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현찬 목사.
(Photo : 기독일보) 심현찬 목사.

이 글은 탐욕의 반지에 붙들린 한국교회를 바라보며, 이 시대에 순전한 복음이 회복되기 위해선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이 절실하다고 촉구하는 심현찬 목사(워싱턴 트리니티 연구원 원장)의 글이다. 본지는 총 4회에 걸쳐 이 글을 연재한다<편집자주>

3. 한국 교회가 탐욕의 반지에서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가?: 에드워즈의 영성으로의 귀환

왜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으로의 귀환인가?

영화 [반지의 제왕-3]편인 [왕의 귀환]에선, 결국 탐욕의 반지를 포기할 때, 평화와 구원이 온다는 주제를 보여준다. 이 반지에 대한 탐욕은 골럼을 비롯한, 모든 등장 인물들, 심지어 주인공이 후로도조차도 탐심한다. 그러나 이 반지를 불연못에 던지고 포기해야만 인류에게 유일한 소망이 있는 것이다.

필자는 삼중의 탐욕의 반지에 사로잡힌 한국의 오늘날 교회의 현실에 대한 치료책으로서, 삼중의 탐욕의 반지를 내려놓고, 교회사에서 신앙과 신학의 ‘에베레스트’라고 불리는, 조나단 에드워즈의 영성으로의 회귀가 절실하다고 강조하고 싶다.

물론 어떤 이들은 에드워즈는 미국 사람이요 18세기적인 인물이라, 현대의 한국 교회를 위한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주장할 수 있다. 어떻게 빵과 버터의 신학과 목회적 상황을 된장과 고추장을 먹은 한국 상황에 직접적인 대안이라고 할 수 있는가라는 주장이다. 이것은 사대주의적이요 외국의 것을 무비판적으로 수용하는 추수적 태도라는 것이다. 물론 이들의 논리는 일리가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이런 사고는 두 가지를 간과하고 있다. 하나는, 역사에 대한 무지라고 할 수 있다. 지혜로운 사람들은 언제나 역사를 통해서, 과거의 현인과 믿음의 선배들의 지혜를 배우고 미래의 발전을 모색해 왔다. 둘째로, 외국의 것을 우리적인 상황에 맞게 지혜롭게 ‘차용’한다면, 추수적인 무비판성이나, 사대주의적 태도를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성도들은 성경에서 보여준 것처럼, 구속사적이고 하나님의 관점에서, 외국의 신학과 신앙을 조망하고 차용한다면, 다음에서 지적할 에드워즈의 영성은 분명 탐욕에 물든 골럼 현상의 한국 교회을 향한 충분한 대안일 수 있는 것이다. 물론 에드워즈의 영성이 완벽할 수는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주목할 점은, 다음에 설명할, 그의 본질적이고 균형있는 신앙, 무엇보다도 실천적인 신앙을 통해서, 바로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영성을 잘 드러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과연 에드워즈의 영성은 무엇인가 간단히 생각해보자.

에드워즈 영성의 특징

첫째의 특징은, 본질적인 신앙이다. 특히 회심과 성화의 총체적인 중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순수한 복음에 생명을 걸었다. 무엇보다도, 당시에 혼란한 18세기 미국의 뉴잉글랜드의 교계의 환경 속에서, 무엇이 과연 참되고 성경적인 신앙과 부흥인가에 대해 평생 동안 고민한다. 이런 중에, [신앙 감정론] (Religious Affections) 가 1746년 출간된 것이다. 이 책의 핵심 중의 하나는, 현상적이고 표피적이고 극단적인 신앙의 현상도, 극단적인 지성 중심적인 태도도 아닌, ‘균형적인 태도,’즉 거룩한 감정이 충만한 지성, 다시 말해서, 말씀과 성령의 균형잡힌 신앙이라고 강조한다. 한마디로, 그는 신앙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천착했던 것이다.

