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림절을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두 가지
1. 디아스포라 상황에서 주어진 절기
2. 백성들 자발적 동의로 제정된 절기

▲하만이 모르드개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부럽고 두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그림.
(Photo : ▲하만이 모르드개가 말을 타고 있는 모습을 부럽고 두려운 모습으로 바라보고 있다. 17세기 네덜란드 화가 피터르 라스트만(Pieter Lastman, 1583-1633)의 그림.)

오는 2월 25일 저녁부터 26일 저녁은 유대력에 따른 부림절이다. 하지만 부림절을 기념하는 교회는 많지 않는 듯 하다.

모세 율법에 규정된 절기들을 잇는 부활절, 맥추절, 추수감사절은 그 명맥을 이어가지만, 율법에 규정되지 않는 절기인 부림절은 교회에서 거의 무시된다.

필자는 부림절을 맞아, 그날의 의미를 새롭게 되새기는 것이 신앙의 본질을 이해하는데 중요하다고 생각하여, 이 지면을 빌어 부림절의 의미를 함께 나누고자 한다.

‘부림’은 본래 페르시아의 총리 하만이 유대인의 학살 날짜를 정하기 위해 던진 제비 돌을 일컫는 말이었다(에 3:7; 9:26). 하지만 에스더서에 묘사된 대로 그 ‘부림’이 정한 날은 유대인의 멸망이 아닌 승리의 날이 된다.

부림절은 그런 죽음에서 생명으로의 반전의 역사를 기념하는 날이다. 하지만 이 날은 유대인들이 죽다 살아난 것을 단순히 축하는 날이 아니다. 부림절이 주는 교훈은 이보다 훨씬 깊다.

부림절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두 가지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첫째, 부림절은 이스라엘 백성이 자기 땅에 살아가는 상황을 전제한 절기가 아니라, 그들이 이방 나라에 흩어져 사는 디아스포라의 상황에 주어진 절기라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 하나님이 백성이 하나님이 주신 땅에서 누리는 축복을 감사하는 날들이 아니라, 하나님이 없는 것 같은 상황에서 신앙인들이 스스로 일군 기적을 축하하는 날이 부림절이다.

둘째, 이스라엘의 다른 절기들은 하나님 명령의 형태로 내려진 것이지만, 부림절은 모르드개와 에스더의 제안에 백성들의 자발적 동의로 제정된 것이다. 에스더서는 부림절을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수용한 결과임을 세 번이나 반복하며 강조한다(에 9:23, 27, 31).

이 두 가지를 염두에 두고 부림절의 의미를 새겨보자. 부림절은 단순히 유대인들이 죽음을 면했음을, 혹은 대적들을 멸했음을 자축하는 날이 아니다. 그 날은 하나님이 역사하지 않는 듯한 세상에서, 유대적 신앙 정체성을 지키며 살아가겠다고 새롭게 다짐하는 날이다.

당시 페르시아에 살던 유대인들에게 신앙은 역사상 처음으로 ‘선택’의 문제가 되었다. 이스라엘 땅에서 유대인의 부모 아래 태어나면 유대인이 되었던 이전에는 유대적 정체성이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하지만 페르시아 치하에서 유대인들은 본인이 원하면 페르시아인으로 살 수 있었다. 페르시아 사람들도 제국의 방식에 순응하기만 하면 민족 출신은 굳이 따지지 않았다.

때문에 많은 유대인들이 페르시아식으로 개명한 후 유대인의 정체성을 숨기고 살아갔다. 그것이 출세와 성공에 도움이 되었기 때문이다. 유대인의 부모에게서 태어났다 해도, 신앙을 고집하지 않으면 페르시아 사회에서 성공할 수 있었다.

에스더도 자신의 유대인 이름(‘하다사’)을 숨기고 페르시아인들이 사랑하는 여신을 연상시키는 이름인 ‘에스더’로 궁중 생활을 시작한다. ‘마르둑의 사람’이라는 이름을 가진 모르드개도 유대인의 신분을 숨기고 살았다.

하지만 사회의 불의가 신앙의 임계점을 넘자,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자신이 유대인임을 밝히고 유대인으로 살아가는 결단을 한다.

