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중 앞에 서는 신학자들이 반드시 갖추어야 할 세 가지의 태도가 있다.

첫 째는 대중의 영혼을 사랑하는 진정성이다. 대중 앞에 서는 신학자들은 그들을 하나의 영혼들로 볼 수 있어야 한다. 자신들의 인기 몰이를 위한 발판으로 보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사랑하시는 영혼들로 봐야 한다는 말이다. 신학자들이 이러한 사실을 잊어버리는 순간 대중은 영혼 없는 상품처럼 취급되어 이용당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신학자들은 대중을 바라볼 때에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양들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한다.

둘 째는 대중에게 확실히 검증된 것만을 전하는 전문성이다. 신학자들의 한 마디, 한 마디는 목사들의 백 마디 보다 강하게 어필된다. 그들이 소유하고 있는 스펙이 대중에게 신빙성을 주기 때문이다. 목사들의 설교는 무조건 비판하는 자들도 신학자들의 강의는 무비판 적으로 수용하는 이유가 이 때문이다. 신학자들은 이러한 현상을 인지하여 한 마디, 한 마디를 정확하고 정직하게 해야 한다. 내가 신학교에서 경험한 일들 중에서 잊지 못할 일 하나가 있다. 수업 시간에 궁금한 부분이 생겨서 교수님께 질문을 했다. 질문을 들으신 교수님께서는 방긋 웃으시더니 "I don't know."라고 말씀하셨다. 나에게 있어서는 큰 충격이었다. 웬만한 교수 같으면 수 십 명이 넘는 학생들 앞에서 모른다고 답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자존심을 지키기 위해서 이리, 저리 둘러 댔을 법도 하다. 그러나 교수님께서는 그렇게 하지 않으셨다. 자신도 그 질문의 답을 찾고 있는 중이기에 지금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씀하셨다. 이러한 교수님의 태도는 그 어떠한 교수님들의 가르침보다도 내게 크게 다가왔다. 대중 앞에 서는 신학자들도 이와 같아야 한다. 모르는 것은 모른다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신학자. 그리고 말할 때에는 확실히 검증된 것만 말할 수 있는 신학자. 이런 신학자들은 대중이 원하는 신학자들은 아니지만 그들에게 필요한 신학자들임에 틀림없다.

셋 째는 대중의 무지를 악용하지 않으려는 양심성이다. 예컨대 히브리어나 헬라어는 신학생들에게도 어려운 과목이다. 명사의 성이나 동사의 태, 형용사의 용법 등이 한국어와는 판이하게 다르기 때문이다. 게다가 히브리어와 헬라어 사이에도 커다란 차이가 있어 이 둘을 완벽하게 공부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물며 신학교를 다니지 않는 일반 교인들은 어떨까? 그러므로 대중 앞에 서는 신학자들은 그들의 무지를 근거로 히브리어나 헬라어를 악용해서는 안 된다. 대중의 원어에 대한 무지를 이용하여 여러 방향으로 접근될 수 있는 가능성들을 배제하고 그들이 고수하는 하나의 편협한 접근법만 옳다고 가르침으로 possibility를 certainty로 몰아가지 말라는 말이다. 왜 창세기 1:1의 주어는 복수 명사인 반면 주어를 받는 동사는 단수인가? 왜 요나서에 등장하는 물고기의 성이 다른가? 왜 구약에 등장하는 성령과 신약에 등장하는 성령의 성이 다른가? 왜 요한 계시록에 등장하는 짐승의 수는 666과 616으로 사본이 나뉘는가? 대중으로부터 이런 질문들을 받은 신학자들은 (1) 제시되고 있는 해석들을 먼저 설명하고 (2) 그것들을 문법성과 역사성 등으로 검토해 주며, (3) 그 다음에 자신들이 선택한 해석이 무엇인지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므로 대중이 직접 바른 해석을 선택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생략하고 자신이 믿는 부분만 마치 사실인 것 처럼 이야기 하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닌가?

신학자 들이여,

대중이 영혼들로 보이지 않는다면 그들 앞에 서지 말아라.
대중에게 추측들만 전하려거든 그들 앞에 서지 말아라.
대중의 무지를 악용하려거든 그들 앞에 서지 말아라.

귀한 시간을 할애하며 당신들 앞에 앉아 있는 그들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실 정도로 사랑하시는 귀한 영혼들이기 때문이다.

 

[출처: pastor Sanghwan A. Lee , http://sanghwanle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