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베네딕트 선교사. ⓒ유스미션 제공
원베네딕트 선교사. ⓒ유스미션 제공

다니엘서 6장에 보면 사자굴에 갇힌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장면을 그린 대부분의 그림을 보면 다니엘을 젊은 청년의 모습으로 묘사한 그림들이 의외로 많습니다.

그러나 느부갓네살 왕 때 십대 소년으로 포로로 끌려온 다니엘은, 벨사살 왕 그리고 다리오 왕의 시대를 지나면서 나이가 들었고 사자굴에 갇혔을 때 그는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과 달리 이미 80세를 넘긴 노인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기도의 사람이었습니다.

다니엘은 나이 들어 할 일 없는 노인이 아니었습니다. 다리오 왕은 전국 120개의 지역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을 두었는데, 그 지방 장관들 위에 총리 셋을 두어 지방 장관들에게서 국정 보고를 받으며 나라에 어려움이 생기지 않도록 보살피게 했습니다. 다니엘은 그 총리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습니다. 매우 중요하고 높은 위치의 공직자였고 바쁜 일정 속에 있던 사람이었음에 분명합니다.

그러나 그는 바쁜 일정 속에서도 매일 하루에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하는 일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할 일이 없었기 때문에 매일 세 번씩 하나님께 기도한 것이 아니라, 할 일이 많고 바쁘기 때문에 기도하는 일을 쉴 수 없었던 것입니다.

그의 힘과 지혜는 기도로 말미암아 주어진,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그래서 그의 대적들은 그의 기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애를 씁니다. 오늘날 기도하는 교회와 성도를 죽이려고 하는 사탄의 모습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막으면 교회와 성도는 더 이상 하나님의 능력으로 살아가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단 한 가지입니다. 기도의 중단입니다.

다니엘의 대적들은 다리오 왕을 회유해서는 30일 동안 기도하지 못하는 법을 만들어 공표했습니다. 지금도 일어나는 일입니다. 미국에서는 학교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는 법이 이미 1970년대에 만들어져 시행되고 있습니다. '종교자유법'이란 명목으로  공공장소에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단지 미국 뿐만 아니라 한국과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는 일들입니다. 그러나 사탄은 정부를 회유해서 합법적으로 기도를 못하도록 하는 것에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와 성도들을 바쁘게 만들어서 기도하지 못하도록 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사탄의 강력한 전략 중 하나입니다. 기도가 살면 죄가 죽지만, 기도가 죽으면 죄가 사는 것은 당연한 영적인 원리입니다.

기도를 실체화시켜야 합니다. 시간을 정해 놓고 기도하겠다는 결심은 누구나 합니다. 그러나 지속적으로 꾸준하게 기도하는 일은 쉽지 않습니다. 사탄은 우리의 기도의 끈을 끊기 위해 늘 우리의 육체를 회유합니다. 마음은 원이지만 육체가 약한 것이 우리의 문제입니다(마태복음 26:41).

나이 80세에도 여전히 매일같이 하루에 세 번씩 기도하는 것은 어느 날 우연하게 만들어진 습관이 아닙니다. 다니엘은 10대의 어린 나이에 바벨론에 포로로 끌려 오면서 하나님 앞에 뜻을 정했습니다. 하나님 앞에서 어떠한 사람으로 살지를 결정하고 그대로 실천했습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바벨론의 화려하고 풍성한 음식들에 현혹되지 않았고, 자기에게 베풀어진 왕의 음식과 그가 마시는 포도주도 거부합니다.

당시의 바벨론은 세계 최강대국이며 탐욕과 유혹이 가득했던 곳입니다. 그는 혈기 왕성한 청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세상이라고 말하는 바벨론의 유혹을 이기며 하나님을 향해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하늘의 영광을 본 자는 땅의 영광에 골몰하지 않습니다. 기도하는 성도는 땅은 잠시 스쳐 지나가는 곳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성도는 철저하게 하늘의 사람으로 살아가는 법을 배워야 합니다.

그러나 결심한다고 실천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위해 목숨까지도 바치겠다고 결심했고 고백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얼마 지나지 않아 예수님을 부인합니다. 그의 말은 거짓 맹세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진심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그 결심을 실천할 능력이 없었던 것 뿐입니다. 그래서 넘어진 것입니다.

