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인수 교수(전 미주장신대 총장)
김인수 교수(전 미주장신대 총장)

일제는 기독교회가 그들의 교리를 내세워 신사참배를 반대 할 것이라 예견하고, 이 문제를 당장 기독교와 정면충돌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지 않다고 판단하였다. 그러면서 이것은 종교적 문제가 아니라 국가 의식이라는 논리를 내세웠다. 다시 말해서 신사참배는 종교 의식이 아니고 국민 된 사람으로 국가에 대한 의무로 수행하는 종교성이 없는 애국 행위라는 억지 주장을 하였다. 그들이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고 주장한 내용을 보면 이렇다.

1. 신사참배는 종교의식이 아니라 국민의례이며, 예배 행위가 아니고 조상에게 최대의 경의를 표하는 것일 뿐이다. 2. 교육의 목적은 학생들의 지적인 육성에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학생들로 하여금 천황의 신민이 되게 하는 데 있다. 그러므로 교사와 학생들이 모두 함께 신사참배를 통하여 천황에 대한 경의를 표하여야 한다. 그러나 일반인들의 신사 참배는 자유에 맡길 뿐이고 강제하는 것은 아니다.

일제가 각 급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게 된 배경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기독교 학교를 굴복시키기 위한 음모였다. 여기에는 한국 교회 지도자들과 선교사들 사이를 이간시키고, 이들 학교를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어 식민지 교육의 도구로 삼으려는 의도가 분명히 나타나 있었다.

1932년 일제는 평양 서기산(瑞氣山)에서 열린 춘계 황령제(春季皇靈祭)를 계기로 기독교 학교 공략에 나섰다. 평양에 있는 기독교계 학교에 참배를 강요했을 때, 선교사들이나 교사들은 우상숭배 행사에 참석할 수 없다는 입장을 분명히 전했다. 이에 대해 일제는 간교한 수단으로 그렇다면 제사 행위에는 참석하지 말고, 제사 후 국민의례에만 참석하라는 타협안을 내세웠다. 이에 따라 숭실전문, 숭실중학, 숭의여중학교가 이 예식에 참석하였다. 이를 계기로 전국 학교에 신사참배를 강요하였다.

자연히 이 문제는 교회의 문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1933년 장로회 총회에서는 전국의 여러 노회로부터 신사참배문제에 대한 문의가 있었다. 총회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차재명(車載明), 유억겸(兪億兼), 마펫 등의 교섭위원을 내세워 당국과 협의를 원했으나, 일제는 핑계를 대며 교회와 정면 대결을 회피하면서, 각 급 학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신사참배에 반대하는 학생이 있다면 당사자가 직접 청원하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일단 학교의 신사참배 문제는 총회의 차원이 아닌 학교 당국과 일제와의 문제로 좁혀지게 되었다. 그러나 이것은 어디까지나 일제가 아직 교회와 정면 대결을 피하고 학교를 굴복시킨 후 교회에 손을 대려고 하는 불순한 작전에 불과하였다.

일제는 마침내 이 문제를 정면 돌파하기로 방침을 세우고 대만 총독을 지냈던 안무직부(安武直夫)를 평남지사로 임명하였다. 그는 1935년 11월 중학교 이상 도내 공·사립학교 교장회의를 도청에 소집하면서, 회의 전에 모든 교장들은 평양 신사에 참배하도록 명령하였다. 그러나 숭실중학교 교장 맥큔(G.S.McCune)과 숭의여중 교장 스눅(V.L.Snook), 장로교가 연합하여 세운 숭인상업학교장 김항복(金恒福), 그리고 안식교 계통인 순안 의명(義明)학교장 리(H.M.Lee)는 신앙 양심상 참배할 수 없다고 거절하였다. 이에 당국은 세 사람에게 두 달의 여유를 주면서 그 때까지 응하지 않으면 파면시키겠다고 위협하였다.

