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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칠곤 컬럼] 왜 내가 해야 하는가

기독일보 seattle@chdaily.com

입력 Apr 22, 2014 06:38 P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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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로스 로드 한인교회 김칠곤 목사
크로스 로드 한인교회 김칠곤 목사

이민자가 살아가는데 가장 힘든 것은 삶이 고된 것이 아니라 의사소통을 원할하게 할 수 없는 언어와 이것과 함께 맞물려 움직이는 문화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누구나 이러한 문제를 가지고 살아가며 이것으로 인해 수 많은 오해 아닌 오해를 하게 되며 어떤 경우에는 마음에 큰 상처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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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히 정적인 문화를 가지고 살아가는 부모의 세대와 동적인 문화에서 자라나는 자녀들의 세대간의 언어 소통이 원할 하지 못해 세대간에 불편함을 많이 느낄 뿐 아니라 서로의 문화의 차이에 의해 부모도 자녀도 화(火)를 내는 일들이 여러 분야에서 발생한다. 화를 낸다는 것은 '불 같이 타오르며', '부글 부글 끓는 마음의 상태'를 마음속에서 밖으로 분출해 내는 것이다. 이렇게 분노를 표출하는 것은 우리의 일생 생활속에서 비일 비재 하다.

그중에 하나를 들자면 부모들이 아침부터 힘들게 일을 하면서 자영업을 하는 가게에 뭔가 문제가 발생하거나, 어딘가에 급히 볼일을 보러 가야 할때나, 뭔가 중요한 서류를 작성할때 마땅이 도와줄 사람을 찾지 못하면 어린 자녀들에게 사정 사정하여 도움을 요청한다. 그런데 부모의 기대만큼 자녀들이 쉽게 협조해 주지 못하는 상황도 발생 할 뿐 아니라 때로는 자녀들은 부모의 기대감과 대치되는 거부의 반응을 보인다.

부모가 자녀의 도움이 절실한 상황속에 자녀에게 거부를 당할때 상당히 실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자녀들이 미국 문화속에서 친구들이나 다른 사람들에게 얼마든지 평범하게 나눌수 있는 말을 하는데 어떤 때는 부모가 정말로 수용하기가 쉽지 않다.

그것은 바로 "나와 상관 없는 일인데, 내가 왜 해야하는가"( I do not care, why Should I do?)가의 말이다. 이말은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닌데 내가 그 일을 왜 해야 하느냐의 질문이다. 그러나 부모들은 "나와 상관 없다 "(I do not care)는 표현을 "나는 신경 쓰고 싶지 않다."는 말로 오해를 해서 자녀들이 그런 말을 할때 갑자기 화를 내는 경우가 많고 자녀들은 화를 내는 부모가 너무나 이해 가지 아니하여 정당한 이유를 제시 했는데도 부모가 계속적으로 화를 내는 것 같으면 자녀도 부모에게 같이 화를 낸다.

아무것도 아닌것 가지고 화를 통제하지 못하게 되면 화가 분노가 되고 그것이 마음속 깊은 곳에 쓴 뿌리로 자리잡으면 서로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불편함을 갖게 된다. 그리고 부모와 자녀간에 마음에 대화의 벽이 더 두꺼워져 나중에는 대화를 피하게 되는 불행한 삶을 살아가게 된다. 이러한 문제들 "왜 내가 해야 하는가'의 불편함이 종국에는"내가 원치 아니하는 모습들을 삶을 통해 드러나게 된다." 이것이 삶에 스트레스로 계속되어지면 육신과 정신적인 질병이 일어나게 되며 하나님을 믿는 그리스도인들은 심령이 상하게 된다. 신앙인에게 영, 혼, 육신의 3가지가 있다는 것은 신약성경 히브리서 4:12절에 언급되어 있다. " 하나님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어 좌우에 날선 어떤 검보다도 예리하여 혼과 영과 관절과 골수를 찔러 쪼개기까지 하며 또 마음의 생각과 뜻을 감찰하나니" 이 중에 영(spirit)은 인간의 육체적인 수명의 한계를 뛰어넘는 것으로 영원히 사는 것이다.

