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이 돼 베란다 유리에 내 얼굴이 비췄다. 내 얼굴이 아니었다. 아무리 내 머리 속에서 지어버린다 해도 그 얼굴이 내 얼굴이 아니게 되는 게 아니었다. 어느 날 눈물이 하염없이 나왔다. '다시 23살 여대생으로 돌아갈 수 없다'는 현실에 절망뿐이었다. 그때 두 가지 방법이 있었다. 하나는 아파트 옥상에 올라가는 것, 두 번째는 하나님을 찾는 것이었다."

어떤이는 펜으로 시를 쓰고, 어떤이는 감옥 벽에 석탄으로 시를 쓰고, 어떤이은 부패한 권력의 벽에 피로 시를 쓴다면, 이지선 작가는 삶으로 시를 쓴다. 그가 전하는 한 마디 한 마디가 시어가 되어 어느새 가슴을 맑게 물들였다.

이지선 작가
(Photo : 기독일보) 이지선 작가가 미주평안교회 2014년 청년부 쉐마 여름집회

8월의 마지막 주 미주평안교회(임승진 목사)에서는 삶의 이유와 목적을 잃은 채 방황하는 청년들을 대상으로 "하나님의 소명"으로 라는 제목의 청년부 쉐마 여름집회를 열었다. 29일부터 31일까지 진행된 집회의 둘째날 저녁 7시에 청년들 앞에 선 이지선 작가는 작은 체구와 여리고 고운 목소리로 자신에게 닥쳤던, 그 작은 몸집으로는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끔찍한 사고와 절망을 극복할 수 있게 한 하나님의 계획을 전했다.

더 이상 떨어질 바닥이 없다고 여겨지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사실이 오히려 고통으로 다가오던 시기, 이 작가는 이게 마지막이란 심정으로 기도했다.

"그때는 하나님이 전지전능하다는 말이 너무 야속했다. 하나님께 기도했지만 대답이 없었다. 예배 때 나에게 이런 엄청난 일이 일어났는데 하나님에게 계획이 있지 않겠냐고 마지막 심정으로 기도했다. 목사님이 다가오셔서 "사랑하는 딸아"라 하셨고 그 음성을 하나님 음성으로 들었다. '너를 세상 가운데 다시 세우겠다. 병들고 힘들고 연약한 자들에게 소망을 주는 일을 하게 할 것이다'라 하셨다. 이 얼굴이 다 회복될 거란 말씀도 아니었지만 하나님께 계획이 있다는 말에 마음이 좀 달라졌다."

스물셋 여대생의 고운 얼굴을 다시는 가질 수 없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기까지, 자신의 얼굴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용기가 필요했다.

"거울 앞에 설 용기가 생겼다. '내 얼굴이 이렇게 생겼구나.' 차츰 이것을 받아들이게 됐다. 안면화상 환자들은 기억 속의 자기 얼굴과 현실의 모습의 괴리감 때문에 자살시도를 굉장히 많이 한다."

주님의 고난을 묵상하던 중, 이 작가는 주님의 위로의 한 마디를 듣게 된다.

"병실에 있을 때 솔직히 예수님도 나보다는 덜 힘드셨을 거 같다는 마음이 있었다. 예수님의 고난을 묵상하던 중, 예수님도 아프셨지만 나처럼 오랫동안 고통을 당하시진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그런데 예수님이 '네 고통과 두려움, 슬픔이 무엇인지 안다. 그 고통 안에 너와 함께 있었다'고 하셨다. 그 말 한마디가 눈물을 닦아줬다. 수백억의 돈을 준다고 해도 바꿀 수 없는 위로의 한 마디였다. 자기연민으로 울지 않을 수 있게 됐다."

"손 수술을 하고 하나님께 부끄러운 손이 되지 않게 해달라고, 혼자 힘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그 기도대로 됐다. 수술을 받기 전, 엄지손가락으로 자판을 두드릴 수 있었다. 병실에 있을 때 그때 그때 제 안에 생기는 감사를 기록했다가 2003년에 책을 냈다. 하나님이 주신 큰 선물인 거 같다."

