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재성 박사
(Photo : 기독일보) 김재성 박사

진정한 교회의 부흥은 우리가 어떤 정치적, 사회적 상황에 처해 있든지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소명이요, 임무이다. 죠엘 비키 박사는 사도행전 2장의 오순절 사건을 토대로 해서, 우리가 배워야 할 진정한 교회의 부흥을 여섯 가지 특징들로 분석하였다. 그 중에서 공감할 수 있는 부분들을 간추려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로, 교회의 부흥이란 잃어버린 영혼들이 하나님께로 돌아와서 영광을 돌리는 회개의 사건들이라고 할 때에, 이는 전적으로 성령의 주권적 사역이다. 성령님의 역사는 사람의 생각이나 판단으로는 잘 알 수 없다. 마치 바람이 어디에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것처럼, 단독적이며, 주권적이며, 갑자기 일어난다. 다만 그 결과를 보아서 알게된다 (요 3:8). 가장 중요한 점은 사람의 프로그램이나 계획에 따라서 교회의 부흥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에 일어난 예루살렘에서의 성령강림 사건이 어째서 당시 세계의 중심이던 로마에서나, 아테네에서 일어나지 않았던가! 복음을 이해하는 기초가 없는 자들에게 말씀의 선포를 통해서 새생명을 회복시키는 것이 부흥이라고 할 때에, 이런 현상들은 하나님의 단독사역이요, 하늘로부터의 인간세계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하심이다.

인간은 먼지에 불과하고, 마른 뼈로 돌아간다. 이스라엘은 마치 마른 뼈들로 가득차 있는 골짜기와 같았다 (겔 37:1). 유대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았을 정도로 완악함에 사로잡혀 있었는데, 그들이 교회로 돌아오게 되었다니 어떻게 이런 현상이 일어날 수 있었을까! 성령님께서는 거부할 수 없는 권능을 발휘하셔서, 먼지와 같고 마른 뼈와 같은 자들에게 깨달음을 주셔서 회개케 하셨다. 마른 뼈들이 다시 살이 붙고, 근육이 회복되어서 새생명을 얻은 자들이 되었다. 교회의 부흥은 사람들이 계획하고 조작해서 일어날 수 있는 일들이 아니었다.

둘째로, 진정한 부흥은 기도의 응답으로 주어졌다. 기도는 성령이 사용하는 수단이다. 예수님의 지시에 따라서 예루살렘에 모였던 120명이 성도들이 기도하는 중에 사도행전 2장, 성령의 부으심을 역사적으로 체험하게 되었다. 그들은 어린아이들처럼 하나님의 약속하심을 고대했고, 마치 집에 돌아온 아이들이 숙제를 하듯이 기도하고 기다렸다. 하나님께서 은혜를 부어주시고 할 때에, 먼저 기도의 영을 불러일으켰다. 기도의 열정마저도 성령의 지도와 가르침 안에서만 가능하다. 야고보는 "의인의 기도는 역사하는 힘이 많으니라"고 하였다 (약 5:16). 성령의 부으심이라는 사건이 발생했던 과정에는 성도들의 기도가 쌓여서 하늘에 상달하는 수고가 있었던 것이다.

오순절은 하나님의 구원경륜의 계획을 실현하는 기념비적인 사건이었다. 우리는 성경이 증거하는 성령의 강림사건과 기독교 역사에서 일어났던 수많은 부흥사건들을 지식으로 알고만 있는 것은 아닐까? 과거의 기록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며, 우리가 진정한 부흥을 꿈꾸며 기도하는 일을 멈출 수 없다. 기도 운동과 부흥의 사건이 1857년 미국에서 일어났던 제 3차 각성운동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여섯 명이 미국의 회복을 위해서 기도함으로써 시작된 제3차 각성운동은 1860대의 남북전쟁 후에 엄청난 전도의 열매를 맺은 무디의 부흥운동과 사회복음주의 운동으로 확산되어나갔다.

한국교회는 기도의 토대 위에서 운영되고 있다. 새벽기도회는 가장 큰 은혜의 산실이다. 수요기도회와 금요기도회는 경건의 연습이다, 은혜의 충만을 향해 나아가는 재충전의 시간이기도 하다. 모든 교회마다 지역마다, 교회의 부흥을 위해서 힘써서 기도하는 일이 우선되어야 한다. 성령의 충만을 소망하면서, 기도를 모아가야 한다.

