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덕영 박사
조덕영 박사

어거스틴이 악의 문제에 대해 접근한 이후, 루터와 칼빈 그리고 라이프니츠를 거쳐 이후 임마누엘 칸트, 헤겔, 화이트 헤드, 칼 바르트, 포사이스(P. T. Forsyth, 1848-1921), 몰트만 등에 이르기까지 이 문제를 다루어 왔지만 결론은 쉽게 나지 않는다. 철학과 신학의 거물들이 뛰어들었지만 결론이 쉽지 않다는 것은, 이 문제가 초월의 문제와 닿아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개혁신학자 벌콥도 하나님과 죄와의 관계에 대한 문제는 비밀로 남아 있다고 언급한다. 인간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아나, 하나님을 힘써 아는 일(knowing God)이란 그리 단순하지 않다.

천사나 마귀의 기원이 젊은 창조 연대에 우호적인가?

악의 문제를 젊은 창조 연대에 꿰맞추게 될 경우, 심각한 신학적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즉 젊은 창조 연대를 수용하면 악과 인간 타락의 책임을 하나님께 돌리는 신성모독의 위험성에 노출될 가능성이 더 커진다. 만일 창조 주간에 천사나 마귀의 기원을 배치하고 이것이 6천여 년 전에 일어난 일이라고 논증하면,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가 위태로워진다.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가 무너지면 복음주의는 '하나님의 하나님'을 설명하려는 영지주의 창조론에 그 주도권을 내주게 된다.

창조 연대 논쟁을 다루는 데 있어 세속 과학의 연구 결과를 수용하면 과학적 문제는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세속 과학과 충돌하는 젊은 창조 연대를 주장할 때 발생한다. 성경은 창세기 1장의 6일 창조 과정에서 천사나 마귀 창조에 대해서는 침묵한다. 따라서 마귀의 창조 연대나 기원에 대해 성경은 구체적 자료를 주지 않는다. 영적 존재에 대해 침묵하는 것은 창조 기간에 대해 인간들이 함부로 규정하지 않도록 하시려는 하나님의 섭리라고 볼 수 있다. 창조 연대 문제를 다룰 때 천사나 마귀 등 영적 존재에 대한 성경의 침묵 미스터리는, 창조 연대를 규정하는 데 큰 난관을 가져다 준다. 천사는 과연 언제 창조되었는가? 만일 6일 창조를 문자적으로 받아들이게 되면 천사 창조 문제는 심각한 딜레마에 빠져 버린다.

성경적으로 보면 천사도 분명한 피조물이다. 그러할 때 6일 창조에 천사 창조를 적용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신 분이 아니라 애시당초 미숙한 사단과 타락한 귀신들을 인류와 거의 동시에 창조하였으며, 이들은 곧바로 인류보다 먼저 창조주를 반역한 존재가 되었다. 그리고 창조 주간 이후 얼마 지나지 않아 아담과 하와를 타락시킨 장본인이 된다. 불완전한 마귀나 반역의 귀신들을 창조 주간(6천 년 전)에 창조하였다면, 하나님의 전지전능 교리에 아주 심각한 손상을 주게 된다. 또한 하나님을 마치 우주라는 그럴듯한 창조 판타지 연극의 대본을 만든 장본인을 만드는 격이다. 요컨대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역사적 창조 교리가 어긋나게 되면, 타락의 책임과 원인도 창조주 하나님께 돌려 버리는 누(累)를 범하게 된다. 또한 하나님의 선하심과 창조의 선함 교리와도 당연히 어긋난다.

창조론 문제에 대해 다양한 접근을 시도했던, "창조 과학" 운동의 실질적 원조가 된 헨리 모리스도 타락과 저주의 결과에 대해서는 열역학법칙 등을 동원하여 과학적 논증을 시도한 데 반해, 마귀의 기원 문제에 대해서는 별다른 창조론적 접근을 하지 않았다. 단지 헨리 모리스는 사단의 타락과 반역을 창세기 1장 31절과 뱀의 몸을 입고 하와에게 나타난 창세기 3장 1절 사이에 둔다. 모리스는 이 기간이 얼마나 되는지에 대해서는 성경이 침묵함을 인정한다. 물론 모리스가 말하는 성경의 연대 침묵은 오랜 연대를 말함이 아니다. 여기서 연대 논쟁의 신학적 딜레마가 생겨난다.

젊은 연대에 적용시키려고 마귀 창조를 창세기 1장 31절과 창세기 3장 1절 사이에 억지로 넣는 것은 분명 무리한 해석이다. 천사 창조 시기는 그렇게 인간이 규정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다.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 성경이 굳이 숨긴 부분을 무리한 해석으로 드러내는 것은 위험하다. 천사 교리에 있어 일치되는 안전한 개혁적 교리는, 천사도 피조된 존재라는 것과 그것들이 구체적으로 언제인지는 모르나 일곱째 날 이전에 창조되었다는 것 뿐이다. 따라서 연대 논쟁도 함부로 규정하면 안 되는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하는 당위성이 생긴다. 천사와 마귀의 기원 문제와 관련하여 생각해 볼 때, 성경(특수 계시)과 과학(일반 계시)이 규정하지 않는 부분을 인간이 이성으로 섣불리 판단할 때 연대 문제는 필연적으로 스스로 신학적 딜레마에 빠져 버리고 말 뿐이다.

