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김영한 박사(기독교학술원 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

올해는 102주년 3.1독립만세 기념해이다. 3.1운동은 단지 일제에 대항하여 독립만세를 부른 민족적 저항의 날만이 아니라 이 독립만세 운동을 기점으로 하여 전 국민들의 저항 정신이 한데로 모아져 상하이에 임시정부가 생겨나게 되었고, 여기서 대한제국을 다시 복구하는 것이 아니라 대한민국을 창립하게된 것이다. 다시는 황제가 중심이 되는 나라가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를 창립하겠다고 임시정부가 세워지고, 그 정신이 계승되어 독립운동이 지속되었고, 일제가 패망하자 대한민국이 1948년 새로운 국가로서 탄생하게 된 것이다.

3.1운동은 기독교와 분리해서 생각될 수 없다. 3.1운동이란 일제 식민지로부터 독립운동으로 1910년 당시의 군국주의 일본에 반항한번 제대로 하지 못하고 대한제국의 국무위원들이 일본에 1905년 을사보호조약을 통해 군사권과 외교권을 빼앗긴 후 형식적으로 남은 국가의 권력까지 일본에 문서적으로 넘겼다. 5백년 지속된 조선(朝鮮)이 한일한방 조약에 의하여 일본에 국가의 옥쇄를 넘긴 것이다. 그래서 1911년 동아시아를 여행한 영국의 페이비언사회주의(Fabian Socialism) 신봉자 비어트리스 웹(Beatrice Webb, 1858~1943)은 한국인을 "호모 사피엔스가 진화하지 않으면 어떻게 되는지 보여주는 비천한 척추동물"로 멸시했다. 국가를 계급지배의 도구로 보지 않고 사회복지의 도구로 본 그에게 나라의 주권을 일본에 넘겨준 한국인은 독립정신이 없는 미개인으로 비쳤던 것이다.

1. 대한제국의 무능

당시 대한제국(大韓帝國, Korean Empire, 1897-1910)은 무너져가는 조선(朝鮮)이 1897년 제국선언으로 이름만 바꾼 것이다. 제국이 될만한 군사, 재정의 능력이 없었다. 고종은 선언적으로는 황제가 되었으나 황제에 걸맞는 힘이 없었다. 대원군의 쇄국정책으로 청나라의 국력이 다하고, 일본이 개화로 군사대국이 된 것도 파악하지 못한 채 19세기의 서구 열강의 식민지주의에 아무런 대항할 힘이 없었다. 관리들은 탐관오리로 가난한 서민들을 착취하고 민생을 제대로 돌보지 않았다.

조선(朝鮮) 헌종 때인 1845년부터 22년간 포교하다 순교한 다블뤼 주교가 파리 본부에 보낸 편지에서 "조선의 양반들은 평민에게 지독한 폭정을 가한다. 평민을 착취, 약탈, 불법 구금한다. 아무도 제지하지 못한다"고 썼다. 대한제국은 국호를 황제의 나라라고 선포했으나 이를 뒷받침해줄 국력이 없었다. 군대도 없었고, 경제력도 없었다. 당시 서양 선교사에 조선의 집이란 짐승이 사는 움막처럼 보였다. 당시 일본은 1895년 청일전쟁에서 승리하여 만주일대를 손아귀에 넣었고, 1905년 로일전쟁에서 승리하여 조선(朝鮮)에 대한 지배권을 양도받았다. 이러한 19세기 말의 식민주의 시대에 조선은 국호만 대한제국이었으나 황제는 아무런 힘도 없었다.

2. 3.1운동으로 대한민국의 창립

1910년 한일합방하고 10년이 지나면서 한국인들은 일본의 식민지 국민으로 일제로부터 각종 억압과 천대를 받았다. 조선의 전통 종교인 불교와 유교가 진공상태로 일본 식민지 정책에 감히 대항할 엄두를 갖지 못하게 할 때 기독교는 모든 인간이 평등하며 자유롭게 지음을 받았다는 자유와 평등사상을 고취시켜주었다. 그리고 식민지배에서 벗어나 바로 독립을 되찾아야 한다는 독립정신을 점화시켜주었다. 1919년 3월 1일 한국인은 국가와 민족의식이 깨어있는 민족임을 입증했다. 양반, 상놈, 천대받는 기생까지 독립 만세를 외쳤다. 망국이 다 나의 책임이라고 고백한 민족적 고해성사였다. 한국이라는 나라와 국민이 없어진 데서 살아난 날이었다. 국가의 주권이란 왕으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라 국민으로부터 나온다는 것을 선언하면서 3.1운동은 임시정부수립으로 이어졌고, 새로운 나라는 더 이상 황제의 나라, 대한제국(大韓帝國)이 아니라 국민이 중심이 되는 나라가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면서 대한민국(大韓民國)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3. 조선 및 역대 정부의 숭중(崇中) 사대(事大) 주의