물론 그 순간 모르드개와 에스더는 정반대의 선택을 했을 수도 있다. 그랬다면 오늘날 부림절은 없었을 것이다.

그날이 멸망이 아닌 승리의 날로 뒤바뀐 것은 유대인으로 살겠다는 의지와 선택들이 쌓이고 쌓였기 때문이다. 모르드개와 에스더를 본받아 신앙의 이름으로 불의와 싸운 사람들이 들불같이 일어났기 때문이다.

▲렘브란트 작품 <에스더의 연회에 참석한 아하수에로와 하만>.
(Photo : ▲렘브란트 작품 <에스더의 연회에 참석한 아하수에로와 하만>.)

이처럼 부림절은 유대인들이 불의한 세상에서 신앙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겠다고 공동체적으로 다짐하는 날이다. 요람 하조니는 다음과 같이 부림절의 의미를 설명한다.

“유대인들이 자발적으로 받아들인 것은 부림절이라는 정기 축제이지만, 모르드개가 정말 의도한 것은 (하나님의) 언약을 새롭게 수용하는 운동이라 말할 수 있다. … 그리고 하나님(의 성전)과 멀리 떨어져 사는 유대인들을 위한 세계시민적 메시지를 추가로 전한다.

유대인들이 스스로 일어나 그들의 신앙을 위해 싸운다면, 디아스포라의 환경이 유대 개인뿐 아니라 유대 민족 전체에게 권능과 생명을 허락할 수 있다!” (<에스더서로 고찰하는 하나님과 정치>, 홍성사, 253-54쪽)

부림절의 주인공들에게 유대인이라는 사실은 두려움 가운데 감추어야 할 것이 아니었다. 유대인들이 유대인다워졌을 때, 즉 불의와 담대히 맞서 싸웠을 때, 페르시아 사람들이 오히려 유대인을 존중하고 두려워했다. 나아가 페르시아인들 중 스스로 유대인이 되려는 사람도 생겨났다(에 8:17).

모르드개는 신앙의 이름으로 하만의 독재에 굴하기 거절하다가 직위와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했고, 에스더도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고 유대 민족을 학살하려는 하만의 악한 계획을 온몸으로 막아냈다.

부림절의 주인공이 되기 위해서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직위와 목숨을 걸 필요는 없다. 하지만 “네가 왕후의 자리를 얻은 것이 이 때를 위함이 아니냐”라는 모르드개의 도전(에 4:13-14)은 우리 모두에게 여전히 유효하다.

신앙의 가치를 실천하려 할 때, 우리에게는 내려놓아야 할 무엇인가가 생긴다. 그것이 포기일 수도 있고, 나눔일 수도 있다. 귀찮다고 혹은 두렵다고 부림의 날을 멸망에서 승리로 바꾸는 일을 게을리 해서는 안 될 것이다.

신앙인들이 이 세상을 정의와 사랑으로 채워가는 일에 힘쓸 때, 세상도 신앙인들을 존중하게 되고 신앙인들의 편에 서려 할 것이다.

▲김구원 박사. ⓒDB
(Photo : ▲김구원 박사. ⓒDB)

김구원 박사
서울대 철학과를 거쳐 미국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목회학 석사 학위를, 시카고대학 고대근동학과에서 박사 학위를 취득하고 개신대학원대학교에서 가르쳤다. 일반인과 평신도에게 구약 성경과 고대 근동 문화를 가르치고 소개하는 일에 관심이 많으며, 이에 관련된 영문 및 우리말 단행본과 논문도 다수 출간했다. 저서로는 그리스도인을 위한 통독 주석 시리즈 《사무엘상》, 《사무엘하》, 《김구원 교수의 구약 꿀팁》, 《가장 아름다운 노래: 아가서 이야기》, 《쉬운 구약 개론(공저)》 등이 있고, 옮긴 책으로는 맥스 디몬트의 《책의 민족》, 요람 하조니의 《구약 성서로 철학하기》, 프리처드의 《고대 근동 문학 선집(공역)》 등이 있다.