셋째로, 부흥은 죄인들이 진심으로 회개하고, 진리 안에서 회복되는 사건이다. 베드로가 삼 천명의 회심자들을 돌이키는 설교에서 통회하는 자들을 향해서 "회개하고 세례를 받으라"고 하였다(행 2;38). 회개는 전인격적으로 변화를 받아서 말씀 앞에 반응하는 것으로서 하나님께로 돌이키는 것을 말한다.

회개는 일시적으로 돌이키는 순간에 일어나는 것도 있고, 일생 동안 날마다 지은 죄를 고백하는 지속적이요 반복적인 다짐이기도 하다. 회심은 자신을 위해서 살아오던 사람이 이제는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아가는 생활을 의미한다. 그러나 회심하는 순간으로부터 다시 태어난 성도의 신앙생활은 꾸준히 연단과 훈련의 과정을 거쳐나가게 된다. 이것은 성화의 과정이요, 성숙의 시간들이다.

성령이 작용하는 부흥은 항상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수반하였다 (행 2:41,44). 회개하고 돌이킨 심령 속에는 총체적으로 믿음이 심겨진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서는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를 구세주라고 고백할 수 없다 (고전 12:3). 믿음을 따라서 살아간 선조들은 보이지 않는 나라를 향해서 의심하지 않고 살아갔다.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로라 증거하였다"(히 11:13).

넷째로, 부흥은 새로운 신자들을 만들어내는 회개의 사건들일 뿐만 아니라, 기존 신자들의 각성과 성장을 통해서도 이뤄진다. 교회의 부흥은 이미 믿음을 가지고 있던 성도들의 새로운 각성과 영적인 성장에서 시작하는 경우가 많았다. 소수의 성도들이 성령의 부으심을 체험하고, 그들이 나아가서 수 천명을 회심시키는 도구가 되었다. 부흥이라는 은혜의 폭풍이 불어오게 되면, 차가운 마음이 녹아내려서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긍휼히 여기는 동정심으로 가득하게 된다.

모든 사람은 하나님께서 흙으로 빚으신 연약한 질그릇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데, 안타깝게도 여전히 자기 자신만을 사랑한다. 욕망으로 가득 찬 우리는 영적으로 차가운 상태에서 살아간다. 우리는 일시적이며 제한적인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는 인식을 하지 못한 채, 마치 영원토록 보장을 받은 인생인양 착각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믿음을 회생시킬 때에,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회개가 일어나고, 순종하고자 하는 결심이 새로워지며, 사랑으로 봉사하게 된다.

다시 말하지만, 우리는 교회 안에서 진리가 회복되어서 모든 성도들의 진정한 변화가 있기를 소망한다. 태양이 산꼭대기에서부터 떠올라서 차차로 그 밝은 빛이 온 마을과 평야로 퍼져나가듯이, 진리에 감동을 받은 목회자들이 변하게 되고, 차츰 그들의 영향으로 교회가 밝은 빛으로 가득하게 되는 것을 기대한다. 이것은 어떤 프로그램을 통해서 만들어내려 한다거나, 어떤 놀라운 목회적 방법론으로 따라가면서, 인간 중심의 부흥을 꿈꾸는 것이 아니다. 말씀과 함께 역사하시는 성령의 충만을 말하려고 하는 것이다. 놀라운 영적 성숙과 성장이야말로 부흥의 현상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성령께서 말씀으로 영혼들을 치유하심으로 가능하게 된다 (시 107:20). 사람이 중심이 되어서 일어나는 부흥이 아니라, 진리의 말씀과 진리의 성령이 오셔서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중생하게 하셔야만 참된 부흥이 가능하다.

1857년, 뉴욕 부흥의 현장에 있었던 제임스 알렉산더가 자신의 책을 읽는 독자들에게 던진 질문들이다:

여러분은 부흥의 주역이 되기를 원하는가?

여러분은 부흥에 대해서 부정적인가?

여러분은 부흥의 방관자인가?

여러분은 부흥의 열매를 위해서 간절히 기도하고 있는가?

여러분은 불신자들이 돌아옴으로써 하나님의 이름이 존귀케 되기를 원하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