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상웅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손상웅 목사.

조선 예수교장로회 제11회 총회가 1922년에 최흥종을 아령 선교사로 파송했다고 본 회의록 97쪽은 기록하였다. 제12회 총회록 93쪽에서 95쪽에 기록된 그의 선교 보고에 따르면 107일 동안 6천 5백 여리를 다녀 6개 처에 교회를 신설하였고 1개 처에 학교를 개교하였으며 105명에게 세례를 주었고 78명에게 학습을 세웠다. 그에 따르면 아령 야심시개에서 10일간 공부한 후 20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5인에게 학습을 세웠으며 성찬식을 거행하였고 직분자를 세웠고, 다반 교회에서는 10일간 성경공부한 후 27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6인에게 유아세례, 18인에게 학습을 한 후 성찬식을 인도하였으며, 안반 교회에서는 7일간 사경회 후 어른 23인과 유아 7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8인에게 학습을 세웠으며, 북만주 요원 현사 평산 교회에서는 10일간 성경공부한 후 어른 4인과 유아 3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15인에게 학습을 베풀었고, 농산동에서는 일주일간 머물면서 13인에게 세례를 주었고 9인에게 학습을 세웠고 직분자를 개선하였으며, 대흥평에서는 2명의 세례교인과 4명의 학습교인으로 교회를 조직하였고, 대평동에서는 3인에게 세례주고 19인에게 학습을 세우고 직분자를 개선하였으며, 대가하에서는 1인에게 세례주고 직분자를 개선하였고, 아령 남부 우수리 박석동에서는 12인에게 세례주었고 직분자를 개선하였고, 소황령 부근 방천리 교회와 승천리 교회에서는 직분자를 개선하였으며, 중령 평산에 학교를 하나 신설하였다. 1923년에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제 출국을 당한 최흥종은 1년 후 다시 시베리아로 들어갔으나 6개월 만에 재추방되었다.

최흥종 선교사.
최흥종 목사.

최흥종은 1880년 5월 4일 전남 광주에서 최학신과 국씨 사이에서 2남 2녀 중 2남으로 태어났다. 6세때 어머니를 여위고 18세 때 아버지마저 하늘나라로 떠나보낸 최흥종은 '최망치'라는 별명으로 뒷골목의 주먹세계에서 정신적 방황을 거침없이 쏟아냈다. 강명환과 결혼한 지 4년째인 1904년 겨울, 유진 벨 선교사가 김윤수 집사와 함께 광주 양림동에 들어왔을 때 선교사 사택을 들락거리며 광주의 첫 교인으로 이름을 올렸다. 그 해 피고름으로 얼룩진 한센병 여환자를 가슴으로 끌어안고 나귀에 태우는 포사이드 선교사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최흥종은 그 해 유진 벨 선교사로 부터 광주 제일교회의 전신인 북문안교회에서 세례를 받기에 이른다. 그의 이름 최흥종은 수세 후 최영종에서 바꾼 이름이다.

광주 제중원 원장 우월손 선교사의 어학선생을 시작으로 하나님의 선교에 발 디딘 최흥종은 1908년에 상속받은 봉선리 땅 천 평을 나환자 촌 건립을 위해 기증하였고, 그 해 교회 집사가 된 최흥종은 나환자 치료에 집중하는 우월손 선교사의 조사가 되었다. 1912년에 북문안교회 초대 장로가 된 최흥종은 그 해 평양신학교에 입학하여 교역자의 길을 열었다. 삼일운동으로 옥고를 거치면서 나라사랑을 배운 최흥종은 1921년에 평양신학교를 졸업하고 광주 중앙교회의 전신인 북문밖 교회 초대 담임목사로 취임하였다. 교회 야학, 광주 청년회, 광주 부인회, 광주 YMCA를 차례로 조직하며 사회 복음을 부르짖던 때 최흥종은 시베리아 선교사로 파송받았던 것이다.

블라디보스톡에서 강제 출국당한 최흥종은 광주 북문밖 교회, 광주 남문밖 교회, 제주도 모슬포 교회 등에서 교회 목회에 몸을 담았을 뿐만 아니라 1926년에는 각종 노동조합의 연합체인 노동조합 연합회 조직, 1932년에는 나환자 근절협회 조직 및 광주에서 경성까지 '구라 행진,' 1933년에는 민중계몽운동과 빈민구제 사업을 목적한 계유구락부 조직, 1944년에는 광주 의학 전문학교 설립 기금 조성 등으로 사회 복음을 게을리 하지 않았다. 그는 교계의 신사참배 결의에 절망해 사망통지서를 돌리고 무등산에 은거함으로 하나님 사랑과 겨레 사랑을 보여 주었다.

해방된 조국아래 최흥종은 그의 사회 봉사를 멈추지 않았다. 1947년의 한국 나병예방협회 창립, 1948년의 삼애학원 설립, 1956년의 자활촌 호혜원 조성, 1958년의 결핵요양소 송등원과 무등원 설립 등을 이었다. 무등원 내에 복음당이라는 토담집을 짓고 결핵환자들과 성경 말씀을 나누며 예배를 인도한 최흥종은 잃어버린 한 사람의 영혼을 끝까지 찾아 나선 목자임이 분명했다.

가사에 방만, 사회에 방일, 정치에 방기, 경제에 방종, 종교에 방랑 등 5가지 해방의 오방을 앞세웠던 최흥종은 한국 교회를 향한 유언장을 발송한 후 1966년 2월 10일부터 시작한 단식 중 1966년 5월 14일에 86세의 일기로 소천했다. 4일 후인 18일에 광주 공원에서 있었던 최흥종 목사 사회장에는 나환자와 걸인들이 모여와 '아버지, 우리는 어쩌라고 이렇게 가십니까'라며 그의 먼저 감을 안타까워했다. 1997년 이후 대전 국립묘지에 안장된 최흥종은 시베리아에서 세례를 베풀고 학습을 세운 성도들과 함께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기다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