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 문화의 대표적인 특징을 꼽는다면 ‘똘레랑스’라고 생각한다. 즉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는 관용의 문화다. 이것은 종교와 국적과 피부색과 언어와 성별과 문화권에 관계없이 개인의 인권과 자유를 존중하고 자신들과는 매우 달라 보이는 것을 개성 혹은 새로운 발상의 신선함이라고 여겨 존중하며 보호해주는 문화다.

유럽에 이슬람이 들어갔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유럽인들은 온몸을 검은 천으로 둘러싼 특이한 무슬림 여인들의 복장에 신기해하며 그들만의 독특한 복장 문화로 여겨 존중해 왔었다. 그들이 들어와서 누군가의 도움을 받아 땅을 사들여 모스크를 지을 때도, 우리도 외국에서 살 때 형편만 된다면 우리의 교회를 짓고 싶어 할 것이라는 생각으로 오히려 도와주었다. 무슬림들은 선량한 이웃으로 부드러운 이미지를 보이며 유럽 사회에 뿌리를 내렸다.

그러나 점점 숫자가 많아지자 그들은 서서히 부드러운 이웃의 모습보다는 똘똘 뭉친 단체행동으로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투쟁하여 목표를 관철해 나가는 달갑지 않은 집단(움마)으로 비쳐지기 시작했다. 때로는 폭력을 사용하여 무고한 이웃을 해치기도 하고 이슬람을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개별적으로 테러를 가하기도 하여 공포분위기를 조성하면서, 순진한 인권운동가들이나 소위 열린 마음의 정치인들을 이용하여 제도적으로 이슬람 또는 무함마드나 그들의 경전인 꾸란 등에 대해서 부정적인 말을 하는 것을 처벌할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어 놓았다. 또한 그들의 종교 지도자들은 모스크를 통해서 무슬림들이 그 사회의 문화와 언어를 배우고 학문과 기술을 배워 사회에 기여하며 평화롭게 공존하는 것을 가르치기보다는 이슬람 문화만을 고집하며 유럽인들과의 평화공존을 멸시하며 서구문화를 타락한 문화요 파괴해야 할 문화로 가르치면서 저출산율로 인구가 줄어가는 유럽에서 출산 장려를 통해서 무슬림 인구를 급격히 늘려나가고 있다. 이제 20년 안에 프랑스 인구의 10.3%, 스웨덴의 9.9%, 영국의 8.2%, 스위스의 8.1%, 독일의 7.1%가 무슬림인구로 채워질 것이라는 전망이다.(2011.7.25 문화일보) 리비아의 가다피는 “이제 이슬람은 더 이상 테러를 사용하지 않아도 멀지 않은 장래에 무슬림 출산율로 유럽을 점령할 것이다”는 유명한 말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치인들은 늘어가는 무슬림 집단의 표를 의식하여 그들에게 아부하며 그들의 집단행동을 두려워하여 소위 ‘다문화 정책’을 부르짖으며 무슬림 이민을 부추기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입을 통해서 “이슬람이 문제가 아니라 테러가 문제라고 하며 이슬람은 평화의 종교지만 일부 몰지각한 테러범들만 보고 이슬람을 폭력과 테러의 종교로 여기는 것은 잘못”이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힐 정도로 들어왔다. 사회적으로 이슬람에 의한 불안 현상이 급증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적절한 대책도 마련해 놓지 않은 채 정치인들이 다문화 정책을 부르짖고 있어 불난 집에 휘발유를 끼얹고 부채질하고 있는 현상을 보고 있는 국민들은 답답하여 그저 한숨만 쉴 뿐이었다.

비근한 예로 성공적인 다문화 정책으로 유명하던 스웨덴에서 세 번째로 큰 도시 말모(Malmo)는 현재 무슬림들이 25%나 된다고 한다. 거기서 2009년 3월 데이비스 컵이라는 국제 테니스 대회가 열렸는데 이스라엘 선수가 경기를 할 때 무슬림들은 “감히 무슬림 지역에 유대인이 와서 경기를 한다는 것을 용납할 수 없다”고 6천 명의 무슬림들이 경기장을 에워싸고 시위를 했다. 이에 경찰은 치안과 선수 보호를 위하여 관객들의 입장을 불허하여 관객 없이 경기를 치른 탓에 말모 시는 국제 테니스 연맹의 징계를 받았다. 말모 시는 무슬림 비율이 적은 바로 물 건너 도시 코펜하겐보다 인구가 적은데도 강간 사건은 5-6배 많이 일어나고 있으며, 무슬림 학교에서는 유대인 증오를 가르치고 있다고 한다.

또한 무슬림들이 많이 사는 유럽의 대도시에서 주민들의 반대로 이슬람 사원 건립을 못하게 되면 이들은 조그만 상가의 가게를 임대해서 모스크 간판을 붙여 놓고 수천 명의 무슬림들이 등록을 한다. 이슬람 율법에 따라 정기 기도를 할 때는 장소가 좁다는 핑계로 모두 나와서 자동차가 다니는 도로에 엎드려 수천 명이 줄지어 메카를 향해 기도를 한다. 가뜩이나 교통이 혼잡한 도심에서 무슬림들의 기도 때문에 정기적으로 통행을 금지당하는 시민들의 눈길이 고울 리가 없다. 인터넷에서 ‘muslim street prayers’를 검색해보면 뉴욕, 파리를 비롯한 세계 곳곳에서 이런 사건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이런 상황뿐 아니라 사회 곳곳에서 이슬람 인구 팽창으로 인한 불편함과 피해가 속출하고 있음에도 언론과 정치권이 입을 다물고 오히려 그런 일들이 다시 발생하지 않도록 무슬림들을 더욱 보호하며 포용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무슬림들의 이민을 장려하는 정책을 계속 추진하고 있다.

