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Photo : 기독일보) 솔트하우스선교회 대표 박광철 목사

이 시대는 보복이 일상화되다시피 한 세대이다. 정치 보복을 비롯해서 국제간의 경제 보복이 많고 다량 학살 등을 통한 보복으로 나라 간의 갈등이 그치지 않는다. 아프리카 일부 나라에서 그치지 않는 종족 간의 갈등도 알고 보면 서로 보복하기 때문이며, 특히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싸움도 서로 상대방을 비난하고 보복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래서 용서한다는 말은 요즘 언론에서도 듣기 어렵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백성은 용서에 인색하지 않아야 한다.

왜 용서해야 하고 몇 번이나 용서해야 하는가? 성경이 말하는 용서는 무슨 죄라도 용납하라는 것이 아니고, 무조건 참아주는 것도 아니며, 상대방이 먼저 사과할 때만 용서하는 것도 아니다. 상대방의 잘못에 대해서 묵인하거나 괜찮다고만 말하면 그와 같은 행위가 반복될 우려가 있다. 용서에는 근거가 있어야 한다. 실제로 용서가 없는 곳에서 아름다운 영성을 기대할 수는 없다.

우선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들의 죄를 용서하셨다. 그것은 나의 회개와 선한 행동 때문이 아니라 우리에게 대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롬 5:8). 그 사랑에 호응하여 죄를 회개하고 그를 믿을 때에 비로소 용서가 이뤄진다. 주를 믿는 믿음이 없어도 용서되는 것은 아니다. 마치 확실한 약 처방을 받았으면 그 처방대로 약을 복용해야 병이 낫는 것과 같아서 이미 용서의 길을 열어 놓으셨지만 그것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온전한 용서가 가능한 것이다.

남을 용서하지 않으면 자신의 신앙과 기도 생활에 장애가 된다. 용서해야 하는 이유는 많다. 우선 자신의 마음이 불안하고 불편하며 상대방과의 관계가 깨어진 상태로 남아 있게 된다. 그로 인해서 기도에 장애가 되어 갈등하게 된다. 그러나 용서하면 먼저 용서하는 자의 마음에 평안이 오고 인간관계의 회복의 기회가 생긴다.

상대방이 용서를 빌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일방적으로 용서해야 한다. 상대방의 행동 여부에 따라서 용서할 것인지 안 할 것인지를 결정하는 것은 성경적인 용서가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죄인으로 있을 때에 이미 우리 죄를 용서하시고 우리가 그에게 돌아오기를 기다리신다. "내게 네 허물을 빽빽한 구름같이, 네 죄를 안개같이 없이하였으니 너는 내게로 돌아오라. 내가 너를 구속하였음이니라" (사 44:22). 이제 우리가 해야 할 것은 무슨 선행이나 종교적 의식이 아니라 다만 주께로 마음을 돌이키는 것이다.

용서에는 한계가 없다. 베드로가 주님께 물었다. 형제가 자기에게 용서를 구하면 몇 번 정도 용서해야 하는가라는 것이다. 그러자 예수께서 대답하시기를 "일곱 번 뿐 아니라 일곱 번을 일흔 번까지라도 할지니라" (마 18:22). 대체로 동양 사람들은 "삼 세 번" 즉 세 번 정도 용서하면 충분하리라 생각하고 유대인들은 일곱 번으로 충분하게 여겼는데 예수님은 용서에 제한이 없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탕자의 아버지가 집에 돌아온 아들을 조건 없이 용서하고 받아준 것이나 예수께서 우리를 먼저 사랑하시고 용서해 주신 것을 생각하라.

남을 용서할 뿐 아니라 내가 용서받을 것이 있는지 깊이 생각해 보라. 우리는 흔히 내가 누구를 용서해야 하는지를 생각하지만 나 자신이 용서받아야 할 것도 생각해 봐야 한다. 남에게 용서받아야 할 것이 있다면 기다리지 않고 먼저 가서 용서를 구해야 한다. 무엇보다도 하나님께 죄를 자백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우리를 모든 불의에서 모든 불의에서 깨끗하게 하실 것이요" (요일 1:9). 어떤 죄는 하나님께만 자백하고 버리면 되지만 어떤 죄는 직접 당사자를 찾아가서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리고 경우에 따라서는 합당한 보상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진정한 용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남의 돈을 훔친 사람이 회개하려면 잘못을 인정할 뿐 아니라 그 돈을 돌려줘야 한다. 그 돈을 지니고 있는 상태에서는 진정한 용서가 이뤄지지 않는다.

그리고 진정한 용서는 용서한 후에 그것을 잊어버리는 것이다. 용서했다고 말하면서 마음에 계속해서 앙심을 품고 있거나 자주 기억해 내고 있다면 그것은 온전히 용서한 것이 아니다. 주님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시고 더 이상 기억하지도 않으신다고 말씀하신다 (히 10:17).

대표적으로 구약에 나오는 요셉의 경우를 생각하라. 그는 형들이 시기심으로 애굽 나라에 종으로 팔려 가게 되었고 그곳에서 갖은 수난과 고통을 겪었다. 그는 건장한 청년이어서 많은 유혹을 받았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마음으로 결사적으로 유혹을 이겼지만 억울한 감옥살이도 했다. 후에 형들이 곡식을 사러 가나안에서 내려와서 요셉을 대하게 되었다. 그들은 당대 가장 강력한 나라인 애굽의 총리 대신이 자기들의 동생인 요셉인 것을 알고 놀라고 크게 두려워하여 보복을 당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불안해 했다. 그런데 요셉은 자기 형들에게 뭐라고 말했는가?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창 45:5). 요셉의 놀라운 용서의 마음을 볼 수 있다. 이런 의미에서 진정한 용서는 사건에 대하여 자기의 눈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으로 해석하며 조건이 없이 올무에서 풀어주는 것이다.

"너희는 모든 악독과 노함과 분냄과 떠드는 것과 비방하는 것을 모든 악의와 함께 버리고 서로 친절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 (엡 4;31-32).

"너희가 사람의 잘못을 용서하면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도 너희 잘못을 용서하시려니와" (마 6:14).

"누가 누구에게 불만이 있거든 서로 용납하여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같이 너희도 그리 하고" (골 3:1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