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것은 믿지 않을 수 없는 사실이지만 그것을 믿어 살지 못하는 것은 이성이 마귀에게 지배를 받고 있다는 증거가 아닐 수 없습니다. 그렇기에 회개함으로 성령에 이끌림 받기를 힘써야 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지구의 역사를 창조 이후 지금까지 엮어 오시는 과정에서 하나님 말씀에 순종했던 백성은 반드시 성공을 결실할 수 있었지만 불순종했던 결과는 돌이킬 수 없는 실패와 후회로 점철해 온 것을 아실 것입니다.

본문은 눈물의 선지자 예레미야가 앞으로 이스라엘이 당하게 될 큰 환란의 형벌을 예언해야 하는 상황에서 왜 그들이 이처럼 비참한 불행의 주인공이 되어야 하는지를 진술하고 있습니다. 포도를 수확하다 보면 포도 알갱이와 이삭이 땅에 떨어지게 마련입니다. 떨어진 것들은 포도 수확을 다 마친 후 엎드려 광주리에 주워 모아 말갛게 거두어 들인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축복의 말씀이 아니라 불행의 예고인 것입니다.

바벨론 대군이 먼 곳에서부터 쳐들어 올 때 마치 농부가 포도를 거두는 것처럼 이삭을 먼저 열매로 거두고 땅에 떨어진 것은 광주리에 따로 주워 모으는 것처럼 한다 했습니다. 이것은 바벨론에 의해 두 차례에 걸쳐 침략을 당할 것이라는 예언입니다. 그들의 침략에 희생당한 사람들은 죽어서 멸망했다 할지라도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떨어진 포도 이삭을 광주리에 걷어가듯 두 번째 침략을 인하여 이스라엘에 남은 자가 없도록 하시겠다는 말씀입니다.

9절의 “너는 포도 따는 자처럼 네 손을 광주리에 자주자주 놀리라” 하신 말씀은 하나님이 바벨론 왕 느부갓네살에게 지시하시는 말씀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이스라엘의 하나님이 아니고 바벨론을 붙들어 쓰시기 시작하셨다는 시대적 변화의 모습을 이런 상징적인 표현으로 말씀하신 것입니다.

“내가 누구에게 말하며 누구에게 경책하여 듣게 할꼬”란 말씀은 하나님 스스로 탄식하며 하시는 말씀입니다. 그 탄식의 이유는 “그 귀가 할례를 받지 못하였으므로 듣지 못하는도다 보라 여호와의 말씀을 그들이 자기에게 욕으로 여기고 이를 즐겨 아니하니 그러므로 여호와의 분노가 내게 가득하여 참기 어렵기 때문”이라고 하십니다. 서로 교제를 통하여 인연을 이루어 갈 수 있다는 것은 신뢰를 바탕으로 할 때만 가능합니다. 그 신뢰가 무너졌을 땐 관계는 부득이 단절될 수밖에 없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기대하고 신뢰하시려고 애쓰셨으나 그들은 하나님 말씀 듣는 것을 싫어했습니다. 오히려 욕으로 여겼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의 기대는 소멸되고 유기된 백성이 되고만 것입니다. 그들이 하나님을 불신하고 거역한 죄가 더 이상 참을 수 없을 지경에까지 온 것입니다.

그래서 “거리에 있는 아이들과 모인 청년들에게 부으리니 지아비와 지어미와 노인과 늙은이가 다 잡히는” 상황이 됩니다.

“내가 그 땅 거민에게 내 손을 펼 것인즉” 하셨는데 하나님이 손을 펴시는 이유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하나는 백성을 환영하고 알뜰히 품어 보살펴 주시기 위하여 팔을 벌려 손을 펴시는 하나님이시며, 또 하나는 하나님이 진노하시어 매를 때리시기 위해 손을 펴시는 경우입니다. 본문의 경우는 후자의 경우라 하겠습니다. 부모가 자식을 키우다 보면 갖게 되는 마음과 같을 것입니다. 부모가 그 자식이 미워 때리는 것이 아닌 그 장래를 걱정하고 사랑해서 때리는 것과 같음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그들의 집과 전지와 아내가 타인의 소유로 이전” 된다 하셨는데, 우리가 하나님의 소유가 되어 있을 때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하나님이 챙겨주신다는 사실과 우리가 하나님께 버림받은 그 순간부터는 우리에게 주셨던 모든 것들을 타인에게 인계하신다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13절부터 보면 “그들이 가장 작은 자로부터 큰 자까지 다 탐남하며 선지자로부터 제사장까지 다 거짓을 행함이라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심상히 고쳐 주며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그들이 가증한 일을 행할 때에 부끄러워 하였느냐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 아니할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니라” 했는데, 이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을 하나님이 벌하시는 이유를 말씀하고 계시는 것입니다.

