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선교계의 거목이었던 故 조동진 목사님 1주기를 맞아, 김명혁 목사님께서 그를 기리며 작성한 기고문을 게재합니다.  -편집자 주

부족한 제가 한 평생 목회와 선교와 연합 사역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삶의 안내자 역할을 해 주신 조동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일제 시대와 공산 시대에 북한에서 신사참배 반대와 공산정치 반대로 감옥살이를 너무 많이 하시는 아버지 김관주 목사님을 바라보면서, 나도 아버지를 따라 주일성수와 예배에 정성을 다하고 하나님의 종이 되는 삶을 살기 원하면서, 11살 때인 1948년 8월 제가 너무 사랑하고 존경하는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났습니다.

캄캄한 밤에 38선을 혼자서 뛰어 넘어 남쪽으로 온 다음, 평생 고아와 나그네로 슬픔과 아픔을 몸에 지니고 가난과 고난의 삶을 살아왔지만, 긍휼과 용서와 자비와 사랑과 은혜와 축복이 충만하신 하나님의 인도하심으로 부족함이 없는 위로와 평안과 기쁨이 충만한 행복한 삶을 살게 되었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서울중학교과 서울고등학교와 서울대학교를 졸업하고, 1962년 미국으로 가서 12년 동안 아주 좋은 신학교들에서 유학생활을 하면서 마음껏 공부하게 하셨습니다. 10년 동안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신학사, 신학석사, 신학석사, 철학박사 학위를 받은 다음 1973년 1월 예일대학교로 다시 와서 1년 동안 연구원으로 연구를 하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예일대학교에서 연구원으로 연구생활을 마칠 무렵, 뉴욕을 방문하신 조동진 목사님께서 저를 만나자고 하셨습니다. 사실 저는 조동진 목사님이 누구신지 모르고 있었습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선구자이신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마쳤다고 생각합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는 제게 유학을 마친 후 후암교회에 교육목사로 오라는 말씀과 함께, 귀국하기 전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 가서 선교학을 연구하는 것이 좋겠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저는 본래 남의 말을 쉽게 잘 듣는 터라 그렇게 하자고 했습니다.

그 해 연말 제 생애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친 또 하나의 사건이 일어났습니다. 1973년 11월 11일 저의 둘째 아이 철원이가 뇌수종이란 불치의 병을 가지고 태어난 것이었습니다.

저는 1973년 12월 말 아내와 함께 3살 된 딸 혜원이와 생후 1개월 된 철원이를 데리고 대륙을 횡단해서 캘리포니아 파사데나 풀러신학교로 향했습니다. 그러나 여행 도중 철원이의 병세가 악화되어 시속 140여 마일 속도로 30여 시간을 5분만 쉬고 계속해서 서부 사막지역을 달려, 로스안젤스 췰드런스 호스피탈에 도착했습니다.

철원이를 입원시킨 후, 우리는 풀러 신학교 기숙사에 여장을 풀고 1974년 1월부터 풀러신학교 선교신학원에서 리써치 어쏘우시에이트로 8개월을 지내며 선교학(Missiology)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접하기 시작했습니다.

랄프 윈터, 맥가브란, 글래써, 와그너 교수님 등의 선교학 강의를 들으며 선교의 동향과 문제점들을 보기 시작했고, 복음주의 선교의 필요성을 차츰 절감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독일 튜빙겐대학교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의「Missions Which Way?」와 풀러신학교 맥가브란 박사의 「Eye of The Storm」같은 책들은 제게 많은 도전과 새로운 통찰력을 제공해 주었습니다.

풀러 선교신학원에서의 선교학 수업은 저의 학문연구와 사역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 11년 동안 역사신학을 전공한 제 학문이 선교신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완성되게 되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과 사역을 선교적인 관점에서 보기 시작했습니다. 또한 신학이라는 학문을 인간의 삶의 처지, 즉 목회와 선교 현장과 연결시키며 보기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귀국 후 발표한 저술과 논문들 중 상당 부분이 선교학에 관한 것이었고, 신학교에서는 역사신학과 아울러 선교신학을 강의하게 되었으며, 교단과 한국교회와 선교지에서는 선교 사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즉 교단 선교부 발전에 기여했고, 한국복음주의협의회,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 한인세계선교협의회,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소련선교회, 아시아복음주의협의회 등 선교단체 조직과 발전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며 기여하게 되었습니다.

후암교회 교육목사, 총신대학 강사, 조교수, 부교수, 영안교회 담임목사, 합동신학대학원의 부교수, 교수, 교장, 교수, 겸임교수, 강변교회 담임목사로 사역하면서 교수와 목회와 선교사역에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서 제가 지적하고 싶은 것은 참된 의미에서의 신학수업은 강의실과 도서관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고난과 실패의 삶의 마당과 목회 및 선교 현장의 일터에서 이루어진다는 사실입니다.

