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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 한인교계의 뿌리를 찾아서(1)

기독일보

입력 Jan 06, 2009 08:15 PM 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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워싱턴한인사회의 시작과 발전-역사 이전의 한인교회

김택용 박사(워싱턴신학교 학장)

김택용 박사(워싱턴신학교 학장)

2009년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하면서 본지는 워싱턴 지역의 한인교회들이 초창기 한인교회들의 역사를 돌아보면서 새로운 미래를 열어나갈 수 있도록 김택용 목사의 글을 연재한다. 김택용 목사는 1976-77년 제2대 워싱턴지역 한인교회협의회 회장을 역임한 워싱턴교계의 살아있는 증인이다. 김택용 목사는 현재 워싱턴한인장로교회 원로목사이며 워싱턴 신학교 학장을 맡고 있다.

김 목사는 워싱턴한인사회의 시작과 발전-역사 이전의 한인교회, 초창기 한인교회 12교회, 초창기 교회 통합 운동과 초기 교회 연합사업 등에 대해서 집필했다.<편집자 주>


1. 시작하는 글

이 글은 워싱턴 지역 한인교회의 생성과 그 발전에 대한 역사 정리이다. 따라서 “워싱턴지역 한인교회 초기 약사”라는 제목은 이 글의 성격과 범위 그리고 한계를 일관적으로 지배한다. 다시 말하면, 워싱턴 지역이란 미국의 Washington, DC 수도권 일원을 의미하며 초기라는 뜻은 공식적인 교회 시작의 해인 1951년부터 한인 이민이 절정을 이루었던 1979년까지를 그 중심 연대로 한다. 그러나 교회 형성의 배경을 논할 때 그 시대는 1883년대까지 소급하게 된다.

이 글의 목적은 미주한인교회의 한 축을 이루고 있는 워싱턴 교계의 정체성을 확인하며 그 역사적 사명을 부각시키는데 있다. 이 글을 통해 워싱턴지역한인교회의 뿌리를 심도 있게 고찰하는 가운데 당면한 현실을 직시하고 나아가서 건전한 미래를 열어 나가는데 다소나마 도움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2. 워싱턴한인사회의 시작과 발전-역사 이전의 한인교회

1883년 9월 15일 한국의 보빙사 일행이 워싱턴을 방문함으로 워싱턴 한인사회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워싱턴 가주 장기 체류 한인 제 1호는, 1886년 워싱턴에 도착한 민, 주호, 윤정식, 변 수 등으로 알려져 있다. 그 가운데 변 수는 매릴랜드 농과대학을 4년 만에 졸업, 1891년에 이학사 학위를 받았다. 그는 한인 최초의 미국대학 졸업생이 된 것이다. 1888년에는, 5년 전에 보빙사절단원으로 워싱턴을 다녀 간 바 있는 서광범이 워싱턴으로 와서 거주하였다. 같은 해에 서재필도 워싱턴으로 왔다. 1896년에는 Howard 대학교에 임병구, 이범수, 김헌식, 안정식, 여병현, 하란사 등 7명의 유학생이 수학하고 있었다. 또 1905년에는 이승만이 워싱턴으로 옮겨와서 George Washington 대학교에 입학, 유학생의 대열에 합류하였다. 이렇게 보면 워싱턴의 한인 사회는 1903년의 하와이 노동 이민보다도 20년이나 빠르게 시작된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워싱턴 한인사회는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있었다. 그 것은 이 지역의 한인사회의 발전이 Hawaii, Los Angeles, San Francisco, New York, Chicago 등지에 비해 그 성장이 완만하게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1940년대에 워싱턴에는 약 15명의 한인이 거주하고 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시 미국의 육군성에 근무하던 한인들이 한인사회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으며 그 수가 조금씩 늘어나고 있었다. 1949년에는 주미한국대사관의 개관과 함께 한인사회는 서서히 뿌리를 내리게 된 것이다.

한인사회의 발전에 따라 기독교 교인들의 모임이 시작되었다. 당시 한인교계의 지도자로는 배민수목사, 한영교 목사, 그리고 안승화, 이원순, 박원규 등이 있었다. 그 밖에 뜻을 같이 하는 이들이 때때로 개인 집에 모여 기도회도 가졌고 친교도 나누고 있었다.

그러나 그 때의 교세는 한인사회의 규모가 크지 않았던 관계로 아직 교회로 발전하기에는 시기 상조였다. 그들의 모임은 개인 집에서 부정기적으로 회집하였으며, 일종의 기도 처소 형식을 띄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모임들은 지역 이름을 내세워 자연스럽게 華府韓人敎會 (화부한인교회) 또는 워싱턴 한인교회라고 이름하였다. 그러니까 역사 이전의 한인교회의 시작은 1940년대 초반부터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1945년 제2차 대전 직후에 있었던 뉴욕한인교회 건축기금 모금 운동에 참여한 워싱턴한인교회가 참여하였다는 기록이 입증하고 있다. 뉴욕한인교회 60년사에 의하면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직후에 있었던 뉴욕한인교회 건축헌금 모금 운동에, 워싱턴의 성도들이 워싱턴한인교회의 이름으로 $143.50을 보냈다는 항목이 있다. 그 당시에 헌금을 보낸 다른 교회중의 하나는, 나성한인장로교회(1906년에 설립)이다. 이 교회는 $345.00을 보냈다. 두 기금의 액수를 비교하여 볼 때 아직 교회의 기틀을 제대로 갖추지 못했던 워싱턴교회 교인들의 성금에 나타난 열성을 감지할 수 있다. 이러한 워싱턴의 교인들의 모임은 어떤 때는 두세 곳 이상으로 늘어나기도 하였고 반대로 하나 둘로 통폐합되거나 활동이 중단되기도 하였다.

1945년 제2차 세계대전 종전 이후의 워싱턴한인사회의 형편을 고찰해 보면, 연합군의 승리로 한국이 광복을 맞게 되었을 때 대부분의 워싱턴거주 한인들은 귀국 하였다. 따라서 그 무렵에 상기, 기도처소들의 모임은 더 이상 계속되지 못했다. 그러나 위에서도 약간 언급한 바와 같이, 1948년 8월에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고 1949년에 워싱턴에 주미한국대사관이 개관됨에 따라 한인사회가 커지면서 그 사정은 급속도로 달라지기 시작하였다. 1950년에 이르러 워싱턴에 거주하는 한인의 수가 100명을 넘어 서게 되었다. 한인사회의 발전에 병행하여 뜻 있는 성도들이 한인교회 설립의 때가 왔다고 공감하기 시작하였다. 그들은 하와이를 비롯한 Los Angeles 지역과 샌프란시스코 및 뉴욕, 시카고 등지의 한인교회 설립과 발전의 모습을 지켜보면서 워싱턴에도 한인교회가 설립되기를 고대하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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