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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곤 컬럼]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

기독일보 seattle@chdaily.com

입력 Jul 25, 2014 07:33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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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Photo : 기독일보)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인간(人)은 삶을 살아감에 있어서 홀로 살아갈 수 있는 존재가 아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인간을 만들때 부터 사람들은 혼자서 살도록 계획하시지 아니했기 때문이다. "여호와 하나님이 가라사대 사람의 독처하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돕는 베필을 지으리라 하시니라"(창2:18) 사람의 행복은 누군가와 함께 하는 것이며, 그 속에서 서로 서로 사랑하며 살아가는 것이다. 이것의 시작은 가족 공동체이다. 그리고 그 가족의 구성원들이 사회에 나아가 사회 공동체를 이루며 민족과 국가를 형성한다.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는 이러한 사회적인 구조속에 인간에 대한 정의를 "인간은 사회적인 동물이다."라고 했다. 그런데 '나 와 너'라는 존재가 '우리'라는 사회 공동체를 이루기 이전에 항상 갈등이 주어진다. 그 이유는 인간은 두가지 욕구의 얼굴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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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나의 존재가 너라는 존재와 가까이 하기 위해서 감정의 표현을 하기 이전에 적극적인 사고를 갖는 경우이다. 이번에 내가 그 사람을 '만날 수만 있다면', '기회가 주어진다면'꼭 나의 생각을 말할 것이다. 이것은 상대가 나에게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에 대한 두려움을 생각지 않는 것이다. 두번째, 욕구의 얼굴은 나의 존재가 너의 존재에 다가가서 말 하는 것을 두려워 한다. 그 이유는 상대가 혹시 나의 마음에 있는 생각을 표현하게 되면 거절할 것이라고 여기기 때문이다. 그리고 감히 내가 그 사람에게 접근하기에 '너무나 그 사람이 크게 보이며', '그 사람에게 그렇 수 없다.'라는 소극적인 말과 더불어 가까이 가려고 하는 것 조차  포기하는 경우이다.

이러한 것은 사람의 성격에 따라 다르지만 인간이라면 누구나 다 '욕구의 두 얼굴'과 '두려움의 갈등'을 가지고 있다. 이만큼 인간의 사회는 공동체의 형성이 쉬운것이 아니다. 처음 남녀가 만나 사랑을 이룸에 있어서도 이와 같은 두려움과 갈등의 과정이 주어진다.

어떤 사람은 만난지 얼마 되지 아니해도 가까워 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와는 반대로 아무리 다가서려 해서 좀처럼 쉽지 않은 사람도 있다. 후자의 경우를 잘  묘사한 노래를 하나 본다면 가수 이광조씨가 부른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이다. 이 노래 가사를 보면 " 아 당신은 당신은 누구시길래, 내 맘 깊은 곳에 외로움 심으셨나요, 그냥 스쳐 지나갈 사랑이라면 모르는 타인들 처럼 아무 말 말고 가세요, 잊으려면 할 수록 그리움이 더욱 하겠지만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당신을 난 난 잊을테요"이 가사의 뉘앙스로 볼때 어느 한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하는데, 상대가 그 마음을 모르거나 혹은 전혀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에 혼자서만 마음속에 담고 '짝 사랑'을 하게 된다. 그러나 혼자서만의 사랑이라 해도 누군가를 짝 사랑한다는 것은 순수한 사랑이다.

그런데 우리가 사는 사회에는 나와 정말로 가까운 곳에 살면서도 '가까이 하기엔 너무나 먼 사람들'이 많다. 그 사람들이 내가 몸을 담고 있는 가정에 식구들이거나 아니면 나와 함께 더불어 사는 이웃의 공동체라면 한번 쯤 나 자신을 뒤 돌아보고 관계형성을 이룸에 있어서 주어지는 두려움과 갈등에서 벗어나 진심으로 다가서야 한다.

