다.³

셋째, 공공신학적, 혹은 윤리신학적 차원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속한 사회에서 공동선을 추구하는 일에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평화를 진작시키고, 이웃을 사랑하며, 약자들을 보호하고, 모든 사람들의 인권을 존중하는, 보다 건강한 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협력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과 무슬림이 서로에 대한 마녀사냥식 정죄와 폭력을 막을 수 있다. 서로에 대한 존중에 기반한 건강한 상호관계를 유지해 갈 수 있다. 적어도 그리스도인들은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명령을 무슬림들을 향하여 실천해야 한다는 것이다.⁴

이런 의미에서 이 책은 일정한 의미에서 긍정적 역할을 할 것이다. 그럼에도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에게 계시해 주신 하나님과 이슬람의 알라를 동일시한 저자의 주장은 신학적으로 비판받아 마땅하다. 부디 조국 교회가 이 정도의 책에 의해  흔들리거나 요동하지 않기를 바란다. 도리어 능숙하게 소화하면서 한 차원 전진할 수 있는 더 성숙한 믿음과 사랑의 공동체로, 그리고 지성의 제자도를 꿋꿋이 실천해가는 공동체로 계속 거듭나게 되기를 기도한다(5).

 

휘튼대 라리시아 호킨스 교수

▲'히잡'을 쓰고 '하나님=알라'를

주장한 휘튼대 라리시아 호킨스 교수. 

¹ 삼위일체론에 대해서는 필자의 책 <삶 속에 적용하는 라이프 삼위일체 신학(홍성사, 2007)>을 참조하라.

 

² 필자의 논문 "'Other Religions' in The Oxford Handbook of Evangelical Theology(NY: Oxford University Press, 2010), pp. 355-367"을 참조하라.

³ 필자의 책 <티타임에 나오는 기독교 변증 개정증보판(홍성사, 2014)> 제20장 '이슬람 교도들에게 어떻게 복음을 전할까요?'를 참조하라.

⁴필자의 책 <스피드 조직신학(홍성사, 2005)> 제10장 '이단과 다른 종교들에 대하여'를 참조하라.

(5)더글라스 그로타이스 교수의 <기독교 변증학(CLC, 2015)>을 참조하라.

/정성욱 교수(덴버 신학대학원 조직신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