무엇보다도 그가 본질적인 신앙에서 주목한 것 중의 하나가 바로 회심과 성화에 대한 총체적 관심이다. 먼저, 그는 청교도 신앙의 핵심인 중생과 회심론에 평생동안 주목했다. 그는 자신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 진지하게 고민했을 뿐 아니라, 섬기는 성도들의 중생과 회심에 대해서 깊이 있게 관심을 갖고 목회에 전념했다. 동시에 그는, 회심과 동시에 일어나는 성화의 중대성을 인식한다. 물론 철저히 구원은 철저한 하나님의 주권임을 인정하면서도, 동시에 개인적으론 성화와 거룩을 위한 영적 훈련에 힘썼다. 평생 동안 성경에 집중했고, 아울러 폭넚은 신학연구, 동시에 ‘불타는 신앙과 신학’을 유지하지 위해서, 기도에 힘썼다.

주목할 점은, 목회적 관점에선, 성화와 관련해서 에드워즈의 성도들의 성찬 참여 자격에 대한 태도이다. 그는 성도들의 거룩한 삶, 성화를 위해서, 심지어 자신의 전임 목회자요 당시 뉴잉글랜드의‘교황’으로 불리워졌던, 절대적 영향력을 가진 자신의 외할아버지인 솔로몬 스토다드의 소위 ‘중도 언약’적인 원칙에 반대한다. 이것은 오랜 동안 관행처럼 여기는 노샘프턴 교회의 원칙이었지만, 에드워즈에겐 이것이 성도들의 영적 생활에 대한 기준을 완화하고 약화시킨다고 여기고, 스토다드 목사 사후에 조심스럽게 개혁하려고 했다.

다시 말해서, 참된 신자란 신앙 고백에 걸맞은 변화된 행동을 해야 된다는 소위 ‘가시적 성도’와, 분명한 회심 경험과 성도들이 납득할 만한 신앙 행동을 하는 성도만이 성찬과 멤버쉽를 가질 수 있다는 개혁안이었다. 그러나 이러한 그의 개혁론은 통과되지 않았다. 오히려 이로 인해 성도들과 리더쉽과의 불화를 가져오게 되고, 결국은 오랜 동안 존경과 사랑을 받았고, 무엇보다도 당시의 뉴잉글랜드의 부흥운동의 지도자요 세계 부흥계의 유명인사였던 에드워즈였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의 이기적기고 정치적 이유 등으로, 결국은 해임을 당하게 된다.

필자가 에드워즈의 해임 과정에 주목하는 것은, 바로 그가 당시의 관행에 순응하기보다, 이런 교회의 본질적인 문제인 참된 회심과 함께 가시적으로 변화된 성도, 즉 성화에 주목했다는 것이다. 한마디로, 그는 뉴잉글랜드지역에서 가장 유명하고 좋은 소문의 교회의 담임목회직에 안주하지 않고, 성도와 교회의 본질적인 신앙을 위해, 해임을 당하면서도 추진했던 것이다. 사실 이 성찬 교인의 기준에 대한 고민은 에드워즈의 평생의 걸친 고민이었다. 따라서, 에드워즈는 평생을 통해서, 참된 신앙과 부흥, 회심과 성화의 총체적 회복을 중심으로, 기독교 신앙의 본질에 매진했던 것이다.

둘째 특징은, 바로 균형의 신앙이다. 에드워즈의 신학과 신앙, 목회엔 철저히 균형으로 충만하다. 그래서 로이드-존즈는 그를 ‘균형의 신학자요 목회자’로 규정한다 (The Puritans: Their Origins and Successors, 356). 그는 인간의 의지를 강조한 알미니안주의와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의 양극단을 경계했다. (물론 주의할 점은 그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의 중간을 강조하는 회색주의적 태도를 가진 것은 아니다. 왜냐면 그는 철저히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한 칼빈주의자였고, 당시의 알미니안적 태도를 단호하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그에겐, 참된 부흥과 신앙이란, 거룩한 감정과 지성이 균형적으로 통합된 ‘신앙 감정’을 강조한다.

즉 참 신앙은 지성으로 대변되는 빛(light)과 거룩한 감정으로 대변되는 열(heat)의 철저한 균형을 강조한다. 그래서 그는 18세기 뉴잉글랜드의 교계를 양분한 부흥파인 새빛파와 반부흥파인 옛빛파 간에 첨예한 대립 내용이었던, 감정 중심인가, 이성 중심인가에 대한 해결책으로, 참 신앙에 대한 정의에서, 극단적인 태도를 지양하고, 이 둘의 중간 지대인, 거룩한 신앙, 즉 거룩한 감정과 지성의 통합과 균형을 강조한다. <계속> www.TrinityDC.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