별히 나와 가까이 사는 사람들과 삶을 나누면서 건강한 사회를 이루며 살아가야 할 사람들이 이민자들이다. 이민의 삶은 타문화와 관계형성을 이루고 살아야 하기에 그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이 말 할 수 없이 크다. 그것은 언어와 문화가 다르기에 상대에게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을 뿐 아니라 조금은 이해힐 수 있다 해도 더 깊은 나눔을 가질 수 없다. 이러기에 이웃과 30센치의 벽을 두고 수년을 살아도 서로가 왕래 한번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어쩌다 만나면 인사를 나누게 되는데 "안녕(Hi)"이나 "어떻게 지내십니까?(How are you)"라고 물어 보면서 얼굴에 밝은 미소 한번 하면 끝이다.

타국에서 타민족들과 함께 어우러져 살아가는데 있어서 이웃의 가족 구성원이 누구이며, 서로의 이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을 볼때, 참으로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이웃이다. 그런데 이민사회 속에서도 가까이 할 수 없는 사람들이 같은 민족에게도 많다. 이민사회의 관계를 이루는 공동체를 말한다면 그것은 누구든 교회라고 말한다. 이처럼 교회는 이민사회의 중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사람들의 만남의 관계, 직업과 그리고 교민들의 행사가 주로 교회나 교회 구성원들을 통해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교회가 이민 사회의 중심이라 할 지라도 교회 안에서 신앙공동체가 건강하게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다.

교회와 그 안에 구성원들이 신앙의 공동체 보다는 이해관계 형성으로 모여 집단 이기주의를 이루고 때로는 자신의 정체가 누군가에게 보여지는 것이 싫어 삶의 문을 닫고 살아가기 때문이다. 그리고 교회 구성원의 관계 형성도 같은 교회의 식구이어야만 계속적인 만남을 가질 수 있지, 그 교회를 떠나게 되면 자주 만나던 사람의 관계도 멀어지게 된다. 그리고 각자의 삶이 너무나 바빠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내어 나의 삶을 공유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교인들도 교회에서 일주일에 한번 만나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라는 일상적인 물음만 묻는다. 이것으로 볼때, 한 민족을 이룬 교회 공동체의 구성원들에게서도 서로가 가까이 하는 것이 쉽지 않다.

나의 삶에 이롭지 아니하고 내가 생각하기에 만족스럽지 못한다면 누구하고도 가까이 하려고 하지 아니하는 것이 이민자의 삶이다. 그리고 하나님과 주님을 믿는 신자들의 관계에서도 온전한 관계형성이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 이유는 나의 만족을 위한 신앙관 때문이다. 하나님께 기도와 간구를 드리는데 있어서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하지 않고 일방적인 요구를 한다. 하나님 "나에게 이것 주셔야 합니다.", " 하나님 저것도 필요합니다."라는 욕구 충족을 위한 기도이다. 하나님께 일방적인 기도의 응답과 나의 정욕을 위해 사용할 것을 하나님이 아시기에 구하여도 기도의 응답을 하나님으로 부터 받지 못한다. 그러면 너무나 쉽게 하나님을 등지고 신앙의 삶에서 멀어진다. 그리고 세상의 지혜를 택하고, 세상의 방법으로 삶을 살아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은 그런 사람이 돌아서기를 바라시며 한 없이 기다리는 '외로운 짝 사랑'과 '무조건적인 사랑'을 하신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지 못하는 것과 기도의 응답이 이루어지지 않다고 여기는 것은 내가 주안에 거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가까이 하시리라 죄인들아 손을 깨끗이 하라 두 마음을 품은 자들아 마음을 성결케 하라"(약4:8) 건강한 사회 공동체와 주님의 인도하심으로 건강한 교회 공동체를 이루어 가기 위해서는 나의 만족을 내려 놓고 이웃과 주님에게 다가 가야만이 행복과 축복된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문의 전화)425-773-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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