"독자들로부터 많은 편지를 받았다. 그중 자살을 하려던 사람으로부터 '다시 살고 싶은 마음을 갖게 됐다'는 편지를 받았다. 하나님은 쓸모없어 보이는 이 흉터를 누군가에게 소망을 전하는 쓰셨다."

이 작가는 팬사인회 장면을 찍은 사진을 보여주면서 "수술하기 전 의사선생님이 사람 꼴 안 될거라고, 세상에 나갈 생각하지 말라고 하셨다. 의사 말은 진리가 아니었다. 제 삶의 주인인 하나님, 제 인생이란 영화의 감독이신 하나님께서 주신 약속처럼, 하나님은 세상에 소망을 얘기하는 자로 세우셨다"고 말했다.

그는 자신의 얼굴이 '나름대로 귀엽게 생겼다'고 느낀다며, 성격이 밝고 긍정적이거나, 자기암시가 뛰어나서가 아니라 하나님이 놀라운 기적을 행하셨기 때문에 이런 변화가 가능했다고 고백한다. "엄마의 사랑을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알 수 있었다. 사고난지 1년이 안됐을 때 죽을 때까지 아픔이 계속될 거 같아 두려웠다. 엄마에게 '엄마 인생과 내 인생을 바꿀 수 있다면 바꿔줄 수 있겠냐'고 물었더니 엄마는 '천번이고 만번이고 바꿔주겠다'고 하셨다. 아들을 보내주신 하나님 마음은 어떤 마음이었을까? 천번이고 만번이고 대신해주고 싶은 부모의 마음을 지니신 그 분이 아들을 보내주셨다."

어린이 장애인 재활을 돕는 푸르메재단(www.purme.org)의 홍보대사로 일하고 있는 이 작가는 이 재단 기금모금을 위해 2009년 뉴욕 마라톤 대회에 참가해 42.195km를 완주했다.

"인생을 마라톤에 비유하는데 마라톤을 하면서 그 이유를 알았다. 어디서 그만둬야 할지를 모르겠더라. 죽을 거 같은 고비가 많이 있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죽는 게 아니더라. 그만 뛸지 계속 뛸지 그 결정은 내게 달린 것이다."

"뉴욕센트럴파크가 목표지점인데, 센트럴파크 입구에서 한 사람이 '이지선 파이팅'이라고 쓴 피켓을 들고 기다리고 있었다. 그 응원에 갑자기 보폭이 커지고 발걸음이 빨라졌다. 한 사람의 은원이 얼마나 큰 에너지를 줄 수 있는지 깨달았다. 나도 힘들고 지쳐 있는 자에게 에너지를 주는 사람이 되어야겠다고 다짐했다."

이 작가는 현재 UCLA에서 사회복지학 박사과정을 밟으며 자신도 보통 사람들과 똑같은, 평범한 삶을 살고 있다며 '하나님의 길을 가고 있구나'하는 말을 듣고 싶다고 밝혔다.

그는 "하나님의 응답을 기다리는 동안, 하나님은 우리를 축복을 담을 수 있는 깨끗한 그릇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11년 전 인터뷰에서 '그때로 돌아가고 싶으세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11년이 흘렀지만 대답은 동일하다. 돌아가고 싶지 않다. 정말로 영원하고 귀한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깨달았다. 이 깨달음을 버리고 썩어질 것을 갖고 싶지 않다"며 청년들을 향해 "세상이 다 변해도 변하지 않는 진리를 발견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라"고 조언했다.

미주평안교회 청년부 "쉐마(SHEMA)"는 LA 청년들의 영혼구원을 위해 설립된 신앙공동체로 매년 여름 애리조나 피마를 방문해 인디언 부족을 대상으로 여름성경학교를 열며, LA지역에서는 매달 첫째주 토요일 홈리스 사역을 하며 1년에 한번 LA지역 유학생 초청 집회를 열며 복음전파에 힘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