브라이언 스탠리 박사(Prof. Brian Stanley)
(Photo : 에든버러 대학교) 브라이언 스탠리 박사

호남신학대학교(총장 노영상)가 개교 60주년을 기념하면서 "존 로스 서거 백주년 기념강연: 스코틀랜드 신학에서 본 존 녹스와 존 로스"라는 주제로 국제학술대회를 진행하고 있다. 첫 강연자로 나선 브라이언 스탠리 박사(Brian Stanley)는 "민족주의와 기독교: 친구 또는 적? 20세기 동아시아 경험으로부터의 숙고"(Nationalism and Christianity: Friend or Foe? Reflections from East Asian Experience in the Twentieth Century)라는 주제로 발표했는데 20세기 초 동아시아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의 관계, 특히 한국의 경우에 주목해서 강연을 이끌어 관심을 모았다. 20세기에 대부분의 아시아에서 기독교와 민족주의가 상호 대립적이었던 것과는 달리, 한국은 놀랍게도 양자가 하나로 수렴되었던 예외적 경우로서 단연 돋보이기 때문이다.

스탠리 박사는 "20세기초부터 민족주의와 기독교는, 적어도 전통적이며 서구적인 기독교의 형태들에 있어서, 정면충돌 양상으로 치닫고 있었다고 추정한다"고 말하고, "20세기에 기독교와 민족주의 정체성 사이의 지속적인 수렴과정에 관해서 일부 예외적인 경우가 있는데 그것은 한국"이라며 "한국인의 민족적 정체성과 기독교인의 자의식, 특별히 개신교인의 정체성은 점점 더 하나로 수렴됐다"고 설명했다.

먼저 스탠리 박사는 "아시아에 있는 몇몇 민족주의 지도자들은 서양의 정치적 전통에 단지 선택적으로 의존하는 유럽적인 방식의 자치를 향한 토착적인 방식의 로드맵을 작성했는데, 모한다스 간디의 지도력 아래 형성된 인도의 민족주의 운동이 가장 명백한 예"라고 설명했다. 이어 "신문과 다른 인쇄 매체가 확산되면서 지역과 대륙을 가로질러 이 민족주의적 감정이 가속화 되자 다른 지역의 반식민주의 운동들도 간디의 예와 개념들을 모방했는데, 1919년 3월에 일제의 억압에 반대하여 가두시위를 했던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은 대중적 저항운동인 간디의 사티야그라하(불의에 대한 비폭력 저항)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했다.

더불어 그는 "1918년 미국 국회에서 발표된 우드로 윌슨의 유명한 14개조 평화원칙은 모든 식민지들의 요구들을 판결함에 있어서 '관련된 주민들의 이익은 곧 권리가 결정될 예정인 정부의 정당한 요구들과 함께 동등한 중요성을 가져야 한다'는 원리를 다가오는 강화조약의 기조 안에 포함시켰다"고 말하고, "윌슨은 자치라는 수단을 당시 유럽과 중동에 있던 제국주의 구조의 분열에 대한 최고의 해결책으로서 호소했다"면서 "그러나 그 생각에는 자치란 말에 외세의 지배 아래 사는 모든 민족들이 함께 일어나 식민지 멍에를 벗어 던질 권리가 있다는 것을 내포하지는 않았다"고 이야기 했다. 그러나 이는 "아시아와 아프리카에서 큰 뜻을 품은 많은 정치인들은 이것이야말로 정확하게 윌슨의 수사학이 암시하는 것이라고 생각했고, 따라서 1918-19년에 그의 생각과 함께 열정적인 열망을 수용했다"며 한국에 준 영향이 컸음을 설명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스탠리 교수는 "(1880년대까지 완전히 가톨릭 그룹이었던) 한국의 작은 기독교 공동체가 청나라 말기에 중국에서 기독교인들이 경험했던 것만큼 강한 반외세적 정서에 직면하게 되었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중에 한국 민족주의와 복음주의 기독교는 점점 더 견실한 동맹을 맺었다"고 설명하고, 존 로스의 성경번역으로 말미암은 기여도를 이야기 했다.

만주에서 한국인에게 처음으로 성경을 가능케 함으로써 봉인되어 있었던 '은자의 왕국'인 한국에 복음이 전파되는 것에 관심을 가졌던 존 로스는 단순히 한국의 기독교뿐만 아니라 한국민족 그 자체를 위해 심오한 함의를 가지는 번역과 출판 계획에 착수했다고 한다. 존 로스는 기독교 성경 번역가들이 전형적으로 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문법의 생산부터 시작했고, 처음으로 1877년에 한국 선교사들을 위한 영어로 된 한국어초급독본을 만들었다. 이후 1882년에 그는 한글로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대한 번역을 완성했고, 1887년에 그는 한국어 신약성경을 출판했다.

