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최고의 설교자이자 현대 기독교 지성을 대표하는 복음주의자 존 스토트(John Stott) 영국 성공회 신부가 27일 오후 영국 런던에서 노환으로 타계했다. 향년 90세.

존 스토트 미니스트리의 호만 벤자민 대표에 따르면, 그는 노환으로 많은 고난과 약함을 체험해 오다 몇 주전부터 건강이 급속히 악화됐고, 이밖에 복합적인 이유로 인해 이날 오후 3시 15분께 소천했다.

목회 일선에서 물러난 뒤에도 만 86세의 나이에 이르기까지 세계 곳곳에서 열띤 강연을 통해 전 세계 복음주의자들에게 영향을 끼친 그는, 2007년 영국에서 열린 케직 사경회(Keswick Convention)에서의 설교를 마지막으로 모든 공직에서 은퇴한다고 발표했다. 이후 그는 영국 내 성공회 목회자 은퇴 시설에서 생애 마지막 시간을 보냈다.

존 스토트 신부는 1921년 영국 런던에서 태어나 케임브리지 트리니티 칼리지를 졸업했다. 1942년 성공회 사제 서품을 받았으며, 올소울스 처치(All Souls Church) 보좌신부에서 시작해(1945-50), 교구 사제(1950-75), 관할 사제(1975년부터)를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 로잔언약(1974)의 입안자로 참여했으며, 1967년부터 17년간 영국교회복음주의위원회(Church of England Evangelical Council) 회장으로 활동했고 영국 성서유니온선교회 대표(1965-1974년), 영국복음주의연맹 대표(1973-1974) 등을 역임했다.

그는 가족에 대한 책임감으로 사역에 어려움이 있을 것을 감안해 평생 독신으로 살았다. 지난 2004년 뉴욕타임스는 “만약 개신교에서도 교황을 선출한다면 존 스토트가 첫번째 대상일 것”이라는 말로 그를 평가했다. 또 美 크리스천포스트는 ‘가장 유명한 복음주의권 리더’, 英 크리스천투데이는 ‘20세기 가장 뛰어난 복음주의권 리더’로 각각 그의 소천 소식을 전하고 있다.

WEA 제프 터니클리프 대표(Geoff Tunnicliffe)는 존 스토트의 소천에 대해 “‘엉클 존(Uncle John)’은 나의 신학적인 발전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인물”이라며 “그리스도의 지체로서의 연합, 성경적인 정통, 전세계 선교 등을 향한 그의 헌신은 나의 영적 순례의 기초가 됐다”고 애도했다.

새들백교회 릭 워렌 목사(Rick Warren)도 트위터를 통해 “나의 멘토인 존 스토트 목사가 돌아가셨다”고 알리면서 하와이안 셔츠를 입은 스토트 목사와 새들백교회에서 공동 설교를 했던 일을 떠올리기도 했다.

"새벽 5시에 일어나 기도와 말씀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저녁 9시 반이면 어김없이 귀가할 정도로 자기 관리에 철저했던 학생", "마틴 로이드존스의 동역 제안에도 불구하고 성공회 소속으로 남아 교회 연합을 꿈꾸었던 복음주의자", "거창한 타이틀을 거절하고 누구에게나 '엉클 존'으로 불리고 싶어 했던 친근하고 겸손한 목회자", "결혼하지는 않았지만 많은 청년의 영적 아버지로 일생을 헌신한 그리스도의 제자"... 이것이 전부 그를 수식하는 단어들이다.

1974년 영국을 비롯한 범세계적인 복음주의권의 지도자로서 그는 로잔 언약 입안자로 참여했고, 그 후로도 로잔 운동에 참여하여 적극 활동해 왔다. 그는 전 세계의 복음주의 운동을 한 차원 높인 복음주의 교회의 거성으로, 한국에도 기독대학인회(IVF) 등을 중심으로 한 크리스천 젊은이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

그는 위대한 학자인 동시에 저술가로서도 명성을 떨쳤다. 반세기가 넘도록 같은 비서와 일하면서 『기독교의 기본진리』, 『그리스도의 십자가』, 『현대를 사는 그리스도인』, 『로마서 강해』, 『현대사회 문제와 기독교적 답변』 등 50여권의 책을 저술했다. 그의 책은 67개 언어로 번역되었다. 특히 노년의 거장으로 왕성한 저술활동을 이어가면서 그가 남긴 책들은, 짧지만 깊이가 있는 것이 특징이다.

이밖에 그의 저서는, 그만의 명쾌함과 힘찬 열정 그리고 죽음을 가까이 바라보는 영적 거인의 인간적인 면모가 곳곳에 배어 있어, 많은 크리스천들의 심금을 깊이 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