빌립보교회 곽영구 목사
(Photo : 기독일보)

창밖에 단풍이 제법 들어가고 있습니다. 나뭇잎들을 보니 중학교 국어 시간에 배운 오 헨리의 작품 “마지막 잎새”가 생각납니다. 배운 지 오래되어 잘 기억나지는 않지만 대충 줄거리는 이렇습니다. 폐렴에 걸린 여자 주인공 존시는 창밖의 담쟁이덩굴 잎이 다 떨어지면 자신도 죽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아래층에는 걸작을 남기는 것이 평생의 꿈인 나이든 화가 베어만이 살고 있습니다. 어느 날 밤새 비바람이 몹시 불고, 그 다음 날 베어만은 싸늘한 몸으로 발견되고 며칠이 지나 죽게 됩니다. 반면 존시는 밤새도록 세찬 비바람 속에서도 나뭇잎이 한 개 여전히 남아 있음을 확인하고는 희망을 찾습니다. 그리고 병은 점점 회복되어 갑니다. 이야기를 맞춰보면 존시의 사연을 들은 베어만이 비바람 부는 밤 동안에 떨어진 담쟁이 잎 자리에 그림을 그려 넣고 자신은 죽음에 이른 것입니다.

작가는 화가의 삶을 통한 인간애와 희망과 의지의 여부가 얼마나 큰 영향력을 발휘하는 지에 대해 동시에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중학교 시절에는 화가보다는 여 주인공의 삶에 초점을 맞추었던 것 같습니다. 역시 실제보다는 생각하는 대로, 의지를 갖는 대로 삶을 이끌 수 있다고 말입니다. 그러나 이제 돌이켜 보면 여자 주인공의 삶에 대한 희망과 의지보다 더 부각되는 것은 자신을 희생하면서까지 다른 사람을 살리는 사랑입니다. 이것은 삶의 진정한 가치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서 비롯되는 것 같습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욕구만을 위해 사는 사람을 존경하지는 않습니다. 남을 위하고, 사회를 위해 헌신하는 사람들을 귀감으로 삼으며 닮으려고 합니다. 인간은 자신만을 위한 삶보다는 다른 이의 필요를 채우고, 다른 사람을 세울 때 비로소 살아갈 진정한 이유를 찾기 때문입니다. 특별히 훌륭한 분들이 아니어도 많은 사람들은 자신만을 위해서 살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우리 부모님들이 종종 하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부부간에 사이가 좋지 않아도, 자신의 삶에 의미를 부여하기 힘들 때도 이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자식 때문에 산다”고 말입니다. 한 때는 이 말을 부정적으로 생각하며 구태의연한 삶이라고 치부하며 너도 나도 자신을 위해서 사는 것이 마땅하다고 했습니다. 그러나 너도 나도 자신만 위해 사는 지금 우리는 점점 외로워졌음을 부인하기 어렵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기쁘고, 나를 위함보다 남을 위함이 따뜻해진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상대를 위하는 것이 상대를 돕는 듯 보이지만 사실은 자신이 사는 길인 것입니다.

이러한 인간의 성향과 삶의 목표는 하나님께 부여 받은 것입니다. 우리는 모습뿐만 아니라 속성까지도 하나님으로부터 지음 받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는 모든 것은 ‘사랑’ 때문입니다. 기쁨을 주심도 고난과 아픔을 주심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아들까지 주시기를 마다하지 않음도 그 사랑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사랑으로 우리 모두는 새 생명을 얻었습니다. 노 화가의 사랑으로 한 여인이 다시 살 희망을 찾았듯이 말입니다. 우리의 사랑으로 또 다른 누군가가 살게 될 것에 희망을 가져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