이런 현상을 견딜 수 없었던 노르웨이의 안데르스 베링 브레이비크(32)가 스스로 기사도 정신(?)을 발휘하여 아무도 책임지려고 하지 않는 유럽의 이슬람화를 막기 위해서 끔찍한 연쇄살인을 저질렀다고 주장했다. 동기가 무엇이든 무방비 상태의 어린이들을 포함한 민간인들을 이유 없이 보이는 대로 총으로 쏘아 76명이나 살해한 천인공노할 만행을 저지른 그는 마땅히 법에 따라 처벌을 받아야 한다. 일부 매스컴에서는 그를 근본주의 기독교인이라고 보도했는데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한 번도 폭력을 사용하지 않으셨고(마 26:52), 핍박이 오면 그저 피하라고 가르치셨으며(마 10:23), 억울하게 피해를 입었어도 스스로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께 맡기라고 하셨으며(롬 12:19), 원수를 용서하는 데서 그치지 말고 오히려 사랑하라고 하셨다(눅 6:27). 그런데 그리스도의 가르침의 정반대되는 행동을 하는 사람을 어찌 그리스도인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를 분노케 한 이런 흉악한 살인범을 기독교인으로 몰아 기독교와 이슬람의 갈등을 조장하려고 하는 매스컴의 의도된 기만책에 속아서 기독교인임을 부끄러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기독교에 대해 분개하고 증오하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것은 매우 안타까운 현실이다.

물론 우리의 이웃에는 선량한 무슬림들도 적지 않다는 것을 부인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데 그런 사람들 때문에 이슬람을 평화의 종교라고 한다거나 브레이비크 같은 사람 때문에 기독교를 살인의 종교라고 부르는 것은 옳지 못한 평가다. 종교는 몇몇 추종자들의 말이나 행위로 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그들의 경전과 교리의 가르침을 통해서 평가해야 한다.

예수님의 말씀 중에는 ‘원수를 사랑하라’(마태5:44),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몸과 같이 하라’(갈라디아5:14)는 가르침이 있지만 이슬람 꾸란에는 오히려 ‘너희가 얼마나 잔인하다는 것을 네 이웃이 알 수 있도록 그들과 싸워라. 알라는 경건한 자들과 함께 하시느니라’(꾸란9:123)고 가르치고 있다. 이 간단한 차이로 인하여 이슬람이 들어가는 곳마다 문제가 발생하고 있다는 것은 익히 알려진 사실이다. 우리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은 그 잘못된 가르침을 맹종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열매일 뿐이다.

최근에 뉴욕 중심에 있는 이슬람 사원 안에 있는 상점을 방문했다. 다섯 평도 채 안 되는 가게에 간식뿐 아니라 잡화 및 기념품 등을 늘어놓고 한 쪽 벽면에는 책을 꽂아놓고 팔고 있었다. 그 가게에 있는 책을 다 합해 봐도 1천 권도 채 안 될 것이다. 그 중에 놀라운 책들이 쌓여 있는 것을 발견하여 사가지고 왔는데 오는 길에 비행기 안에서 읽어 보니 ‘이정표(Milestones)’라는 책에는 “이슬람 이외의 사상과 문화는 모두 파괴해야 하며, 이슬람의 지하드를 방어 전쟁이라고 하는 자들은 패배주의자들이며, 모든 무슬림들은 알라만 섬기는 세상, 이슬람 율법으로 다스리는 세상을 만드는데 방해가 되는 모든 자들과 싸우되 승리를 얻든지 순교를 당할 때까지 싸워야 한다”고 씌어 있었다.

또한 ‘알 왈라 왈 바라(Al Walaa Wal Baraa)’라는 작은 책이 있었는데 거기 보니 ‘알왈라(Al Walaa)’라는 말은 무슬림들끼리는 언어와 국적과 성별과 피부색에 관계없이 서로 돕고 뭉치고 사랑해야 한다는 뜻이며, ‘왈 바라(Wal baraa)’라는 말은 이슬람을 받아들이지 않은 모든 사람들(Kufar) 및 위선자들, 배신자들은 철저히 증오하며 원수로 여겨야 하며 사랑하거나 존경하거나 도와서는 안 된다는 말이라고 가르치고 있었다. 그러면서 어떤 아랍 방송국에서 “기독교인은 우리의 친구다”는 방송을 하는 것을 들었는데 이것이 얼마나 위험한 생각인지 모른다고 하면서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의 교리를 철저히 가르쳐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는데 이것은 아마 무슬림들 내부 교육용으로 만든 것으로 보인다. 무슬림들은 선진국들에 살면서 그들의 법적인 보호와 각종 혜택을 누리면서도 이런 책들로 교육을 받고 그 사회에 대한 증오를 키우고 있다.

다소 늦은 감이 있기는 하지만 이제 정신을 차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유럽의 선진국들이 무슬림들 때문에 발생되는 일들을 견딜 수 없었다면 언젠가 우리도 다문화정책 때문에 쓴잔을 마셔야 할 때가 올 것을 예상하고 이제부터라도 지혜롭게 대비해야 할 것이다. 만일 이 일에 무관심하면 우리 뿐 아니라 우리의 후손들이 고통을 당하며 원망할 때 부끄러워 얼굴을 들지 못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