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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염려할 필요가 없나?

기독일보 seattle@chdaily.com

입력 Apr 16, 2014 07:17 AM PD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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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론] 한국교회 위기의 탈출구: 다른 복음을 몰아내라

 

정성욱 교수
정성욱 교수

기복주의·율법주의와 더불어 오늘날 한국교회의 안방에 들어와 한국교회를 근원에서 무너지게 하고 있는 다른 복음은 방종주의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들은 오직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과 영생을 얻게 된다는 복음 진리를 바르게 회복하였다. 하지만 개혁교회의 역사가 진행되면서 순수한 은혜의 복음은 뒤틀림과 왜곡을 경험하게 된다. 그것이 바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의 등장이다. 여기서 율법폐기론이란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율법과 죄로부터 완전히 해방되었으므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 율법은 이제 완전 폐기된 것으로 여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은 더 이상 그리스도인의 삶에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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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율법폐기론은 윤리적 방종주의와 밀접하게 연결된다. 윤리적 방종주의란 "그리스도인들은 율법과 율법의 정죄에서 완전히 벗어나 자유하게 되었으므로, 어떻게 살아도 아무런 상관이 없다"는 주장이다. 아무렇게나 살아도 괜찮다는 것이다. 그래서 윤리적 방종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심각한 죄악에 자신을 방임하게 된다. 왜냐하면 "예수를 믿음으로 나는 구원을 받았고, 영 단번에 주어진 구원은 결코 상실될 수 없으며, 내가 계속 죄를 지어도 율법은 더 이상 나를 정죄할 수 없기에, 그리고 자백만 하면 주님께서 계속 용서해 주신다고 했기에, 내가 계속 죄를 지어도 상관 없지 않은가?"라는 생각을 품고 살아가게 되기 때문이다.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와 더불어 선행 무용주의가 등장하게 되었다. 선행 무용주의란 '선행이 구원의 조건이 결코 아니다'는 성경적인 가르침을 아주 극단적으로 밀고 가서,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선행은 아무런 의미와 가치가 없다"는 주장이다. 선행 무용주의에 물든 사람들은 "인생에 있어 가장 중요한 것이 구원인데, 그 구원을 오직 믿음과 은혜로 받았다면 그 이후의 삶에 대해 내가 고민할 이유가 무엇이며, 또 이미 구원은 따놓은 당상인데 왜 내가 선행에 대해 고민하고, 또 노력해야 하는가?"라는 잘못된 생각을 갖게 된다. 선행이 구원을 받는 데 아무런 유익도, 가치도, 의미도 없다면, 구원받은 이후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도 당연히 무의미하고 무가치할 수 밖에 없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 모두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결코 성경이 지지하지 않을 뿐 아니라, 결과적으로는 은혜의 왜곡이요 복음의 타락을 의미한다는 사실이다. 좀 더 자세히 들여다 보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는 성경과 복음에 대한 깊은 무지와 터무니없는 오해에서 나온, 심각한 오류임을 발견할 수 있게 된다.

로마서에 나타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

사실상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는 사도들이 활동하던 시기에 이미 존재했었고, 많은 사람들이 이 잘못된 가르침을 좇게 되었다. 바울이 로마서를 기록할 당시에 이미 이런 자들이 존재했음을 우리는 로마서 3장 31절을 통해서 알게 된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파기하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

로마서에서 바울은 여러 차례 "그럴 수 없느니라"는 표현을 사용해, 자신이 전한 복음을 반대하는 대적자들에 대하여 자신의 입장을 변호한 바 있다. 로마서 3장 31절에서도 바울은 복음의 대적자들의 주장을 반박한다. 그들의 주장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이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된다면, 결국 바울 당신은 그 믿음으로 율법을 파기하고 폐기하는 것이 아니냐?"라는 것이다. 하지만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우리가 믿음으로)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고 답변한다. 그 말은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의 복음이 율법폐기론으로 귀결될 수 없다는 것이다.

도리어 '오직 은혜에 의한, 믿음을 통한 칭의의 복음'은, 율법의 바른 용도와 의미와 가치를 굳게 세워준다는 것이다. 여기서 율법의 바른 용도와 의미와 가치란, 칼빈이 율법의 제3용도론에서 주장한 것처럼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들이 내주하시는 성령의 인도하심을 따라 이 땅에서 살아갈 때, (신약적으로 재해석된) 율법은 그들이 추구해야 할 거룩하고 선한 삶의 규범과 가이드로서 역할을 하게 됨을 뜻한다. 다시 말하면 율법을 통해서 그리스도인은 자신들이 열심으로 감당해야 할 선행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는 것이다.

이어지는 로마서 4장과 5장에서도 사도 바울은 이신칭의의 복음을 역설하고, 이 복음이 우리에게 가져다 주는 혜택들을 논의한다. 그리고는 5장 마지막 부분을 아래와 같은 말로 결론짓는다.

