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능을 따르는 잘못된 선택을 했다가 한 순간에 죄를 짓고 철창신세가 된 담장 너머의 사람들. 태초의 선악과 사건 이후로 인간은 자력으로는 절대 구원받을 길 없는 존재이고 모태에서부터 뼛속 깊이 죄인임을 믿는, 또 특정 환경에 놓이면 깨질 수밖에 없는 돌처럼 누구나 예외 없이 조건만 마련되면 범죄를 저지를 가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달을 정도로 정직한 자기성찰을 할 줄 아는 크리스천들이라면 그들에게 돌을 던질 수는 없으리라. 하지만 그들을 함부로 정죄하지 않는 것과 “내가 옥에 갇혔을 때에 너희가 와서 보았느니라…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니라”라고 하신 예수님의 심장을 품고 그들을 돕는 것은 전혀 별개의 일이다. 미국 내 여러 교도소와 유치장의 한인들을 찾아다니며 길과 진리, 생명이신 주님께로 인도하는 특수목회를 20년 가까이 해 온 ‘큰사랑선교회’(City of Refuge Mission Center) 김운년 목사가 귀한 이유다.

막내아들 입양 계기되어 재소자 돕기 헌신
복음전파 성경공부 교육지원 등 활동 다채
“연말연시 음지의 이웃들에게 사랑을”부탁

큰사랑선교회  김운년 목사
큰사랑선교회 김운년 목사

대기업 간부 출신으로 1982년 미국에 온 뒤 은혜한인교회에서 소명 받고 오스트리아와 러시아 선교사로서 동구권 사람들을 섬겼던 김 목사가 이 길을 걷게 된 것은 의도적인 선택이 아니었다. 1996년 OC 아동보호국의 요청을 받아들여 가정 내에서 발생한 비극적 사건으로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는 수인의 몸이 된 남아를 위탁받아 키우다 입양한 것이 계기가 됐다.

“저희 부부는 배가 아파 낳은 아들 둘과 가슴으로 낳은 막내 하나를 두었습니다. 그 막둥이가 올곧게 자라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 영광 돌리고 있습니다.”

당시 뉴스를 듣고 안타까워하던 차에 전도하고 싶다는 부인 신디 김 사모와 함께 유치장으로 아이의 아버지를 면회 가면서 인연이 시작됐다. 김 목사는 어린 아들을 찾아봐 달라는 친부의 부탁에 수소문해 아동보호소를 찾았다가 위탁가정이 되어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처음에는 보호소의 청을 받아들일 생각이 전혀 없었습니다. 그런데 대학생이던 큰아들의 속 깊은 말에 마음을 돌이켰습니다. 밥상머리에서 한 주간 일어난 일을 나누는데 지금은 변호사가 된 그 아들이 ‘내 생각에는 아닌 것 같다’는 제게 이렇게 말했죠. ‘아빠, 기도해 보시고 얘기하시는 거예요? 저는 그 아이가 제 동생 같아요. 기도해 보시고 결정하세요.’ 그래서 다시 러시아로 가려던 꿈을 접고 아이를 데려왔습니다. 막내가 집에 오던 1995년 어린이날, 두 아들이 ‘나도 나이키 운동화가 신고 싶다’는 막내를 데리고 나가 신발을 사 주었고요.”

“세 아들을 기르면서 많이 회개하고 많이 은혜 받았다”는 김 목사는 막내를 데리고 친부를 면회 다니면서 갇힌 한인들을 만나게 되었고 우리의 아흔아홉 마리 양을 두고 한 마리 길 잃은 양을 피 흘리기까지 찾아다니는 목자의 마음으로 그들을 품게 되었다. 선교지가 해외가 아닌 감옥으로 바뀐 것이다. 그는 가주를 비롯, 애리조나, 텍사스, 오하이오, 조지아, 플로리다, 테네시 등 7개 주의 연방 교도소와 여러 곳에 흩어져 있는 가주 교도소, LA카운티 및 오렌지카운티 유치장 등을 직접 찾아가는 한편 편지로 재소자들의 마음 문을 두드린다.