우리가 얼마나 많이 결심하고 결정하고 그리고 입으로 선포합니까? 그러나 실천하지 못하고 작심삼일로 끝나는 것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능력은 기도에서 옵니다. 뜻을 정했으면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할 때 성령께서 도우시고 우리에게 힘을 주시는 것입니다.

다니엘은 연약한 십대 소년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기도의 사람이었고 자신의 힘과 능력이 아닌 하나님의 도우심으로 하나님 앞에 정한 뜻을 실천해 나갈 수 있었습니다. 다니엘은 기도를 자기의 삶에 실체화시켰던 것입니다. 그래서 다니엘은 어떤 문제가 닥쳐도 기도가 우선이었습니다. 기도하고 움직였고 기도하고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느브갓네살 왕이 꿈을 꾸고 꿈을 알아 맞추지 못하는 지혜자들로 인해 바벨론의 모든 지혜자들을 죽이라고 명령했을 때, 다니엘은 그의 친구들과 함께 기도합니다.

"하늘에 계신 하나님이 이 은밀한 일에 대하여 불쌍히 여기사 다니엘과 친구들이 바벨론의 다른 지혜자들과 함께 죽임을 당하지 않게 하시기를 그들로 하여금 구하게 하니라."(다니엘 2:18)

교회는 우리 자녀들에게 기도를 가르쳐야 합니다. 성공을 가르치고 꿈과 비전을 가지라고 말하기 이전에, 기도하는 삶을 보여주고 함께 기도하면서 그들로 하여금 기도의 능력을 경험하게 해야 합니다. 교회는 세상이 필요한 사람을 키우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쓰실 만한 사람을 키워야 합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엎드려야 합니다. 기도가 우리의 호흡이 되어야 하고 생활이 되어야 합니다. 몰아서 하는 빨래와 설거지가 되어서는 안됩니다. 오늘 하지 못했다고 포기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또 기도하기 위해 엎드려야 합니다. 기도하는 일을 포기하지 마십시오. 절대로 절대로 포기하지 말아야 합니다.

신앙생활을 어설프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을 향한 결단이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을 위해 살겠다는 결단이 있으면 목숨을 걸고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하나님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이 내 삶의 본질이 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느껴지지 않으면 고통이 느껴져야 하고, 기도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는 것이 정상입니다. 기도하는 시간도 가지지 않고 성경도 읽지 않았는데 TV 드라마가 즐거운 것이 고통과 답답함으로 여겨지는 것이, 영의 사람에게는 당연한 입니다.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시간을 하루의 삶 가운데 한 시간 이상 확보하지 못한 성도라면, 이미 신앙은 빨간불이 켜져서 위험한 상태라고 여겨야 합니다. 하루에 한 시간 기도하지 못하는 상태라면, 기도하기 위해 자리에 앉아 있지만 무엇을 위해 기도할지를 몰라 고민이 되는 상태라면, 이미 영혼은 중병에 걸려 있다는 신호입니다.

기도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것을 절실하게 깨닫고 인식하는 절망의 수준이 진정한 성도의 길입니다.

분주함은 사탄의 미끼입니다. 진정한 영향력은 대형교회의 수많은 성도들이 아닙니다. 사탄은 많이 배우고 똑똑한, 그래서 바쁜 수많은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사탄은 기도하는 한 사람을 두려워 합니다. 돈 많은 사람들로 인해 하나님의 일이 되는 것이 아니라, 기도하는 한 사람으로 인해 하나님의 역사는 일어납니다. 다니엘이 똑똑했기 때문에 바벨론과 바사 제국에 이르기까지 고위 공직자의 자리에 앉은 것이 아닙니다. 기도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높이신 것입니다.

하나님은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지혜를 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기도하는 다니엘에게 계시도 주시고 예언도 주셨습니다. 또한 기도하는 다니엘을 사자들에게서도 보호하셨습니다. 다니엘의 기도를 중단시키기 위해 대적들이 노력했던 것처럼, 사탄은 기도의 능력을 교회로부터 빼앗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습니다. 교회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바쁘고 분주하게 만들어 버립니다.