삶과 사역의 현장에 부딪쳐서 형성되지 않은 신학은 상아탑적인 이론과 공허한 사색에 그치고 말 위험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신학과 목회와 선교의 일터에 연계하여 살아오면서 저의 신학이 점차 삶의 지혜와 동력으로 바뀌어져 감을 발견하는 기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

故 현포(玄圃) 조동진 목사 발인예배 김명혁 목사
▲지난해 조동진 목사의 발인예배에서 김명혁 목사가 조사를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모든 삶과 사역의 변화가 저의 삶의 안내자인 조동진 목사님의 안내와 가르침으로 이루어졌다고 고백하고 또 고백하고 싶습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는 선교학을 이론적으로 가르치는데 그치지 않고 사랑과 돌봄의 삶으로 나타내 보이셨는데, 뇌수종으로 고통당하는 어린 아들 철원이에게 지극한 사랑과 돌봄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마지막에 무덤으로 갈 때까지 사랑과 돌봄의 손길을 펴셨습니다.

다시 말씀드리지만, 저는 조동진 목사님의 초청으로 후암교회에 와서 교육목사의 일을 하는 동시에 세계 선교 사역에 점점 깊이 관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저기서 모이는 선교대회에 참여하게 되었고, 랄프 윈터 박사님과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자주 만나 친밀하게 사귀면서 선교에 대한 보다 깊고 포괄적인 지식과 안목을 지니게 되었습니다.

제가 1975년부터 총신에서 교회사를 가르치면서, 동시에 총신에서는 처음으로 선교학이라는 학문을 가르쳤습니다. 그 때 김의환 박사님과 함께 학생들에게 선교에 대한 도전을 했는데, 그 때 도전을 받고 선교사가 된 사람들 중에는 김활용, 김유식, 박기호, 이재환, 정윤진, 강승삼 등이 있었습니다.

1980년 합신을 만들어 교수 사역을 하면서도, 저는 교회사와 함께 선교학을 가르쳤습니다.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초청해 특강을 하게도 했습니다. 1981년에는 합신 교단 선교부를 만들어 선교사역을 교단적으로 펴 나가기도 했는데, 저는 1987년부터 1989년까지 합신 선교부의 총무로 일하며 선교부를 섬기기도 했습니다.

조동진 목사님의 영향으로 1988년 1월 18일 한국 6개 교단 선교 지도자들과 함께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를 만들어, 협력 선교의 장을 여는 일에 산파의 역할을 하며 총무의 일을 맡기도 했습니다.

1988년 7월 미국 휘튼대학과 빌리 그래함 센터에서 '제1차 한인세계선교대회'를 개최해 선교 사역을 미국과 세계적으로 펴 나가게 했는데, 그 때 최일식 목사님과 제가 심부름을 하기도 했습니다.

1988년 10월에는 북미주의 '한인세계선교협의회(KWMC)'가 조직되고, 1991년 11월에는 북미주 '한인세계선교협의회'와 태동 중에 있던 '한국세계선교협의회(KWMA)'가 공동으로 서울에서 '2000년대를 향한 민족과 세계복음화회의'를 개최했습니다.

1992년 2월에는 '한국세계선교협의회' 창립총회를 개최했는데, 이 때 '한국동반자선교협의회'는 발전적으로 해체하고 '한국세계선교협의회'에 합류했습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한국교회와 저 자신에게 미친 선교적 영향이 너무너무 크다고 고백하고 싶습니다. 부족한 저를 목회의 길과 선교의 길과 연합의 길로 안내하시고 인도해주신 조동진 목사님께 심심한 감사를 드립니다.

한 가지 말씀을 더 드리려고 합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는 독일은 물론 세계적으로 복음주의 선교신학의 대부이신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한국교회에 소개하시고, 여러 번 초청하셔서 한국교회로 하여금 복음주의 선교신학을 받아들이고 실천하게 하셨다는 사실을 지적하려 합니다.

미국에서 12년 동안 유학생활을 마치고 1974년 귀국 후 후암교회에서 목회사역을 하면서, 조동진 목사님께서 주관하시는 선교 모임과 선교 사역에 전적으로 참여하게 되었는데, 1975년 8월 조동진 목사님의 초청으로 서울에 오신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기초하신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 선언'을 정리해 1975년 8월 31일 발표했는데, 제가 심부름의 역할을 했고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께서 귀중한 조언을 많이 해주셨습니다.