큰사랑선교회는 재판을 받는 이들에게 법적 자문을 제공하는 것은 물론 성경공부, 개인상담, 도서 우송, 학위과정 및 기술 교육 지원, 사회적응 훈련, 한국으로 추방되는 비시민권자 임시거처 알선, 가족 소재파악 등 다양한 사역을 펼치고 있다. 특히 재소자들의 정규대학 및 대학원 학위 취득을 돕는 일에 힘을 쏟아 지금까지 경영학 석사 1명, 4년제 대학 학사 3명, 2년제 커뮤니티칼리지 준학사 8명을 배출하는 아름다운 열매를 거두었다. 이들의 시, 편지, 에세이 등을 모은 두 권의 책을 발간하기도 했다. 뿐만 아니라 가주 교도소들이 거의 사막에 있는 것에 착안, 강인한 생명력의 상징인 ‘선인장’이라고 이름 지은 뉴스레터를 매달 발송하고 있다.

큰사랑선교회 멤버 모임에서 김운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큰사랑선교회 멤버 모임에서 김운년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고 있다.

현재 보살피는 ‘옥중 영혼’들은 170여명에 달한다. 30대도 꽤 있지만 40~50대가 가장 많다. 여성은 10% 가량이다. 그가 섬기는 이들 중에는 미국을 떠들썩하게 했던 1996년의 쌍둥이 언니 살해미수 사건으로 유죄평결을 받고 복역중인 지나 한씨도 있다. 그가 마음으로 자식 삼은 16명의 재소자 가운데 유일한 딸로, 교도소 안에서 준학사 학위도 받았다. 이제 41세가 된 그는 형기(25년~종신형) 중 규정된 기간을 채웠기에 머지않아 가석방 청문회를 거쳐 자유의 몸이 될 것으로 기대된다. 범죄에 비해 지나친 형을 받았다고 여긴 한인사회가 구명운동을 벌이기도 했으나 소득을 거두지 못했다.

하나님의 사랑을 가장 많이 되새기는 추수감사절과 성탄절을 앞두고 선교회의 멤버들은 도움을 호소하는 편지를 보내느라 분주하다. 외교부 산하 재외동포재단과 CTS-TV, 뜻있는 독지가들의 지원을 받고는 있으나 재정적으로 늘 허덕이기 때문이다. 100여명의 후원회원이 있으나 활발하게 돕는 이들은 안타깝게도 약 20%에 불과한 실정이다.

김 목사는 “한인 재소자들은 많은 경우 가족들조차 가문의 수치로 여겨 외면하기 때문에 타인종에 비해 수감생활이 훨씬 어렵다. 이질적인 문화도 그들의 고통을 가중시킨다”며 연말연시에 커뮤니티가 음지의 이웃들에게 사랑을 보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큰사랑선교회는 주 및 연방 정부에 비영리단체로 등록돼 있어 기부금에 대한 세금공제가 가능하다.

교도소를 한 번 방문하는 데에만도 외부에 비해 비싼 식비, 개스비, 숙박비 등으로 250~500달러가 든다는 그는 “약속한 상금을 1월에 보내기 위해 당장 4,000달러를 모금해야 하는 형편”이라고 털어놨다. 선교회는 통신으로 성경공부를 하면 1년에 50달러, 독후감을 쓰면 30달러, 구약을 필사하면 130달러, 신약을 쓰면 80달러 등을 재소자들에게 지급하고 있다.

“다른 특수 사역들은 섬기는 대상의 사진을 홍보에 활용할 수 있지만 우리는 신분보호 문제로 그렇게 할 수 없기 때문에 후원자 모집이 더욱 어렵습니다. 재소자 가족들을 싣고 20만 마일을 넘게 달린 2005년형 미니밴도 교체가 시급한데….”

70세의 나이지만 여전히 재소자들의 기댈 언덕으로서 살면서 더 많은 것을 주지 못해 안타까워하는 그는 자신의 인간적인 약함을 구태여 감추지 않는다.

“이 사역이 너무도 힘들었습니다. 솔직히 여러 번 관두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우리 막내아들의 얼굴을 보면 그렇게 할 수 없었습니다. 대표를 맡고 계신 박경민 장로님 등 멤버들의 헌신적인 섬김도 눈에 밟히고요”

후원 문의: (714)514-9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