현대 교회는 목회자도 바쁘고 성도도 바쁩니다. 일은 많은데 정작 가장 중요한 기도를 놓치고 있습니다. 특히 목회자들로 하여금 기도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기도가 아닌 부수적인 것으로 목회를 하도록 미혹합니다. 새로운 프로그램과 세미나로 목회를 하도록 유혹합니다. 목회자들은 기도하는 시간보다 새로운 프로그램을 배우기 위해 무척이나 바쁩니다. 세미나에 참석하는 것으로 기도를 대신하게 만듭니다. 심지어 하나님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컴퓨터에 앉아 있는 시간이 더 많습니다. 양떼를 위해 기도하고 하나님의 지혜와 계시를 구하기 위해 하나님 앞에 앉아 있기보다는, 바쁘고 분주하고 움직이게 만드는 것이 사탄의 계략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설교 한 마디 못하는 것이 정상입니다. 하나님의 임재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사역할 수 있다는 것은, 사역이 직업이 되었을 때 나타나는 현상입니다. 다시 말해 종교의 영으로 충만하면 자신의 영적 상태와 상관없이 얼마든지 사역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분주함은 하나님의 종으로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게 치명적입니다.

원수는 분주함을 통해서 하나님의 종들을 공격합니다. 여기저기 불려다니면서 모임에 참석하고 사역하느라 정신이 없는 상태는 쓰임받는 상태가 아닙니다. 분주해서 하나님 앞에 엎드릴 시간이 줄어들고 그 시간이 형식적인 것이 되어 버린다면, 이미 그는 위험한 영적 상태에 빠져 버린 것입니다. 사역은 사람들의 요구가 아니라 하나님의 요구에 반응하는 것입니다.

현대 사회는 바쁨과 성공은 비례한다고 가르칩니다. 바쁘게 움직이라고 도전하고, 바쁘지 않은 사람은 게으른 사람 또는 실패한 사람으로 여깁니다. 세상은 바쁘게 움직여도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본을 따라 산으로 홀로 올라가는 시간이 많아야 합니다. 5천명 이상을 먹인 기적의 현장을 흩어버리고, 사람들을 떠나 기도하기 위해 산으로 가든지 배를 타고 한적한 곳으로 가야 합니다.

사탄은 우리의 영적인 안정감이 깨어져서 분주해지고 불안해지게 만들기 원합니다. 우리의 영혼이 태풍의 영향권에 들어가기를 원합니다. 안절부절 못하고 초조하고 기도하지 못하는 답답한 상태가 바로 그런 상태입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동행하는 사람은 태풍의 눈에 들어가 영적인 고요함을 만듭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흔들리지 아니하고 두려워하지 아니하며 하나님의 임재 가운데 가만히 머물러 있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하나님의 일하심을 보게 되는 사람입니다.

우리의 삶에 태풍이 불어올 때, 분주하게 움직이는 것이 아니라 기도의 자리로 가야 합니다. 태풍의 눈은 기도의 자리에서 만들어집니다. 거기에 우리의 안정감이 있고 우리의 평안함과 소망이 있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성벽을 쌓고 있던 느헤미야에게, 도비야는 여우가 올라가도 무너질 것이라고 조롱합니다. 지금도 하나님의 사람들을 조롱하는 수많은 도비야가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사탄이 원하는 것은 비웃움과 조롱하는 소리, 그리고 소문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 말에 반응하게 만들어서 사람과 싸우게 하고, 영혼을 낙심시키고 좌절시키길 원합니다. 우리가 묵상해야 할 말은 도비야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우리는 사람의 말에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에 반응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사람의 말로 인해 어려움을 당할 때, 기도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여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교회와 성도는 하늘의 능력을 소유하지 못합니다. 교회는 금과 은이 없어도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이것이 교회와 성도의 힘이고 능력입니다.

기도하는 사람은 하나님을 경외합니다. 기도하는 다니엘은 두려움이 없었습니다. 왕도 두려워하지 않았고 사자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오직 하나님만을 두려워했습니다. 다니엘 3장에 보면 느부갓네살 왕이 금으로 만든 신상 앞에 절하지 않는 다니엘의 세 친구들을 풀무불에 던져 버리는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들은 풀무불도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하나님만 두려워했습니다.

다니엘 4장에 느부갓네살 왕의 꿈을 해석하는 다니엘의 이야기가 나옵니다. 그 꿈은 느부갓네살 왕의 비참한 최후에 대한 꿈이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왕을 두려워하지 아니하고 꿈이 의미하는 바를 그대로 전합니다.

