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과응보에 대한 인간의 상식

조덕영 박사
(Photo : ) 조덕영 박사

인과응보(因果應報)는 본래 선(善)을 행하면 선(善)의 결과가, 악(惡)을 행하면 악(惡)의 결과가 반드시 뒤따른다는 불교적 용어다. 불교도가 아니더라도 사람들은 보통 늘 상식을 중심으로 사고하는 경향이 있다. 편견선입관(偏見先入觀)이다. 즉 "콩 심은데 콩 나고 팥 심은 데 팥 난다", 이 같은 인과응보적 사고는 인간이 품은 아주 오래된 편견 가운데 하나다.

욥 친구들의 인과응보적 사고

창세기 1-11장을 제외하면 욥기는 성경 중 가장 오래된 내용이다. 오래된 책인 만큼 욥기에는 십계명이나 모세의 율법이 보이지 않는다. 대신 인간의 선·악, 죄악과 심판, 상과 벌 등 인간이 지닌 생생한 문제들이 파노라마처럼 나열되고 있다. 이 오래된 욥기에도 인과응보적 사고가 내재되어 있음을 보게 된다. 먼저 욥에게도 그런 생각이 있었다. 그는 아들들이 범죄할까 염려하여 근심 속에서 하나님께 정성으로 제사를 드렸으며(욥 1:5), 절대자의 명령을 입술로도 어기지 아니하였다(욥 23:12). 욥은 하나님께 인정받은 '동방 사람 중에 가장 큰 자'요(욥 1:3), 대중과도 친밀한 '선교사 바나바처럼 누구에게나 인정받는' 안위(安慰)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욥에게 커다란 고난이 닥쳤다. 단순한 고통이 아니었다. 그 절망과 탄식은 감당키 쉽지 않은 대재난이었다(욥 3장).

이 재난의 해석과 해결을 위해 욥의 친구들이 나셨다. 그들은 거처가 각기 다른, 여러 지역 출신들이었다. 욥이 우스 사람이었던 반면, 그의 친구들은 수아(빌닷), 나아마(소발), 데만(엘리바스), 부스(엘리후) 등 타 지역 사람들이었다. 하지만 서로 문화가 같지 않아도, 어느 지역 출신이더라도, 인간의 상식은 늘 별반 다르지 않다. 재난의 원인을 찾을 수 없었던 욥이 자신의 고통에 대해 결백을 주장한 반면, 친구들은 상식과 인과응보 원리로 맞섰다. 선한 창조가 아담과 하와의 불순종으로 인한 악의 범람으로 파괴된 것처럼, 욥의 고난은 드러나지 않은 그의 심각한 죄로 인한 하나님의 당연한 징벌이라는 것이다. 욥과 친구들의 대화가 얼마나 치열했던지, 그 내용은 욥기 4장부터 31장까지 지속된다. 그러나 그 논쟁은 어떤 범주를 만들며 그 카테고리 안에서 해결책을 찾을 수 없이, 꼬리에 꼬리를 물며 인과응보의 논리 속에서 순환될 뿐이었다. 어거스틴이 「신국론」에서 선과 악의 목적에 대한 철학적 토론이 288개 학파를 만들 만큼 결론 없이 맴돌고 있음을 기술한 것도, 바로 인과응보가 가장 큰 이유일 것이다. 이렇게 인간은 인과응보의 범주 속에 갇혀 우물 안 개구리처럼 살아간다.

그렇다면 좀 더 젊은 엘리후의 생각은 어떠했을까(욥 32-37장)? 엘리후는 그나마 좀 나은 충고를 한 친구였다는 일부 신학자의 견해가 있기는 하다. 하지만 하나님은 욥의 친구들의 그럴듯한 충고에 대해 폭풍 가운데 나타나셔서 "무식한 말로 내 뜻을 흐리게 하는 자가 누구냐?"라며 일거에 무시해 버리신다. 욥과 친구들을 향한 엘리후의 장황한 말은 그럴듯하나, 그의 충고도 실은 결국 자신의 경험 속에서 나온 것에 불과했다. 물론 사고가 유연한 젊은이의 경험이 어떤 특정 분야에서는 연장자들보다 더 탁월한 혜안을 가질 수 있는 경우가 없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악과 고통의 문제만큼은 분명 다르다. 이 문제에 대해 젊은이가 좀 더 깊은 성찰을 할 수 있다는 주장은 동서고금(東西古今) 어디에서도 찾을 수 없다. 상대적으로 젊은이였던 엘리후의 말도, 결국 욥과 그의 세 친구들처럼 죄악된 인간의 감정 속에서 나올 수 있는 그런 상식 수준의 충고요 감정 토로에 불과하였던 것이다.

세상과 차원이 다른, 기독교의 인과응보

여러 경우에 성경 안에서도 인과응보적 상식이 작동하기는 한다. 즉 죄의 삯은 사망인 것이다. 하지만 또한 인과응보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는 태도는 우리 인간이 범하는 가장 일반적 실수이다. 참된 기독교는 전혀 그렇지 않다. 기독교에는 내재(內在)를 사는 피조물인 인간의 상식을 초월하는 진리가 있다. 이 초월의 진리에 따르면 때로 인간 상식 가운데 감당키 어려운 커다란 과오가 용서되는가 하면, 반대로 아주 작은 교만처럼 보이는 일이 심각한 화근과 심판을 가져오기도 한다.

인간의 상식과 판단을 넘어서는 이런 일들은 세상 속에서 비일비재하다. 하나님의 위대한 영성의 인물들인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과 모세와 아론과 다윗과 사무엘과 엘리와 히스기야의 자녀들을 보라. 이 위대한 인물들의 자녀 가운데 천륜과 인륜에 반하는 이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또한 예수님의 족보를 보라! 이방 여인(룻)이나, 술집 작부(라합)나, 시아버지 유다의 자녀를 낳은 다말을 보라! 유대인과 한국인들은 세상에서 최고로 정밀한 족보 체계를 보유한 민족이다. 한국인들이야말로 족보 체계에 대한 이해가 아주 빠르다. 한국의 족보들을 보라! 그 많은 간신배들과 역적들은 족보 속에서 거의 잘 보이지 않는다. 조선왕조실록에 보이는 수많은 유명 인물들의 과오와 실책이, 각 성씨들의 족보 속에는 잘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족보는 유교적 충효 사상 중심으로 인물들을 채색한다. 부끄러움을 숨기고 장점은 부각시켜 인과응보에 대응하려는, 각 성씨 족보 기록자들의 신념 탓이라고 보아야 할까? 하지만 예수님의 족보에 오른 인물들의 과오는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아무도 자기를 속여서는 안 된다. 사도 바울은 이 세상에서 스스로 지혜롭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정말 지혜로운 사람이 되려면 어리석은 사람이 되라고 말한다(고전 3:19). 특별히 인과응보에 관한 한, 분명 이 세상 지혜는 하나님께 미련한 것이다(고전 3:19). 기독교는 인과응보를 전면적으로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세상과 차원이 다른 인과응보론을 가질 뿐이다. 즉 그 인과응보적 상식의 선악관과 심판 사상은, 십자가 앞에서 여지없이 부서져 버리는 것이다. 마치 욥 친구들의 그럴듯하고 현학적이며 현란한 충고들이 하나님의 폭풍우 가운데 허망하게 흔적도 없이 무시된 것처럼.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