‘탐남’이라는 말은 좋든 나쁘던 무조건 휩쓸어 끌어들이는 것을 말하며 그저 거두어 챙기는 것만을 목적으로 살아왔음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이것은 곧 내세지향적인 자세가 아니고 이기적인 정욕에 사로잡혀 살았다는 모습을 표현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백성이 여호와의 말씀을 저버리고 거역할 뿐 아니라 살리기 위해 선지자가 외치는 말씀마저도 욕을 듣는 것처럼 싫어하고 자기들의 욕심을 위해 거두고 챙기는 일에 이성을 잃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입니다.

처음에는 복음의 말씀이었습니다. 복음을 복음으로 알아듣고 복음화 되어지길 힘쓰는 믿음이 있다면 그 사람은 복음으로 구원을 보장받지만 복음을 수없이 전해 주었지만 복음화로 기대 걸거나 그대로 살려는 의지를 보여주지 않을 때 하나님은 경고하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경고도 듣지 않으면 심판을 선포하시게 되고 결국은 망하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선지자를 통해 경고의 말씀을 하시는데, 제사장들과 잘못된 선지자들은 “평강하다 평강하다”고 말함으로 그 말씀을 믿지 못하도록 하는 역할을 해 왔다는 것입니다.

디모데후서 4:3-4에 보면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했는데 이같은 사람들을 주변에서 많이 보게 됩니다.

본문의 경고의 말씀은 반드시 살리시기 위한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요한복음 6:63에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영이요 생명이라” 하셨고 이사야 1:19-20에서도 “너희가 즐겨 순종하면 땅의 아름다운 소산을 먹을 것이요 너희가 거절하여 배반하면 칼에 삼키우리라”했습니다.

본문의 이스라엘 백성들은 눈물의 예레미야 선지자를 통해 하나님의 경고의 말씀을 듣고 있습니다. 그러나, 더 많은 선지자들은 “걱정말라, 귀담아 들을 일이 아니다. 이같은 태평성대에 저주스러운 말로 악담을 하고 있다”고 오히려 예레미야를 미워할 대상으로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들은 예레미야와 보는 시각과 목적이 달랐습니다. 예레미야의 눈은 그들의 죄악을 감시하며 그들의 심령을 살리기 위한 목적으로 몸부림쳤으나, 거짓 선지자들은 그들에게 대접 받고자 하는 마음으로 귀를 즐겁게 하는 말에 힘썼던 것입니다. 어떤 상황에서도 여러분들의 귀에 하나님의 음성만 분별하여 들을 수 있다면 참으로 복된 인생일 것입니다. 그러나, 반대로 하나님의 살리기 위한 생명의 말씀은 듣기 싫어하고, 하나님도 들려주시지 않고, 서둘러 지옥으로 몰아넣기 위한 달콤한 유혹의 말만 들려오는 입장에 있다면 이미 하나님이 버리신 인생일 것입니다.

16절에 “너희는 길에 서서 보며 옛적 길 곧 선한 길이 어디인지 알아보고 그리로 행하라 너희 심령이 평강을 얻으리라” 하셨습니다. 믿음의 선배들, 조상들 중에 믿음의 본을 남긴 자들이 어떤 생활로 그들의 영혼이 구원을 얻고 생계가 보장받았는지 그 길을 살펴보고 지금 가고 있는 그 길이 멸망으로 가고 있는 길을 깨달으라고 하십니다. 그래서 그들이 간 길을 본받아 그리로 행함으로 멸망으로 가고 있는 이 길을 벗어나라는 경고를 하고 있습니다.