"왕이 사람에게서 쫓겨나서 들짐승과 함께 살며 소처럼 풀을 먹으며 하늘 이슬에 젖을 것이요 이와 같이 일곱 때를 지낼 것이라 그 때에 지극히 높으신 이가 사람의 나라를 다스리시며 자기의 뜻대로 그것을 누구에게든지 주시는 줄을 아시리이다."(다니엘 4:25)

당시 세계 최고의 권력자인 바벨론의 왕 앞에서 주눅 들지 않고 있는 그대로를 말할 수 있는 담대함은 기도에서 나온 하나님의 능력입니다.

뿐만 아닙니다. 다니엘 5장에 보면 벨사살 왕 때에 사람의 손가락들이 나타나서 왕궁 석회벽에 글자를 쓰기 시작합니다. 그 글자의 뜻을 알 수 없어서 다니엘이 그 글자를 해석했고, 그 글자의 내용은 벨사살 왕과 바벨론의 멸망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다니엘은 주저함 없이 있는 내용 그대로, 즉 왕 앞에서 왕의 죽음과 바벨론의 멸망을 말합니다.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세상을 두려워하고 사람들의 말을 두려워합니다. 교회는 여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범죄하는 것입니다. 여호와를 경외한다는 것은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죄를 미워하시고 죄에 대하여 심판하시는 하나님에 대해 두려워할 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도 마음먹는다고 생기는 것이 아닙니다. 찾아야 하고 구해야 합니다.

"은을 구하는 것 같이 그것을 구하며 감추어진 보배를 찾는 것 같이 그것을 찾으면 여호와 경외하기를 깨달으며 하나님을 알게 되리니"(잠언 2:4-5)

기도하지 않기 때문에 사람들이 원하는 말을 하려고 하고 사람들을 기분 좋게 만들려고 노력합니다. 기도하지 않는 설교자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사람들이 죄와 회개에 대한 설교를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그러한 설교를 하지 않는 것은 분명 범죄입니다. 사람들을 지옥으로 내모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랑, 복, 그리고 긍정의 힘, 재정에 대한 설교는 너무나 쉽게 들을 수 있는 설교들입니다. 기독교 방송에서 수많은 설교자들이 외치는 설교 내용이고, 기독교 서적들의 상당수가 이런 내용들입니다. 설교는 재미 있어야 하고 감동이 있어야 한다는 사람들의 요구에, 설교자들은 사람들을 웃기는 광대 아닌 광대가 되어가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원하는 말이 아닌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말씀을 선포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해도 하나님께서 원하시면 전해야 합니다. 사람들이 떠나가고 심지어 돌을 던진다고 할지라도 하나님께서 이 시대에 교회와 성도들에게 주기 원하시는 말씀이 설교자를 통해 증거되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과 부활, 그리고 십자가와 죄, 회개에 대한 설교를 듣기 힘든 시대가 되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이러한 설교를 안 하는 것이 아니라 못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설교는 공부한다고 이해되는 것이 아닙니다. 기도하지 않으면 절대로 이해할 수도 없고 계시가 없으면 전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능력를 주셔야만 전할 수 있는 것이 복음입니다.

성도는 기도해야 합니다. 무엇보다도 설교자가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종은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감동과 계시가 있어야 합니다. 하나님께 오는 감동과 계시로 충만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은 말씀과 기도 뿐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종은 엎드려야 합니다. 엎드려 있는 시간이 많으면 많을수록 하나님의 감동과 계시로 충만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절대적인 우선권이 되어야 합니다. 바쁘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엎드릴 시간이 없다면 하나님의 종으로 살아갈 특권을 잃어버리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나이 든 노인이었지만, 그리고 바쁜 일정의 고위 공직자였지만, 하루에 세 번씩 매일 같이 기도했던 것 이상으로, 하나님의 종이라고 말하는 목회자는 기도해야 합니다.

*본지는 현재 미국 세인트루이스 카버넌트신학교(Covenant Seminary)에서 신학을 공부하고 있는 원베네딕트 선교사(유스미션 대표)의 글을 [원베네딕트의 편지]라는 이름으로 비정기 게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