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V.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Photo : )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1. 하나님 나라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 기도의 청원이 되어야 한다. "아버지의 나라가 오게 하시며"(마 6:10a)

예수님은 우리가 무엇을 추구하든지 삶의 목표를 제시해 주셨다: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마 6:33) 우리 삶의 우선순위는 하나님의 나라다. 역사적으로 이상사회를 이루기 위하여 여러 가지 운동이 일어났다. 사유재산 제도를 철폐하고 사회적 평등을 무력과 독재와 인권유린으로 실현하고자 한 공산주의는 1989년 동구의 민주화와 그 종주국인 소련연방의 해체와 더불어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하나님의 나라는 지역이라는 공간적 의미보다는 그의 주권이 미치는 하나님의 통치를 뜻한다. 예수님은 하나님 나라가 우리 내면 속에 이루어진다고 가르치신다: "하나님의 나라는 볼 수 있게 임하는 것이 아니요 또 여기 있다 저기 있다고도 못하리니 하나님의 나라는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 17:20b-21) 성령을 통해서 하나님의 통치가 우리 마음을 지배하게 될 때 우리 마음 속에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진다. 하나님 나라는 겨자씨처럼 우리 속에 머물지 않고 외면적으로 확산된다. 하나님의 통치는 단순히 영적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우리 삶의 모든 영역 속으로 우리의 선한 행동을 통하여 실현된다. 그런 의미에서 영적 비가시적인 통치적 실재는 내면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이 우리의 기도와 헌신과 행동을 통하여 우리 개인, 가정, 직장, 사회, 국가, 생태계, 우주 속에서 외면화되어 가시적으로 나타난다.

2. 복음주의적 이해

하나님의 나라 이해에 있어서 복음주의와 칼빈주의의 차이가 있다. 복음주의(evangelicalism)는 개인의 변화에만 집중하나 사회적 변화에는 관심을 갖지 않는다. 세상의 억눌린 자와 불행한 자를 돌보는 일은 여태까지 하나님의 몫이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1974년 로잔언약(The Lausanne Covenent) 이후 복음주의는 복음전파와 사회적 참여를 동전의 양면으로 보는 신앙적 발상을 획기적으로 진전시켰다.(김영한, "교회의 사회적 책임: 신학적 성찰," 「개혁주의 이론과 실천」, 개혁주의 이론실천학회편, 2014년 제6호, 11-49.) 이는 복음주의자들 가운데 다수인 칼빈주의자들의 영향이라고 할 수 있다.

3. 칼빈주의적 이해

칼빈주의(calvinism)는 사회의 변혁에 관심을 가지는 신앙체계다. 칼빈주의는 억눌린 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는 "세계 형성적 기독교"(the worldforming Christianity)다.(Nicholas Wolterstorff, Until Justice and Peace Embrace, Grand Rapids: Eerdmans. 1983. 2nd ed. 1994; 홍병룡 역, 『정의와 평화가 입맞출 때까지』, IVP, 2007, 1장.) 칼빈주의는 부조리한 사회 질서와 구조를 개혁해서 새롭게 형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개혁사상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인간이 사회적 불의에 의해 고통받고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다. 그래서 그리스도 안에서 인간이 서로 더불어 평화롭게 사는, 약자의 권리가 보장될 수 있는 그런 사회를 지향한다. 하나님의 평화가 임하는 사회가 그런 사회다. 이런 기독교라야 세계를 형성해 가는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기독교는 세상에 등을 돌리고 만다. 이것이 칼빈이 발견한 기독교였고 이것을 칼빈주의라고 한다. 종교 개혁자 루터는 사회변화에 소극적 이었으나 그보다 26년 후에 태어난 칼빈은 적극적이었다. 종교개혁 이전의 기독교는 어거스틴적이고 중세적인 회피적 기독교로서 내세 지향적이었다. 복음주의는 신앙의 내면화에만 주력했으나 칼빈주의는 이러한 내면적 기독교 전통을 그대로 이어받고 있으면서도 사회 구조 개혁에 힘을 쏟았다.

4, 신칼빈주의적 이해와 해방신학적 이해

미국 예일대 명예교수인 기독교철학자 월터스토프(Nicholas Wolterstorff)는 칼빈주의 전통을 계승하면서 사회변혁을 추구한 두 신학 사조를 탐색한다. 그것들은 칼빈주의를 보다 사회변혁적으로 변형시킨 신칼빈주의와 해방신학이다. 전자는 19세기 말과 20세기 초에 아브라함 카이퍼(Abraham Kuyper)를 중심으로 네덜란드에서 발전한 신학이요, 후자는 20세기 후반기 남미 콜롬비아 메데인에서 주교회의 즉, 메데인 회의(1968년) 후 남미 카톨릭에서 유래하여 아시아와 아프리카에 영향을 준 신학이다. 신칼빈주의(neo-calvinism)는 문화 개혁과 관련하여 우상숭배를 배척했고, 경제 성장을 궁극적인 선으로 취급하는 세계 체제를 우상숭배라고 비판한다. 해방신학(liberation theology)은 지배 및 착취와 관련하여 인간 해방을 주장하면서 탐욕과 권력욕에 추동되어 오늘날 부유한 국가들이 가난한 나라들을 지배하는 세계 체제를 부조리한 구조요 죄라고 규탄한다. 해방신학의 시각에서 보면 신칼빈주의는 성장 우상에서 우리를 자유롭게 해줄 전략은 제시하지만, 스스로 억압과 착취에서 해방되려고 싸우는 집단들에 대해서 대안을 제시해 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는 보수주의가 진지하게 고려해야 할 평가다. 그러나 해방신학의 한계는 해방신학이 하나님 나라를 종말론적으로 보지 않고 지상의 이상향과 동일시하는 데 있다. 하나님 나라는 결단코 인간이 구현하는 지상 위의 이상향으로 실현될 수 없다는 종말론적 단서(eschatological proviso)가 도외시 되었기 때문이다.(고범서 편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