한국어 신약성경 번역을 위해 로스와 협력했던 이들은 첫 한국인 개신교인이자 만주에서 한국으로 간 첫 선교사들이 된다. 스탠리 교수는 "한글로 처음 출판된 책의 출현은 문화적 정치적 분야에서 보다 광의적인 의미를 가졌다"고 했다. 그는 "기독교와 서양 학문을 접한 한국의 지식인들, 특히 미국을 방문해 보았던 이들은 유교 사회의 강한 보수성에 대한 불만과 후기 메이지 일본에 의해 이루어진 정치적 경제적 개혁의 근대화에 대한 경의를 표했다"면서 "점차 한자보다는 한글을 수단으로 그러한 감정을 인쇄물을 통해 표현하는 방식을 선택했다"고 설명했다.

스탠리 교수는 이후 독립협회와 독립신문, 그리고 서재필 이승만 등의 인물들도 이 영향을 받았고, 일제시대에 들어서면서는 "개신교가 한국의 국치를 극복할 수 있는 가장 믿음직스러운 약을 제공한 듯" 보였다고 표현했다. 한일합방 이후에는 "개신교인의 출석률은 식민지배가 시작된 초기 10년 동안 흔들리긴 했지만, 이집트의 속박 가운데 있던 이스라엘과 억압받는 한국을 상징적으로 동일시하는 것은 한국 개신교인의 의식 안에서 강화되고 있었다"고 설명하고, 더불어 3.1운동에까지 영향을 미쳤다고 평가했다. "3.1운동은 개신교인들과 신전통주의 천도교종교운동의 추종자들 간에 이루어진 불편한 연합의 산물"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그는 "1920년대 인도와 중국에서 그러한 윌슨식의 민족자결에 대한 환멸은 초기의 민족주의 운동을 반서양의 방향으로 가도록 재촉했지만, 한국에서는 이러한 나라들과는 달리 개신교가 진정 자주성을 갖춘 교회를 향한 실질적인 진보를 이루어 나가고 있었다"면서 한국교회의 항일투쟁에 대해서도 "복음적인 영성과 정치적 행동주의는 하나의 강력한 혼합물로 융합됐다"고 평가했다.

물론 스탠리 교수는 "삼일운동이 한국의 독립이라는 목적을 실현하기 위한 미국의 지원을 얻는데 실패했다는 것이 잔인하리만치 분명해지자마자, 삼일운동 직후에 두드러졌던 복음적인 영성과 정치적 행동주의의 통합은 약화"됐다고 평가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민족주의, 점진적으로 자본주의 사이의 연합은 1995년까지 한국 개신교가 놀랍게 번창하는데 본질적인 것"이라며 "이 연합은 또한 이후에 번창의 기세가 상대적으로 꺾이게 된 것을 설명하는 데 도움이 된다"고 이야기 했다.

스탠리 교수는 "1970~1980년 일부를 제외하고 한국 개신교회들이 인권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 눈에 띄지 않았지만, 대신에 사회 문제들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으로서 개인의 회심을 간주하는 경향이 있었다"고 지적했다. 이어 "그들은 기독교를 편협한 형태의 한국적 민족성 그리고 자본주의와 함께 혼합하는 위험에 처했다"고 말하고, "아주 최근에 미국과 미국의 개신교 자유기업문화를 이상화하는 기독교 민족주의를 항상 반대해왔던 천주교회는 그러한 판단의 열매를 거두어 들이고 있다"면서 "1990년대이래, 개신교인수는 감소하고 있는 반면 천주교는 점진적 성장세를 보이고 있다"고 해석했다.

그는 "일제치하의 한국에서 기독교는 일제의 문화적 지배권에 저항하는데 있어서 지식인들과 대중들을 함께 끌어들이는 가장 강력한 자석과도 같은 기능을 했다"고 평했지만, "1953년 이후 남한의 많은 개신교 지도자들이 북한을 반대하는 논리에 점점 더 윤리적 가치를 부여하고 공산주의의 위협에 대항해서 가장 믿을만하게 방어할 것 같은 정권들을 무조건적으로 지지함에 따라, 식민지 시대에 형성된 민족주의적 유산들은 이전과는 다른 보다 명백하게 문제가 있는 특징을 띄게 되었다"고 지적했다.

결론적으로 스탠리 교수는 "'기독교 민족주의'는 항상 도덕적으로 모호한 실체, 잠정적으로 불완전한 혼합체일 것"이라 말하고, "우리는 헌신된 민족주의자인 동시에 그리스도께서 우리에게 명령하신 대로 우리의 국가의 원수들, 심지어 식민압제자들까지 사랑하는 사람들이 될 수 있겠느냐" 물으면서 "헌신된 민족주의자와 한결같은 기독교인 양쪽 다 되는 것은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성령의 은총의 특별한 수단을 필요로 한다"고 이야기 했다.

한편 20일부터 22일까지 열리는 행사에서는 스탠리 교수의 강연 외에도 "존 로스와 유교: 독신 재혼 축첩"(박준수 목사), "번역하는 선교사들: 존 로스와 최초 번역본의 소명"(Translating Missionaries: John Ross and the Vocation of First Translations, 길란 박사), "종교개혁 이후의 스코틀랜드 개혁신학"(Scottish Reformed Theology after the Reformation, 퍼커슨 교수)" 등의 강연이 계속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