일이 이렇게 전개되자 북장로교 선교사들 간에 이견이 일기 시작하였다. 이에 따라 신사문제를 근본적으로 연구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고 홀드크라프트(J.G.Holdcraft)에게 신사의 본질, 의의, 목적 등에 대해 자세히 연구, 보고하게 하였다. 그는 이 문제에 대해 검토하고 나서 1937년 3월 10일 장문의 보고서를 통해 "신사에는 종교적 요소가 혼재되어 있으므로 참배는 불가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선교부는 이 보고서를 각 선교사에게 보내고 신사참배 불가 결론을 확인하였다.

선교회는 평양 시내 목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선교회의 입장을 전하자 한국 교회 목사들도 이에 동조하고 신사참배를 단호히 거절하기로 결의하였다. 이에 따라 맥큔과 스눅 두 교장은 파면되어 결국 미국으로 추방당했다. 다른 교장이 그 자리를 대신하였지만 그들 역시 신사참배를 거절하기는 마찬가지여서 1937년 이들 학교는 마침내 폐교 신청을 하고 말았다. 숭실전문은 이종만(李鍾萬)에게 넘어가 대동공업전문학교가 되었고, 중학교는 당국이 접수하여 제3공립중학교가 되는 비운을 겪어야만 하였다.

북장로교계 학교의 폐교는 전국으로 확대되어 서울의 세브란스의전, 정신, 대구의 계성, 신명, 선천의 신성, 보성, 재령의 명신, 강계의 영실학교 등이 폐교했고, 서울의 연희전문도 1941년에 이르러 총독부로 넘어가는 비운을 맞게 되었다.

남장로교회는 북장로교회보다 이 문제에 대해 더욱 강경하였다. 그들은 신사참배 문제는 유일신론과 다신론간의 투쟁이라고 단정하고 여러 회의를 통해 확인하였다. 이 문제는 본국 교회의 총무 풀톤(C.D.Fulton)이 1937년 한국을 방문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그는 일본에서 태어난 선교사 2세이며 일본어, 관습, 종교에 대해 깊은 이해를 가졌으므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한 인물이었다. 그는 다음과 같이 신사문제에 대해 정의하였다.

첫째, [일본] 정부가 정의하는 종교는 기독교인들에게는 타당하지 않다. 둘째, 국가와 신도(神道) 사이의 어떤 차이도 찾을 수 없다. 셋째, 신사참배에는 여러 가지 종교적 요소가 많다. 넷째, 투옥과 고문, 그리고 죽음의 위협 아래서 표현되는 한국인들의 의견은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

이에 따라 남장로교회는 신사참배 절대 불가라는 입장을 정리하였다. 1937년 9월 새 학기가 시작되자 당국은 모든 학교에 대해 중국에 출정한 일본군의 승리를 천조대신(天照大神)에게 기원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남장로교 선교부는 본국 교회의 훈령과 또 선교사들의 결의에 따라 학생들을 집으로 돌려보내고 각 급 학교를 폐쇄하였다.

선교사들이 우리 민족의 개화와 발전을 위해 고난 속에서 세우고 가꾸어 왔던 이 모든 학교들이 일제의 민족 말살 정책의 희생물로 폐교당하는 현실 앞에 선교사들도, 교사들도, 학생들도 서러운 눈물을 흘리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역사를 섭리하시고 우리 민족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의 은총으로 이 모든 장로교 계열 학교들은 고난의 세월이 가고 해방이 왔을 때 모두 다시 문을 열고 본래의 사명을 수행하였으니, 역사는 신사에 참배하면서 학교를 계속했던 친일적 학교들과, 끝까지 우상 앞에 절하기를 거절하고 폐교했던 학교 중 어느 쪽이 옳았는가를 웅변으로 증언하고 있다. 신사참배를 하면서 황민화 교육을 계속했던 학교들은 민족교회와 역사 앞에 무엇을 남겼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