1975년 8월 28일에 있은 AMA(아시아선교협의회)의 창립 모임에서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께서 축하 메시지를 전하셨습니다. 저는 그 이후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존경하고, 그분에게서 배우면서 그분과 친밀한 교제를 누리게 되었습니다.

조동진 목사님께서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에 대해, 그리고 당시 세계 선교의 상황에 대해 쓰신 '종말론적 선교신학의 거장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생각한다'라는 글을 그대로 인용하려고 합니다.

『피터 바이어하우스(Peter Byerhaus) 박사는 독일 튜빙겐대학교 선교학 교수로 1970년 독일 신학자 15명의 공동성명으로 발표되어 전 세계 복음주의 신학자들의 전폭적인 동의와 찬성과 지지를 박았던 저 유명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기초자이다.

내가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를 알게 된 것은 이 프랑크푸르트 선언 때문이었다. 그의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그것이 20세기 선교의 중심 세력이었던 미국에서가 아니라 유럽 대륙 신학의 중심국인 독일 신학자들에 의하여 선언되었다는 데 그 의의가 있다.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1968년 스웨덴 웁살라에서 모였던 WCC 총회의 세속화를 통한 교회 갱신 운동을 추진한 '웁살라 선언'에 대응해, 복음주의 교회를 대표하는 선언이었기 때문이다.

이 선언은 발표 즉시 미국의 「크리스챠니티 투데이」지에 그 전문이 소개되면서 범세계적인 관심을 불러 일으켰다. 맥가브란 박사의 즉각적인 지지 선언과 「크리스챠니티 투데이」 주간 해럴드 린젤(Harold Lindsell) 박사의 호응으로,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프랑크푸르트 선언의 기초자로서 비성서적 선교세력과의 투쟁의 최전선에 서게 되었다.

이 선언은 WCC의 기독교 선교가 정치 선교화됨으로 성경적 선교의 기초가 흔들리고 있음을 경고하는 말로 시작된다. 그러고 나서 필요 불가결(Indispensible)한 일곱 가지 선교의 기본요소를 적시하고 있다.

그 첫째 요소는 마태복음 28장 18절부터 20절까지에 나타난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의 대 위임령을 한 치도 떠나서는 안 된다는 것이며, 둘째 요소는 에스겔 38장 23절과 시편 18장 49절, 로마서 18장 9절을 근거로 선교의 최우선적이며 최고의 목적은 유일신 하나님을 온 세계가 영화롭게 하며 그의 아들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심을 만민에게 증거하는 것임을 선언한다.

셋째 요소로서 사도행전 4장 12절에 근거하여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다른 구주가 없으며 그는 참 하나님이시며 참 사람이시며 성경이 보여주는 그의 신비한 능력과 구속 사역이 우리 선교의 내용이며 권위라고 선언한다.

넷째 요소로 요한복음 3장 16절과 고린도후서 5장 20절을 적시하면서 선교는 그리스도의 교회와 적법하게 위임된 증인들에 의하여 설교와 성례와 봉사사역을 통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으로 성취된 영원한 구원을 증거하고 나타내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다섯째 요소는 베드로전서 2장 9절과 로마서 12장 2절의 말씀을 근거로 기본적인 가시적 선교의 과업은 모든 민족으로부터 구원받는 공동체로 메시아적 불러내심(Call out) 이라고 선언한다.

여섯째 요소로는 에베소서 2장 11절과 12절을 근거로 그리스도의 구원은 아직 신앙에 매이지 않은 모든 사람에게 예외 없이 주어진 것이며 비기독교 종교와 세계관에 집착한 사람들도 오직 이 신앙으로 말미암아서만 구원을 얻을 수 있음을 선언하고 있다.

마지막 일곱째 요소로 마태복음 24장 14절을 적시한 후에 기독교 세계선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과 재림 사이에 철저하게 계속되는 하나님의 구속사역임을 선언하고 있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가 기초한 프랑크푸르트 선언은 이 지구상에서의 사회적 성취나 부분적인 정치적 성공 대신, 아직도 세속적 왕의 지배 하에 있는 우리를 죄와 사망과 악마의 권세에서 해방시켜 하나님과 화해케 할 종말론적인 선교이어야 한다고 결론짓는다.