창조과학과 젊은 창조 연대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과 괴리를 만들면 안 된다는 필자의 거듭된 충고로, 최근 한국의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자들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된 것은 바람직한 현상이다. 지난 2011년 여름 한국창조과학회가 주최한 모임에서 합동신학대학원대학교의 김병훈 교수(조직신학)는, 창조의 오랜 연대를 수용한 지적설계운동의 상징적 인물인 윌리엄 뎀스키의 견해를 비판하면서, 오랜 연대를 수용하면 악의 존재에 대한 설명이 불가하다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지적설계 운동을 비판하기보다 창조과학 운동에 힘을 실어 주기 위한 덕담이었다고 생각된다. 정통 신정론자(神正論者)들은 한 번도 연대 문제와 연관하여 이 쟁점을 거론한 적이 없기 때문이다.

영적 존재(마귀, 귀신 등)의 기원이 결코 젊은 창조 연대에 유리하지 않은 것처럼, 오히려 악의 문제도 결코 젊은 창조 연대에 우호적이라고 볼 수 없다. 악을 창조 주간(6천 년 전)의 창조에 묶어 놓는다고 악의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물론 뎀스키처럼 악의 문제를 6천 년 바깥으로 연장해 놓는다고 해도 문제는 해결되지 않는다. 악의 기원에 대한 논쟁은 수백 년 동안 성경·신학·철학 분야에서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었다. 이것은 초월 속으로 들어가지 않으면 해결하기 쉽지 않은 신비의 영역일 뿐이다.

지적 설계와 창조 연대

설계(設計)는 근본적으로 설계의 도덕성·미학·선악·최적 또는 완벽함과는 다른 문제이다. 또한 지적설계가 도구로 삼는 "환원불가능한 복잡성"도 도덕이나 선악과는 별개 개념이다. 설계의 왜곡(반목적론)은 설계를 거부함으로써가 아니라, 설계를 받아들인 다음에 악의 문제를 직면함으로써 설명되는 것이다.

즉 악의 문제는 과학의 문제가 아닌 신학적이다. 젊은 창조 연대 입장을 거부하는 뎀스키의 견해는, 이 같은 신학적 각성에서 나왔다고 본다. 즉 신학은 결코 젊은 창조 연대 쪽에 신정론적 승리가 있다고 편들지 않는다. 신정론 문제에 접근한 어떤 학자도 젊은 창조 연대를 편들지 않는다.

신정론 문제에 젊은 창조 연대가 우호적이라 보는 것의 위험성 

신앙은 그리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그것을 해석하는 것이 신학의 사명이다. 즉 악의 문제는 손쉬운 대답을 결코 주지 않는다. 마귀의 타락과 악의 기원이 신비로 덮여 있는데도 불구하고, 젊은 창조 연대가 신정론에 우호적이라고 함부로 논증하는 것은 "창조과학" 운동이 신학적으로도 옳다는 잘못된 시그널을 줄 수 있으므로 대단히 조심해야 한다. 어거스틴이 고백한 대로 하나님의 질서를 이해할 수 없는 시간 속에서 우리 인간은 각각 흩어져 있을 뿐이다.

젊은 창조 연대 주장은 영지주의적 관점에 성경 해석의 주도권을 선물하는 것이다

젊은 연대와 악의 문제를 동시에 논증하는 데는, '창조과학'보다 타락한 마귀와 악을 지은 여호와 하나님을 미숙한 창조주로 간주하고 '세상 창조주보다 더 큰 세상 창조주의 창조주'를 논하는 영지주의 창조론이 보다 더 유리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젊은 창조 연대를 함부로 고집하면 안 되는 중요한 신학적 이유이다. 6천 년 전 세상 창조(창세기 1장)에 6천 년 전 영적 존재 창조를 삽입하게 되는 순간, 악과 타락의 책임을 창조주 하나님께 돌리게 되어 전지전능 교리가 흔들리게 되고, 영지주의 창조론에 승리를 넘겨주는 누(累)를 범할 수 있다.

성경이 규정하지 않는 것, 해석의 걸림돌을 일부러 만들지 말아야!

따라서 마귀 타락과 악의 기원은, 성경이 언급하지 않는 이상 그대로 신비로 남겨 두어야 한다. 마찬가지로 연대 문제는 함부로 규정할 사안이 아니며, 아직까지는 신비의 영역으로 남겨 두어야 한다. 성경이 규정하지 않은 것을 인간이 규정할 때, 신정론에서도 걸림돌로 작용할 가능성이 높아짐을 명심해야 한다. 성경의 신비는 신비로 남겨 두어야지, 과학을 동원하여 규정하는 순간 오히려 신앙적 신비주의로 빠져들게 되는 것이다. 내재적 하등학문인 자연과학으로 초월 계시인 성경을 계도하겠다는 과학적 선민의식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조덕영 박사는

환경화학공학과 조직신학을 전공한 공학도이자 신학자다. 한국창조과학회 대표간사 겸 창조지 편집인으로 활동했고 지금은 여러 신학교에서 창조론을 강의하고 있는 창조론 전문가이기도 하다. 그가 소장으로 있는 '창조신학연구소'(www.kictnet.net)는 창조론과 관련된 방대한 자료들로 구성돼 목회자 및 학자들에게 지식의 보고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글 역시 저자의 허락을 받아 연구소 홈페이지에서 퍼온 것이다. '기독교와 과학' 등 20여 권의 역저서가 있으며, 다방면의 창조론 이슈들을 다루는 '창조론 오픈포럼'을 주도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