조선(朝鮮)의 왕들은 정월 초하룻날 중국 황제에게 올리는 망궐례(望闕禮)를 치렀다. 대궐에 중국 황제를 상징하는 궐패(闕牌)를 모신 뒤 문무백관을 거느리고 군신(君臣)의 예를 갖춘 것이다. 1898년 폐지될 때까지 거른 적이 없다. 김훈의 소설 '남한산성'에는 성안으로 쫓겨들어간 인조가 명(明) 황제에게 바치는 망궐례 모습이 나온다. 청나라 군대가 성을 포위하고 지켜보는 가운데 인조는 세자와 함께 곤룡포를 휘날리며 춤추고 노래 부른다. 조선이라는 나라의 치욕과 무력감이 극에 달하는 장면이다. 조선왕들은 명나라를 숭배하는 사대주의 때문에 청나라 군대에 의하여 굴욕을 당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숭중사대(崇中事大)주의는 오늘날에도 반복되고 있다.

박근혜 전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하여 공산당 창건일을 축하하였고, 문재인 대통령은 2017년 중국 방문 때 "한국과 중국은 운명 공동체" "한국은 작은 나라, 중국은 큰 봉우리"라고 했다. 노골적 친중 선언이었다. '3불 약속'은 안보 문제를 중국이 정해주는 대로 따르겠다는 자발적 굴욕이었다. 중국 경비함들이 오늘날 서해 백령도 앞바다까지 드나들어도 항의 한번 못 한다. 대통령부터 이러니 집권 세력 전체가 공산 중국에 굴종하는 것이다. 오늘날 중국은 생체 정보로 인권을 감시하고 탄압하는 디지털 파시즘(digital fascism)으로 신장 위구르, 티베트, 홍콩 주민들을 압제하고 있다. 중국 공산당의 초대형 군사 궐기에 대하여 미국·일본·호주·인도의 4각 협력체(Quad)라는 새로운 연합체를 만드는데 한국은 한미동맹으로 이에 당연히 참가해야함에도 불구하고 중국 눈치를 보고 이에서 스스로 소외되고 있다. 이는 오늘날 정치지도자가 시대상황을 제대로 보지못하는 어리석은 외교적 처신이다.

4. 기독교 정신을 가진 자유민주주의 지도자 이승만

당시 조선(朝鮮)의 관료들은 국민의 소리를 듣는 자들이 아니라 국민의 압제자였다. 이에 도피처가 된 것이 서양 기독교 선교사였다. 이들은 복음을 들고 와서 하나님 앞에 평등사상과 자유와 독립사상을 불어 넣어주었다. 기독교 지도자들은 구약 성경으로부터 모세와 다니엘, 느헤미야, 에스더의 신앙 이야기를 들으면서 기독교 신앙이 애국사상과 연결된다는 것을 알고 선교사 모르게 독립운동을 모의하게 되었다. 교회의 전국적 조직은 당시 집회결사의 자유가 금지되었던 시대에 유일한 전국적 연락망이 가능하게 되었다.

1894년 갑오개혁으로 과거제가 폐지되자 21세 이승만(李承晩)은 영어를 배우려고 북감리교 선교사 아펜젤러가 1885년에 세운 배재학당에 입학했다. 당시 이승만은 북장로교 의료선교사인 올리버 에비슨(Oliver R. Avison, 1860-1956)으로부터 "기독교 국가에서 백성들이 통치자의 독재에 항거하여 자신을 지켜냈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치적으로 개종했다. 이승만은 "이런 정치 원리를 알게 된 것만으로도 우리같이 짓밟혀 사는 백성들에겐 큰 복"이라고 생각했다. "민주 정부와 개인 자유라는 것들의 신기한 존재"라는 문구는 청년 이승만의 가슴에 불을 붙였다. 그는 1896년 서재필의 독립협회에 참여하여 근대민주정부를 창립하고자 하였다. 1899년 공화정부를 모의한 죄로 체포된 이승만은 사형선고를 받았다. 목에 칼을 쓰고 손발이 묶인 채 빨리 죽어 고통에서 벗어나기만 바랐다. 그는 감옥에서 인격적으로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다. 깜깜한 어둠 속, 배재학당 예배당에서 들은 설교가 떠올랐다. 이승만은 칼 위에 머리를 숙이고 기도했다. "오, 하느님. 내 영혼과 내 나라를 구해주소서." 그는 감옥에서 40여 명의 양반 관료들과 지식인들을 기독교인으로 개종시킨다.

