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성자
(Photo : 기독일보) 이성자 목사.

지난 금요일, 그동안 암과 투병하시던 함정돈 형제님께서 드디어 주님의 품에 안기셨습니다. 예수님을 믿지 않던 한 형제가 암을 통하여 주님을 만나고 성령을 받으며 놀랍도록 영광스럽게 변모하는 그 모든 과정속에서 저는 투병의 고통이 영혼의 희락을 이기지 못했으며 죽음이 영광에 삼킨 바 되었다는 성경말씀이 응하는 모습을 목도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었음에 감사드립니다.

죽음 전날 저녁 그 댁을 방문했을 때, 병자를 중심으로 그 방 가득했던 기이한 평화와 고요함과 아름다움을 저는 오래 잊지 못할 것입니다. 미망인 되시는 원인숙 자매님이 쏟아놓듯 간증을 하기 시작하셨습니다. "목사님, 하나님께서 제게도 남편에게도, 딸에게도 보여주셨어요. 이 사람이 주님의 신부가 되는 모습. 빛나고 흰 세마포로 단장하는 모습, 그리고 천국의 황금길을 걷는 모습, 평화로운 천국의 잔디밭에서 주님께 안겨있는 모습...." 그래서 우리 지금 너무 기뻐요. 너무 감사해요. 임종하셨다는 말을 듣고 달려갔을 때 오히려 성도들은 울었지만 정작 유가족들은 해같이 빛나는 모습으로 주님을 찬양하셨습니다. "드디어 예수님 품으로 갔어요!" 그러면서 슬퍼하는 친지들을 위로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나님의 위로가 참으로 놀랍다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위로의 하나님이십니다. C. S. Lewis 는 자신의 저서, '고통의 문제'라는 책에서 "창조주 하나님은 작품을 향한 화가의 사랑처럼 집요하고, 개를 향한 인간의 사랑처럼 전제적이며, 자식을 향한 아버지의 사랑처럼 신중하고 숭고하며 남녀의 사랑처럼 질투할 뿐 아니라 꺾일 줄 모르는 철두철미한 사랑으로 우리를 사랑하신다. 피조물이, 더욱이 우리 같은 피조물이 창조자의 눈에 그토록 엄청난 가치를 지니는 이유를 인간의 이성으로서는 설명할 길이 없다. 이 부담스러운 영광은 우리가 감히 받을 자격이 없고 어쩌다 은혜가 임하는 순간이 아니면 감히 바랄 수도 없는 것임이 분명하다." 그리고 고통은 하나님의 인간을 향하신 집요한 사랑을 표현하는 한 방법이라는 것이지요.

그런데 고통 가운데 위로의 하나님을 만나기 원한다면 우리는 오직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합니다. 하나님을 끝까지 의지하고 신뢰하는 것입니다. 필립 얀시는 ´내가 고통당할 때 하나님은 어디 계셨습니까?" 라는 책에서 극단적인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을 다양하게 만나고, 그들의 다양한 반응을 기록합니다. 그 반응들을 통하여 고통에 관한 대략 두 가지 대조적 반응을 발견하는데, 고통 자체에 집중하는 사람들과 고통을 넘어 하나님께 집중하는 사람들. 그리고 반응에 따라 그들의 삶은 하늘과 땅처럼 달랐습니다.

예를 들어 나치의 유대인 학살시 살아남은 두 생존자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엘리 위젤과 코리텐 붐. 엘리 위젤은 자신이 살던 마을 사람 1/3이 죽는 것을 보았고, 자기 어머니와 어린 여동생 및 가족 모두가 가열된 가마 속에서 죽어가는 냄새를 맡았고 그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 악몽의 밤을 그녀는 평생 잊지 않겠다고 7번 저주하고 7번 다짐했다고 그녀의 책 '밤'의 서문에서 말합니다. 그녀를 만나보았던 어떤 작가는 그녀에 대한 인상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수치스러운 송장사이를 걷다가 걸려 넘어지면서 길을 잃고 헤매이던 그 소름끼치는 경계선 안에 갇혀 있는 한 포로의 모습이었다." 그런가하면 코리텐 붐 역시 유대인들을 도왔다고 하여 체포되어 마찬가지로 수많은 사람들이 살해당하는 것을 보았고 그녀의 언니가 죽어가는 것을 지켜 보았지만 그녀와 그녀의 언니 벳시는 처음부터 끝까지 하나님을 신뢰했습니다. 기도와 찬양과 성경공부와 사랑과 희생의 서로 돌봄으로 수용소 생활을 이겨내고, 후에 희망과 승리의 상징이 되어 사랑의 하나님을 전하고 있습니다. 그녀가 겪었던 극심한 고통은 많은 고통 받는 자들에게 위로와 희망의 메시지가 되고 있습니다.

부디 고통가운데 하나님을 의지하고 신뢰함으로 위로의 하나님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