"율법이 들어온 것은 범죄를 더하게 하려 함이라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나니 이는 죄가 사망 안에서 왕노릇 한 것 같이 은혜도 또한 의로 말미암아 왕노릇하여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생에 이르게 하려 함이라(롬 5:20-21)".

여기서 바울은 율법이 범죄를 더하게 한다고 선포한다. 왜냐하면 성령께서는 율법을 통해 죄인이 자신의 죄를 깨닫게 하시기 때문이다. 그러나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욱 넘쳤다고 바울은 증거한다. 무슨 말인가? 죄를 더 많이 깨달으면 깨달을수록, 그 죄를 거저 값없이 용서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넘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문제는 이런 위대한 복음 진리를 오해하고 왜곡하는 사람들이 항상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들은 "그렇다면 은혜를 더하게 하기 위해 죄에 더욱 거하자. 우리가 죄에 더 거할수록 하나님의 은혜가 더 많아질 것이 아닌가?"라고 주장하게 된다. 아주 전형적인 방종주의적·선행무용론적 주장이다. 이 사람들을 향하여 바울은 "그럴 수 없느니라 죄에 대하여 죽은 우리가 어찌 그 가운데 더 살리요?"라고 반박한다. 그렇다.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을 받은 그리스도인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혀서 죄에 대하여 이미 죽었다. 원리적으로 죄와의 관계가 끊어지고, 무관한 존재가 되었다. 따라서 죄에 대하여 죽은 새로운 피조물은 결코 죄 가운데 더 살 수 없고, 그렇게 살아서도 안 된다는 것이다. 바울은 결코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면서 도리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무엇인지를 밝혀준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롬 6:4)". 여기서 새 생명 가운데 행한다는 것은 결국 선한 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렇다면 바울은 이 구절을 통해 우리가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목적이, 바로 새 생명 가운데 선한 일과 선행을 추구하는 삶을 살아가게 하기 위해서임을 정확하게 밝혀주고 있는 것이다.

이어지는 6장 12절부터 14절까지의 말씀을 통해 사도 바울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무용주의에 대한 결정적인 논박을 시도한다.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죄가 너희를 주장하지 못하리니 이는 너희가 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은, 은혜를 더하게 하려고 죄에 계속 거하면서 몸의 사욕에 순종하고 자신의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어 주는 어리석음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도리어 우리 자신이 마치 이미 부활한 자와 같이 우리의 몸을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빠지지 말고, 또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선행이 무용하고 무의미하고 무가치하다는 잘못된 생각을 버리고, 이미 우리의 몸이 영광스러운 부활을 경험한 것 같이 하나님을 위한 의의 무기로 드리면서 거룩함에 이르라는 것이다.

로마서 6장 14절 후반부에서 바울은 "너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음이라"고 말씀한다. 바울은 이에 대한 다른 반대론자들의 주장을 인용하면서 그들을 반박한다. "그런즉 어찌하리요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고 은혜 아래에 있으니 죄를 지으리요 그럴 수 없느니라(롬 6:15)". 여기서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닿아 있다. 우리가 법 아래 있지 아니하다는 말은 이미 율법으로부터 해방되었기에, 우리가 아무리 범죄해도 율법이 우리를 정죄하지 못한다는 말이다. 그리고 우리가 은혜 아래 있다는 말은 우리가 어떤 죄를 지어도, 어떤 식으로 방종한다 해도, 주님은 우리를 용서해 주심을 뜻한다. 그렇다면 "죄를 계속 지어도 되지 않는가?"라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그러나 바울은 다시 한 번 선포한다.

"그럴 수 없느니라."

왜 그럴 수 없는가? 왜냐하면 이미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의 복음을 마음으로 순종하여(롬 6:17), 죄에서 해방되어 의에게 종이 되었기(롬 6:18)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서 해방되어 의의 종이 된 사건은 이미 완료되고 완성된 사건이다. 의의 종이 된 자가 어찌 계속해서 죄를 지을 수 있겠는가? 원리적으로 뿐 아니라 현실적으로도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예수의 제자들, 하나님의 자녀들이 계속해서 죄를 짓는다는 것은, 계속해서 윤리적으로 방종한다는 것은, 계속해서 선행무용주의에 빠져 산다는 것은 그들의 정체성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사건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이어 "이제는 너희 지체를 의에게 종으로 내주어 거룩함에 이르라(롬 6:19)"고 명령한다. 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는 삶이 예수 그리스도의 신부들의 정체성과 일치하는 삶의 모습이라는 것이다. 이어서 바울은 마지막 결론을 다음과 같이 내리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너희가 죄로부터 해방되고 하나님께 종이 되어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었으니 그 마지막은 영생이라(롬 6:22)".