여호수아 1:7-8에 “오직 너는 마음을 강하게 하고 극히 담대히 하여 나의 종 모세가 네게 명한 율법을 다 지켜 행하고 좌로나 우로나 치우치지 말라 그리하면 어디로 가든지 형통하리니 이 율법책을 네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며 주야로 그것을 묵상하여 그 가운데 기록한대로 다 지켜 행하라 그리하면 네 길이 평탄하게 될 것이라 네가 형통하리라 내가 네게 명한 것이 아니냐 마음을 강하게 하고 담대히 하라 두려워 말며 놀라지 말라 네가 어디로 가든지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와 함께 하느니라” 했습니다. 이것이 조상들이 지켜 살아온 믿음의 본을 남긴 옛적, 선한 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고 말씀과 일치하는 생활을 하게 될 때 우리가 가는 길은 평탄하고 하는 일마다 형통을 보장받는다고 합니다. 하나님 말씀에 일치하는 생활을 한다는 것이 여러가지로 제약을 받는다고 느낀다면 그 사람은 하나님 앞에 기대 걸 소망이 없습니다.

교회를 다니는 것은 하나님의 인도와 동행하심을 바라고 순종하고 그 길을 따라가기를 목적해야 합니다. 예전엔 내 생각대로 살아왔지만 이제는 온전히 하나님께 맡겨진 존재로 인도하심을 바라야 할 것입니다.

요한복음 5:39에 “너희가 성경에서 영생을 얻는 줄 생각하고 성경을 상고하거니와 이 성경이 곧 내게 대하여 증거하는 것이로다” 했습니다. 예수님이 곧 말씀이며 이 말씀을 상고하며 사는 인생은 어려움이 없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들은 하나님의 경고하심에도 “우리는 그리로 행치 않겠노라” 합니다. 또 “내가 또 너희 위에 파수꾼을 세웠으니 나팔소리를 들으라” 했지만 그들의 대답은 “우리는 듣지 않겠노라” 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너희 열방아 들으라 회중아 그들의 당할 일을 알라 땅이여 들으라 내가 이 백성에게 재앙을 내리리니 이것이 그들의 생각의 결과라” 하십니다.

“시바에서 유향과 원방에서 향품을 내게로 가져옴은 어찜이뇨 나는 그들의 번제를 받지 아니하며 그들의 희생을 달게 여기지 않노라”하심은 6,000리나 되는 먼 곳인 시바에서 유향을 사오고 그보다 더 먼 인도(원방)에서 향품을 사 가지고 제단에 드린다고 합니다. 그러나, 생활하는 목적의 중심이 하나님 뜻에 어긋난 것이 문제라서 하나님은 그 번제를 받지 아니하신다고 하셨습니다. 여러분들도 예배마다 헌금을 드리는데 하나님과 관계없이 살다가 습관처럼 드리는 헌금이라면 드리지 않는 것이 좋습니다.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하늘에 소망을 둔 사람들이라면 목숨이라도 주님 원하시는 자리에 기꺼이 바치고 싶어 할 것이며 소유하고 있는 모든 정성을 모아 섬기자고 애쓰게 될 것입니다. 이스라엘은 이와 같이 살지 못해서 “보라 내가 이 백성 앞에 거침을 두리니 아비와 아들들이 한 가지로 거기 거치며 이웃과 그 친구가 함께 멸망하리라” 하셨습니다.

하나님 말씀을 통해 믿어지는 확실한 믿음과 성령의 뜻에 순종하고 하나님을 더 잘 섬기자는 목적으로 행동하는 신앙을 가져야 합니다. 그저 교회 열심히 다니면서 헌금을 많이 하는 것이 믿음을 나타낸 것처럼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예레미야를 통해 하신 말씀처럼 그들이 어렵게 구한 물품들을 하나님 제단에 바쳤다 하더라도 심령으로 진리 안에서 동행하지 않고 있다면 하나님은 그것을 기뻐 받으시지 않는다 했습니다. 평소의 생활이 항상 하나님의 진리 가운데로 성령의 인도하심을 받는 행동 신앙으로 주님과 동행하기를 힘쓸 때 여러분들의 길은 평탄하고 형통하며, 안전한 구원의 보장을 기대할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