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태선 소장
(Photo : 기독일보) 아시안 약물중독 치료서비스 이태선 소장

우리는 정말 사람볼 줄 모른다. 도대체 사람을 평가하는 기준이 어디에 있는가?  단지 그 사람의 화려한 자기포장 (요즈음 한국에선 흔히들 영어인 Specification을 줄여서 '스펙'이라고들 부른다)은 평가의 최고 우선순위이다. 그리고 인기가 있으면 금상첨화이다.

이번 7월말에 있을 한국의 국회의원 보궐선거는 이런 현상을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국회의원 후보자 물색에 있어서 위의 두가지 사항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나머지 대중들은 정치인들의 공작정치에 말려들며 "우리가 남이가?"라며 각자의 한표를 선심쓰듯 적선한다. 오랜세월 그게 관행이었다. 그러니 중앙당의 공천심사라는 것이 자기당에 충성할 수 있는 소위 '싸움닭'이 될만한 인재를 발굴해서 "내새끼 이쁘다"며 당명만 보고 찍어주는 지역구에 내놓기만 하면 당선되는 오늘 한국의 현실은 유권자 스스로가 잘못된 정치를 양산하는 꼴이되고 있다. 결국 국회의원은 지역과 국가를 위해서 무엇을 할수있는 사람들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단지 국민들이 선사해 준 그 엄청난 권한과 잇권만을 챙기며 4년이란 긴 시간을 폼잡고 상대당과 싸움질하는 것이 고작이다. 그리고 그 자리를 지키기 위해서 열심히 '이쁜 내새끼'로 권력자들의 눈에들면 그뿐이다.  

사람이 완전한 것은 아니며 항상 정의로울수는 없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글을 쓸수 밖에 없는 까닭은 한국사회에서 벌어지고 있는 이 정치관행은 해도 너무할 만큼 서로가 서로를 속이며 민족과 국가를 황폐화 시키는 사기극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우린 한국의 역사 드라마를 통해서 이조 5백년이 사색당파로 찌들어 어떻게 몰락하고 있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아왔다.

아이러니하게도 해방이후 여태까지 소위 근대 민주정치를 표방하며 시작했던 한국정치의 현주소는 예나 지금이나 하나도 틀리지 않고 전개되고 있는 당파싸움의 진흙탕이라는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을 가능케 하는 근본적 요인은 니편 내편으로 서로 편가르며 지역 이기주의에 빠져있는 전체 유권자들의 무지몽매에서 비롯되고 있다.

얼마전 '찌라시'라는 영화를 본 적이 있다. 많이 들어본 말이다. 작년 언제인가 새누리당의 김무성의원이 노무현 대통령의 남북 정상회담 기록을 발설했다고 해서 법원에 고소되자 스스로를 변명하기 위해서 자신은 단지 시중에 떠도는 '찌라시' 수준의 정보를 인용했을 뿐이라고 말했던 그 '찌라시'말이다. 영화는 한국 사회가 권력과 금권에 집착하며 상대방을 모함하고 쓰러 뜨리기 위해서 개인의 사생활을 염탐하며 확대 재생산하는 지하정보망을 얘기하고 있었다. 그리고 사람들은 권력자들의 약점을 캐가며 자신들의 사업을 확장해 나가고 있다라는 먹이사슬의 현실을 실랄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영화는 영화일 뿐이라고 그저 즐기고 넘어갈수 없는 것이 지금 한국영화는 그 누구의 간섭도 받지않는 무소불위의 표현의 자유속에서 그 사회상을 적나라하게 고발하는 무서운 '앙팡 테리블'이다.

차라리 동남 아시아는 경제는 낙후되어 있지만 여전히 문명의 아날로그 시계에 머물며 집단적 삶의 그 순수성은 잃지않고 있다라는 사실에 비교해 볼때 한국이라는 나라는 단지 잘살기 위해서 몸부림치다보니 이제 OECD경제 선진국 반열에 올라 그 부(副)의 몸집은 커질대로 커졌지만 동반성장해야 할 정신적 가치관은 그 육중한 체구를 지탱하기에는 턱없이 허약하다 보니 이제 혈관에 기름이 잔뜩 끼는 동맥경화증을 앓고있는 상황임을 엄중하게 인식해야 한다.

우리는 더 이상 무의미한 삶을 살지 말아야 한다. 일신의 부귀영화만을 꿈꾸는 자는 죽을때 후회할 것이다. 그리고 그런 국민들이 많을수록 그 국가는 쇠락할 수 밖에는 없다. 자신의 존재가 이 땅에 왜 왔으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바로 알지 못한다면 사람으로 태어난 것은 국가적으나 개인적으로 슬픈 일이다. 국가가 바로설 때 그 국민들은 제대로 삶의 방향을 깨우칠 수 있다. 하지만 지금 한국사회에 국민들의 삶을 이끌어 줄수있는 지도자가 아쉽다. 단지 국민들의 인기에 영합하며 일희일비(一喜一悲)하는 그 얄팍한 정치철학만이 존재한다면 불행했던 역사는 반복될 뿐이다. 우리가 자신과 민족과 그리고 국가에 더 이상 죄짓지 않는 양심을 찾아가야 할 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