나는 그의 이처럼 철저한 도그마(Dogma)와 케리그마(Kerygma)의 통합된 신학으로서 선교학의 선언에 크게 감동되었다. 나는 그의 이 철저한 그리스도론적이고 종말론적인 선교관에 매혹되어, 그를 1975년 8월 서울에서 회집한 아시아선교협의회(Asia Missions Association, AMA) 창립대회 선교신학 기조 강연자로 초청하였다.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는 훗날 나의 초청을 받고 오래 기도한 결과, 하나님의 부르심인 줄 알고 초청에 응했다고 나에게 고백했다. 그는 서울에서 내가 기초한 '기독교 선교에 관한 서울선언'의 신학적 표현을 다듬는 데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나와 그는 그날 이후 종말론적 신앙에 근거한 21세기 선교의 앞날을 준비하는데 함께 동역하기로 합세하게 되었다.

그는 나를 독일 튜빙겐 대학교로 초청하고 몇 날 동안 자기의 동료 신학자들과 함께 지내도록 했다, 그리고 내가 작성한 「서울선언」을 독일어로 번역하여 전 유럽의 신학자들에게 배부했다.

우리는 때때로 유럽과 아프리카와 미국에서 기독교 선교의 큰 모임이 있을 때 함께 만났다. 1980년 나는 다시 그를 한국에 초청하고 두 주간 동안 함께 하기선교 대학원을 인도했다.

1989년 미국 텍사스 주 성 안토니오에서 모인 WCC 총회에서 만난 후 이 글을 쓰고 있는 현재까지, 우리는 다시 만날 기회를 가지지 못했다. 그러나 지난 2001년 어느 날 합동신학원 초청으로 한국에 왔다가 내가 있는 곳을 열심히 찾았다.

김명혁 목사를 통하여 나의 전화번호를 찾은 그는 오랜 동안의 만남의 두절을 못내 아쉬워하며, 자신의 전화번호와 이메일 주소를 전해주었으나, 얼굴과 얼굴을 대할 기회는 만들지 못하고 한국을 떠났다.』

조동진 박사
▲조동진 박사. ⓒ크투 DB

조동진 목사님이야말로 한국교회 선교운동의 아버지와 같은 분이신데, 저로 하여금 세계적인 복음주의 선교신학자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을 만나게 하시고 친밀한 교제를 나누게 하시고 그리고 한국교회에 소개하게 하신 귀중한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부족한 제가 미국에서의 유학생활을 마칠 무렵 저를 목회사역의 길로, 그리고 선교사역의 길로 인도해주신 조동진 목사님에게 진심으로 감사와 존경의 마음을 표합니다.

저는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글들을 번역해서 책에 싣기도 했고, 저의 선교학 강의에서 피터 바이어하우스 박사님의 복음주의적 선교 신학의 입장을 긍정적으로 소개하곤 했습니다.

1984년에는 튜빙겐 대학교에 Research Fellow로 있으면서, 바이어하우스 박사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기도 했습니다.

저의 평생의 은인이시고 스승이신 조동진 목사님께서 귀중한 선교의 사역을 아주 많이 하시다가 97세에 소천하신 것을 감사드리며, 하나님의 품 안에서 영원한 평안과 기쁨과 행복을 누리시기를 기원합니다.

부족한 제가 한 평생 목회와 선교와 교수와 연합 사역에 이바지할 수 있도록 저의 삶의 안내자의 역할을 해 주신 조동진 목사님께 진심으로 감사를 드립니다. 한국교회 선교의 대부이시고 선구자이신 조동진 목사님과의 만남은 저의 연구와 사역의 방향에 획기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생각합니다.

제가 조동진 목사님과 선교 사역에 참여하면서 다양한 여러 나라들을 방문하고 다양한 여러 나라들의 지도자들과의 만남과 교제를 통해, 화해와 연합사역의 귀중성을 눈으로 보면서 알게 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복음적인 선교는 민족주의와 정치적인 이념을 초월한다는 사실이었습니다.

사실 조동진 목사님께서는 북한에 대해서도 긍정적인 협력의 자세를 취하고 계셨습니다. 1989년 1월엔 북한을 방문하셨고, 이후 수 차례 북한과 왕래하며 분단 시대를 종식하고 민족통일의 종이 울릴 수 있기를 염원하셨습니다. 부족한 제가 북한동포 돕기를 지금까지 계속하게 된 것도 조동진 목사님의 영향이라고 생각합니다.

조동진 목사님을 우리들 모두의 스승으로 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면서 조동진 목사님의 선교에 전념하신 삶과 사역과 소천이 우리 남아 있는 후배들에게 깊은 감동과 가르침을 주셔서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땅끝까지 이르러 십자가의 복음과 사랑을 전하는 복음 선교의 사역이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게 되기를 간절히 바라고 소원합니다.

사랑하고 존경하는 조동진 목사님! 조만간 천국에서 반갑게 만나 뵙게 되기를 바랍니다!

김명혁 목사(강변교회 원로, 한복협 명예회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