오직 은혜와 믿음의 복음을 통해 구원을 받은 예수 제자들은 죄의 종된 상태로부터 해방되어 이미 하나님과 의의 종이 되었고, 그래서 계속 의의 종으로 살아가면서 거룩함에 이르는 열매를 맺고 있으니 그 마지막은 틀림없이 영생이 될 것이라는 확증이다. 사도 바울은 이 말씀을 통해 예수 그리스도의 사람들이 경험한 정체성 변화는 과거와 현재와 미래에 일관성 있게 영향을 미치고, 그 증거를 나타내게 되어 있음을 주장하는 것이다. 하나님 자녀들은 이미 과거에 예수를 믿어 새 사람이 되었으므로, 이제 새 사람답게 의의 종으로, 하나님의 종으로 거룩함에 이르고 선행을 힘써 행하게 될 것이며, 이어 미래에 결국 약속된 영생의 은혜를 필연적으로 누리게 된다는 것이다.

이 말씀을 거꾸로 뒤집으면, 만일 예수님의 제자라는 어떤 사람이 자신이 구원받았음을 당연하게 여기면서 율법폐기론을 주장하고 방종주의에 빠져 선행을 무시하는 삶을 살고 있다면, 그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중생하지 않은 불신자일 가능성이 높다.

갈라디아서에 나타난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

로마서보다 훨씬 더 이른 시기, 즉 바울의 사역 초기에 기록된 갈라디아서에서도 바울은 동일한 문제와 씨름하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갈라디아서 전반부에서 바울은 유대주의자들과 율법주의자들의 주장을 반박하고 있다. 그런데 후반부에서 바울은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자들의 주장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특히 갈라디아서 5장 13절에서 15절이 중요하다. "형제들아 너희가 자유를 위하여 부르심을 입었으나 그러나 그 자유로 육체의 기회를 삼지 말고 오직 사랑으로서로 종노릇하라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만일 서로 물고 먹으면 피차 멸망할까 조심하라".

여기서 자유란 결국 오직 은혜와 믿음으로 말미암아 얻은 구원의 혜택으로, 그리스도인들이 누리게 되는 죄와 율법과 죽음과 마귀로부터의 자유를 의미한다. 모든 예수의 제자들은 바로 이러한 자유을 위해 부르심을 입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이 자유가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에 의해서 왜곡되고 오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그렇게 되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시는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는 일들이 벌어지게 된다는 것이다.

여기서 육체의 기회로 삼는다는 말은 육체의 소욕을 따라 자기 멋대로 살아감을 뜻한다. 즉 은혜에 거한다는 것을 빌미로 죄를 더 짓고, 죄 안에 더 거하는 악한 삶을 살게 된다는 것이다. 그 결과는 온갖 종류의 육체의 일로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갈 5:19-21)"이다.

사도 바울은 이런 자들에게 매우 심각하게 경고한다.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 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 5:21 후반)". 무슨 뜻인가? 예수를 믿지 않고, 거듭나고 중생하지 않은 자들은 본래 이런 육체의 일 가운데 살아간다. 따라서 그들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은 너무도 자명하다. 하지만 예수님에 대한 신앙을 입으로 고백하는 사람들 중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자유를 육체의 기회로 삼으면서 이런 일을 계속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하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왜냐하면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에 빠진 사람들은 참된 의미에서 거듭나지 못한 자들일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이런 사람들은 반드시 자신의 죄악을 회개하고 예수님을 믿어 거듭나고 중생되어야 한다.

결론적으로 말해 우리는 로마서와 갈라디아서를 통해 사도 시대 동안에도 오직 은혜와 믿음의 복음을 왜곡해서 율법폐기론적인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주의에 물든 사람들이 있었음을 발견하게 된다. 율법폐기론적 방종주의와 선행 무용론은 20세기와 21세기 한국교회 내에도 큰 세력을 형성했다. 한국교회 정통 교단 내에서도 이런 흐름을 감지할 수 있을 뿐 아니라, 구원파와 같은 이단적인 단체들이 이런 신학적 입장을 견지하면서 정통교회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을 미혹하고 있다.

구원파에 속한 지도자들의 신학적 주장에 다양성이 있음은 부인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구원파에 속한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 단번에 거듭나 죄 사함을 받은 사람은 더 이상 죄에 대해 슬퍼하거나 염려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고 또 그렇게 믿고 있다. 성화 과정에서 예수의 제자들이 끊임없이 감당해야 할 잔존하는 죄에 대한 회개와 자백, 그리고 죄와의 영적 싸움의 필요성을 거부한다. 이런 주장을 극단적으로 주장하는 사람들 중에는 도덕적 책임을 무시하고, 선행의 무용성, 무의미성, 무가치성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발견된다.

이런 구원파적 방종주의의 다른 복음이 한국교회에서 활개를 치고 있다. 한국교회는 안방에 들어와 있는 방종주의를 반드시 몰아내야 한다. 그리고 한국교회 외곽에서 교회를 위협하고 있는 구원파적 이단과 진리의 싸움을 계속해야 한다. 이런 거룩한 노력이 점진적으로 열매를 맺게 될 때, 한국교회는 지금의 위기에서 탈출하여 새롭게 갱신되고 성숙될 수 있을 것이다.

/정성욱 교수(덴버신학대학원 조직신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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