하나님의 자녀는 자연인이 가지지 아니한 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은 하나님이 사람을 살아있는 영(생령)으로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영은 하나님으로 부터 주어진 것이기에 하나님의 백성들은 마음속에 분노의 갈등과 쓴 뿌리를 육신과 정신만 가지고는 문제의 해결을 할 수 없다. 이것은 하나님의 자녀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에 의해 원죄가 회복되었더라 하더라도 인간의 연약성 때문에 불완전한 모습으로 마음의 분노를 완전히 씻어 낼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영이 아니고서는 마음 속에 있는 분노의 주기는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일어날 뿐 아니라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미움, 증오와 복수의 마음을 억누르게 하는 역활 이상은 감당할 수 없다. 이러한 마음의 감정을 억제 하는 것은 마치 병의 내부에 있는 탄산음료의 상태를 그대로 보관하기 위해 인위적으로 플라스틱이나 크라운 마개로 막아 두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나 언젠가 병을 좌우로 심하게 흔들고 병마개를 살짝만 열면 탄산 음료가 폭발적으로 솟아 오르게 된다. 사람의 마음속에 있는 분노의 억제도 치유를 받지 못하면 언젠가는 감정이 폭발하여 자신 뿐 아니라 주변에 있는 사람들에게 까지 심각하게 나쁜 영향을 주게 된다. 이로 말미암아 자신이 실수를 범했다는 죄성을 갖게 되며 수치감을 느낀다. 어떤 사람들은 수치로부터 자신을 이기기 위해 노력도 해보고 상황을 보다 나아지려고 하기 위해 자신과 상처를 받은 누군가에게 '다시는 이런 일 들을 하지 않겠다고 맹세'를 하기도 한다.

분노를 표출한 자신이 불편한 관계를 해소하기 위해 누군가에게 용서와 사랑을 보이려고 하지만 그것이 하나님에게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사람의 마음에 의한 것이라면 분노의 주기는 마음속에 잠복하게 된다. 그리고 상대가 나의 기대만큼 반응을 보이지 아니하면 "더 이상 용서하지 못하겠다.", "왜 나만 계속 해야하나?"라고 불평 불만을 마음속에서 뿜어낸다. 마음속의 분노의 근본이 해결 되지 아니하면 나 자신이 원치 아니하는 죄를 범하게 된다.

신약성경 로마서 7장 19-20절에서 말하기를 "내가 원하는 바 선은 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원치 아니하는 바 악은 행하는도다. 만일 내가 원치 아니하는 그것을 하면 이를 행하는 자가 내가 아니요 내 속에 거하는 죄니라" 그렇다면 분노의 해결의 키는 누가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리고 마음속에 깊숙히 자리잡고 있는 분노는 치유 될 수 없는 것일까? 이것의 대답은 마음속에 있는 분노는 치유될 수 있으며 그것을 해결하실 분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주님의 말씀, 기도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 분노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곧 하나님과 대화를 하는 것이며 사람이 호흡하는 과정을 비교해 보면 확실한 이해를 할 수 있다. 인간이 호흡을 하는데 좋은 호흡법과 나쁜 호흡법이 있다. 좋은 호흡법은 공기가 코를 통해 적정한 온도로 폐에 전달하여 폐안에 있는 노폐 가스를 몸 밖으로 품어 내는 것이다. 이것을 위해서는 맑은 공기 속에서 등산과 달리기 와 유산소 운동을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반대로 나쁜 호흡법은 폐에 건조한 공기나 차가운 공기가 전달 되어 천식, 폐렴, 바이러스에 감염이 된다. 그래서 사람의 호흡법은 인체의 건강에 큰 영향력을 준다. 이와 같은 호흡법을 사용하여 마음 속 깊은 곳에서 분노를 뿜 어내는데 그것은 곳 하나님 앞에 자신의 감정을 숨기지 아니하고 고백하며 자유함을 간구하고 분노의 모든 해결을 예수님에게 맡기는 것이다. 그리고 신선한 공기가 되는 주님의 진리의 말씀과 음성을 받아들여 내적인 치유함을 받아야 한다. 이러한 치유가 있어야만이 "왜 내가 해야 하는 가?"에 대한 답을 얻을 수 있다.

크로스로드 한인교회 김칠곤목사 문의전화) 425-773-9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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