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심의 변질
알렌 크라이더 | 대장간 | 208쪽 | 10,000원

“초기 기독교 시대의 회심은 단순히 신념(belief)의 변화와만 관련된 것이 아니라 소속(belonging) 행동(behavior)의 변화도 함의된 것이었다. 초대교회 당시 그리스도인이 말로 증거하기는 어려운 상황이었음을 고려할 때, 그러한 변화는 매우 강력한 하나님 경험을 통해 일어났음이 분명하다.”

초기 기독교 세계의 다양한 삶과 평화주의 전통을 연구한 교회사가 알렌 크라이더(Alan Kreider)가 쓴 <회심의 변질(The Change of Conversion and the Origin of Christendom)>은 초대교회 성도들의 회심 이후의 ‘변화’를 살펴보고, ‘기독교 문화가 주류로 떠오른(크리스텐덤)’ 이후 그것이 어떻게 ‘변질’돼 왔는지를 추적한다.

저자에 따르면 저스틴과 키프리안 등을 통해 보는 초대교회의 ‘회심’은 음란과 주술, 폭력과 재산 문제를 다루는 방법에 대해 서로 긴밀하게 논의하는 ‘행동의 개혁’이었고, 제국에서 ‘교회 공동체’로의 귀의였다. 그들은 이같은 ‘신앙문답’을 통해 불가능을 행하는 능력을 부여받았다. 극심한 고난과 권력자들의 박해 속에서 눈에 띌만한 ‘복음전도 프로그램’도 없이 성장을 이어나간 기독교의 힘은 놀라운 결속력과 특별한 행동양식으로 대표되는 ‘매력적인 삶’에 있었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는 신념’과 함께 ‘삶으로 구현된 아름다운 신앙’이 사람들을 끌어당겼다는 것.

그러나 312년 ‘회심’한 콘스탄티누스 황제와 그의 후계자들은 ‘기독교로의 회심’을 위한 강력한 유인책들을 제시했다. 크리스텐덤(Christendom)이 시작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적용되던 ‘미신’이라는 단어는 이교도 예배에 사용됐고, 기독교 신앙은 강제화되기 시작했다. 이와 함께 신앙문답 과정은 축소·대중화됐고, ‘교회 회원권’이 새로운 차원의 매력적인 요소로 다가오면서 ‘명목상 그리스도인’이 급속도로 늘어났다. 어거스틴의 말처럼 로마 제국에는 “단 한 명의 이교도도 없는 집이 많은 반면 그리스도인이 없는 집은 한 집도 없게 됐지만”, 배움을 자극하는 ‘자유로운 호기심’ 대신 ‘엄격한 강제’가 자리잡은 것이다.

하지만 기독교 전통을 준수하려면 사제들은 이교도들과 접촉할 수 없어, 직접적인 복음전도가 불가능해졌다. 이는 크리스텐덤 이전과 다를 바 없었지만, ‘엄격한 강제’ 탓에 이교도들을 강력하게 끌어당기던 ‘그리스도인의 매력적인 삶’은 초기만큼 통하지 않았다.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이교도에게 혐오감을 주는 삶을 살고 있었기 때문이다. 회심은 점점 근본적인 행동 변화를 요구하는 대신 ‘정부의 안녕에 적합한’ 형태가 되어갔고, 위험과 모험은 사라졌다. 세례를 받기까지 하던 철저한 훈련과 교육도 힘들어졌다. 태어나면서부터 세례를 받게 됐기 때문이다. 간간이 ‘행동의 변화’를 촉구하는 이들을 위해서는 수도원이라는 길이 제공됐고, 반발을 무마하려다 ‘토착화’라는 명목의 혼합주의로 빠지기도 했다.

저자는 이후 중세로까지 이어지는 ‘크리스텐덤’ 자체에 대해 좀더 연구했다. 21세기 전세계에서는 ‘교회와 국가의 공생’, ‘강제성’ 등의 크리스텐덤이 사라져가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서양사회에서 크리스텐덤은 해체되지는 않더라도 심각한 노쇠의 상태에 있다. “그것(크리스텐덤)에서 살았고, 그것을 이뤘을지 모르지만 지금은 다시 회복할 수 없다.” 저자는 ‘크리스텐덤의 그늘’ 아래 사는 우리에게 선교적 민감성(missiological alertness)과 ‘신념·소속·행동’이라는 회심의 요소간 균형, 신앙문답 과정의 형성적 힘 등 세 가지 실마리를 던져주면서 글을 마무리한다. “초대교회에서 우리가 배운 것은 교회의 삶과 선교를 변화시키는 게 가능하다는 점이다.”

그는 덧붙인다. “우리 시대의 신학자와 목회자가, 초대교회 전통에서 우리 시대를 선교학적으로 숙고해 보고 생태학적 위기를 초래하는 중독을 다루는 회심의 수단을 제안한다면 어떨까? 새신자나 기신자에게 키프리안처럼 ‘가난한 사람들을 사랑하라’고 신앙문답 교육을 실시한다면 어찌될까? 저스틴처럼 그들이 예수의 가르침에 뿌리내리고 있는 원수들을 위해 기도하고 나누라는 가치를 심어준다면 어떻게 될까? 이러한 교회가 만족과 연민의 공동체로 알려진다면 어떨까? 만일 그들이 호기심 어린 질문자들의 입에 오르내리고, 칭송을 받고, 귀찮게 따라다니는 일이 일어난다면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