1904년 러일전쟁이 발발하자 이승만은 나라의 운명에 가슴을 치며 국가 백년대계를 위하여 『독립정신』이라는 책을 써서 1910년 로스안젤레스에서 발간하였다. 이승만은 나이 30세에 선교사의 추천으로 미국에 유학하여 워싱턴대에 편입하여 2년만에 학사 학위를 받고, 하버드대에서 석사 학위, 프린스턴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이승만은 그 당시 영어를 마음대로 구사하고 세계의 지도자들과 대등하게 국제정세를 논할줄 알고 미래를 예시한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타협 없는 반일 독립운동가로서 자유대한민국을 건립하기 위하여 일생을 바친 선구자였다. 이승만은 학력으로나 오랜 외국생활과 정치연륜으로 보아서 그 뒤에 나온 어느 대통령보다 걸출한 지식과 신앙과 인품을 가진 지도자였다. 그는 대한민국 대통령으로는 영국 에딘버러대 박사학위를 가진 윤보선과 함께 해외 박사학위 소유자로서 세계문물을 아는 경륜의 국가지도자였다.

이승만은 기독교 신앙을 가지게됨으로써 대한민국을 기독교 국가로 하나님의 지배를 받는 나라가 되도록하는 비전을 소유하였다. 그가 실현한 나라가 바로 오늘날 대한민국이다. 이승만은 그의 후반기에 인적 장막에 가로 막혀서 국민들의 뜻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자기 동상을 만들게 하고 독재의 길로 갔으나 4.19혁명을 통하여 민심을 알게되자 스스로 권력을 내놓을 줄 아는 애국 지도자였다.

5. 기독교는 민족의 미래: 기독교 정신은 애국 정신에 녹아들어 있다.

당시 3.1운동에 참가한 기독교는 20여만 명으로 전국민의 약 1.5%에 불과했으나 2천만 민족의 마음을 움직이는 독립운동을 가능케 했다. 그리고 가장 큰 박해와 피해를 입었다. 그 대가로 오늘날 기독교는 한국사회의 제일의 종교가 된 것이다. 2015년 종교연감에 의하면 한국 기독교는 967만 명으로 전통 종교인 불교를 제치고 제1종교로 자리잡았다.

역대 대통령 윤보선, 김영삼, 이명박은 개신교인, 김대중, 박근혜, 문재인은 천주교인이었다. 역대 국회의원들 절반 가량은 기독교와 관련되어 있다. 이것은 기독교가 한국 근대화 과정에 크게 영향을 준 것을 나타낸다. 그러면서도 대다수 교회 목회자들이 착실한 복음 전도자로서 성경적 기독교를 설교하고 교회의 성장도 이룩하고 사회봉사도 다른 종교들보다 더 잘하고 있다.

그런데 지극히 소수 교회, 목회자들의 비리와 탈선으로 인하여 전체 교회의 신뢰성이 실추되는 것은 안타까운 실정이다. 특히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온 국민들이 어려움을 당하고 있는데 방역지침을 어기고 대면예배를 강행하는 소수교회, 집단감염의 온상이 된 사립 선교단체 등으로 인하여 한국교회의 신뢰도가 많이 실추되었다는 보도가 있었다. 그러나 거의 대부분의 한국 공교회와 목회자들은 너무나 신실하고 애국적이며 헌신적으로 국가와 민족을 위하여 기도하고 봉사하고 있다.

오늘날 한국교회 주일예배의 설교에서 구약에서는 모세, 느헤미야, 에스더, 다니엘, 신약에서는 예수님, 사도 바울 등의 애국적 신앙 지도자들을 귀감으로 끊임 없이 기독교 정신은 애국 정신으로 선포되고 있다. 한국교회 초창기 부터 기독교 정신은 애국 정신과 연결되어 설교되어 기독교 정신은 민족 정신으로 녹아들어와 있다. 그러므로 3.1독립운동이 교회 안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1년 이상 코로나 팬데믹으로 인하여 지구촌이 고난 속에 있고 한국사회가 어려움 속에 있다. 한국교회의 미래란 3.1정신을 발휘하여 방역에 최선을 다하여 사회적 책임을 이행하고 코로나 퇴치에 앞장 선 종교임을 보여주는 데 있다.

김영한(기독교학술원장, 샬롬나비 상임대표, 숭실대 기독교학대학원 설립원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